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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40화 (40/87)

40화

세르미네는 잠시 서서 그 유적을 올려다보았다. 저 먼 나라에 있는 사막의 피라미드나, 이곳 대륙에 있는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 등에 비하면 작은 유적이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밀림 한가운데에 우뚝 선 고대의 유적에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달랐다. 이런 건물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봐 온 사람이었다.

대신 그는 이곳에서 묘한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 느낌은 비단, 이끼 낀 거무죽죽한 벽돌이나 벌레가 기어가는 낡은 돌바닥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검고 눅눅한, 몹시도 끈적거리는 공기가 주변에 맴돌고 있었다.

‘기분 나쁘군. 이 안에 무언가 있는 건가.’

세르미네는 신을 딱히 믿지 않았다. 아틀란티스의 사람이라고 해서 전부 신을 부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세르미네는 그랬다. 그는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느니 차라리 자신을 믿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에도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을 맹신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대부분 인간의 인식 범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족의 소행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통 인간이라면 불길하다며 도망갈 위압감에도 세르미네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안에 마족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해 차츰 사명감에 불탔다.

“마족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주저할 것 없이 세르미네는 입구에 꽂혀 있던 횃불을 손에 들고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물기를 머금은 미끄러운 바닥 돌을 조심하며 안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니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다. 횃불의 빛이 환하게 내부를 밝히자 벽에 기어다니던 전갈이나 거미 등이 재빠르게 구석으로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리슈아가 있었다면 비명을 질렀겠군.’

그런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니 세르미네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통로를 지나 들어온 곳은 네모반듯한 하나의 방이었다. 횃불 하나에 의지해 유적 안을 살펴보니 눈에 보이는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다. 게다가 신에게 기도를 바치던 곳이었는지 큰 제단 하나가 놓여 있었고, 특별한 것은 없었다. 혹시나 마족이 숨어 있나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흐음….”

아무래도 자신이 넘겨짚었나 싶어 발을 돌리려던 세르미네는 유적의 한쪽 끝에 난 계단을 발견했다. 반으로 금이 간 제단의 뒤에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통로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혹시 아래층에 마족이 있을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세르미네는 깨진 채 여기저기 널브러진 유물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계단을 향해 다가갔다.

계단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워낙 어두컴컴하기도 했지만, 계단이 상당히 길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무언가 위협이 되는 것이 튀어나올까 싶어 세르미네는 천천히, 주변을 잘 살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던 중, 그는 무언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이끼에 가려지고 퇴색되긴 했지만,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흠. 벽화로군….”

잠시 흥미가 생겨 횃불을 가까이 들이대 보니 사람과 신화생물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밑에는 옛 문자로 조그맣게 글자도 쓰여 있었는데, 그 부분은 깨지고 빛이 바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벽화 자체가 있는 것이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 유적에는 으레 벽화가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이곳이 여느 곳과 다른 점은 1층에는 아무 벽화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무얼 나타내는 거지?’

글자를 읽어보기 위해 세르미네는 조금 더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손상된 부분이 너무 많아 해독을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하나하나 짐작하는 글자를 그려보았지만, 여전히 의미는 알 수 없었다.

한참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던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도리질을 쳤다.

‘아니지. 지금 이걸 볼 때가 아니야.’

목적은 마족이었다. 저 지하층에 마족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눈팔 틈은 없었다.

조용한 유적 안에 다시 발소리가 울렸다. 행여나 반들거리는 돌계단에 미끄러질까 싶어 세르미네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지하에 도착했다.

“이건…?”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상당히 규모가 큰 지하의 공동이었다. 그곳은 위층보다 훨씬 넓었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도굴꾼이라도 다녀갔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깨끗했다. 이끼도, 부스러진 돌가루도 하나 없이, 그저 약간 눅눅하고 찬 공기가 감돌 뿐이었다.

‘뭐 상관없나. 아무튼, 덕분에 마족이 숨을 곳은 없군.’

마족이 없다면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세르미네는 마을을 찾기 위해 지체 없이 발을 돌리려 했다.

그때, 세르미네의 오른쪽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그는 깜짝 놀라 몸을 틀어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반짝임의 정체는 가까이 있었다. 입구의 바로 오른쪽에 그가 들고 있는 횃불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벽에 꽂힌 단검의 보석이었다.

‘이건 호박석인가?’

매끄럽게 다듬어진 주황색 보석이 단검의 손잡이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제법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단검은 녹이 슬어 그 가치를 잃은 지 오래였지만, 보석의 빛은 전혀 바래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혹시 뽑을 수 있나 싶어 단검을 잡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단단히 박힌 검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세르미네가 마음먹고 힘을 실으면 뽑히기야 하겠지만, 그 이전에 망가질 가능성이 더욱 컸다.

포기하고 단검에서 손을 뗀 그는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면서 혹시 주변에 특이한 점은 없나 싶어 살펴보았다.

“뭔가 쓰여 있군.”

그가 내려온 계단의 벽과 같은 문자가 벽에도 쓰여 있었다. 다행히 이곳의 문자는 파손되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천천히, 신중하게 문자를 해독했다.

[오늘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이상한 글이었다. 이런 유적의 문자는 대부분 왕족이나 신을 찬양하기 위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문장은 그저 일기의 한 부분 같았다.

세르미네는 혹시 다른 내용이 없나 싶어 벽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똑같이 검은 문자가 새겨진 것이 보였다.

[아이 하나가 죽었다. 먹을 것이 없다.]

그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갑자기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 울고 있는 소리처럼 변했다. 세르미네는 귀를 막았지만, 소리를 차단할 수는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아닌, 다수의 울음소리였다.

“젠장, 그만해! 멈춰!”

세르미네는 정신 계열 마족이 힘을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얼른 검을 뽑아 바닥에 꽂고 힘을 개방했다. 빛의 기운을 온몸에 두르니 소리도 잦아들었고, 세르미네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어디 있지? 마족을 퇴치해야만 해!”

세르미네는 마족이 씌여 있을 만한 물건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깨진 유물 하나 없는 곳에 그런 그럴싸한 물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저 단검인가?’

세르미네는 단검을 가까이서 본 탓에 정신 계열 마족에게 당했다고 믿었다. 그는 단검을 향해 공격을 날려보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볼 때 금세라도 부서질 것 같던 단검은 예상외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역시 이것이 수상해. 폴라로이아를 불러야겠군.’

그는 우선 폴라로이아에게 메시지를 보내놓았다. 아무리 타인의 협력을 구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도, 이 건은 달랐다. 괜히 저번처럼 연락을 하지 않았다가 화를 입고 싶지는 않았다.

폴라로이아에게서 즉답은 오지 않았다. 아마 다른 곳의 마족을 처리하고 있겠지, 세르미네는 그리 생각하고는 폴라로이아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다행히 환청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기에 그는 폴라로이아가 올 때까지 유적을 조금 더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검은 글씨도 무척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본 검은 글씨는 다름 아닌 피로 쓰인 글씨가 변색된 것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벽에 쓰인 글씨는 계속 이어졌다.

[밖으로 정찰을 나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제물을 바쳐 보았지만, 여전히 상황은 나쁘다.]

[신은 우리를 버렸나.]

점차 힘없는 글씨체로 바뀐 문자는 대부분 이런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세르미네는 찬찬히 읽어보면서 이 유적이 전쟁 중 대피소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했다.

‘그래. 그 시대엔 확실히 전쟁이 잦았지.’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서로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을 일삼던 시기였다. 패하면 영토와 재산을 빼앗기고 노예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심하면 인신공양의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전쟁의 패색이 보이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한들 문자의 내용을 담담히 읽을 수는 없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찬찬히 벽을 살폈다. 아직 폴라로이아는 오지 않았다.

[생존자는 이제 나 혼자인가.]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쯤, 이런 문장이 눈에 띄었다. 세르미네는 긴장하며 다음 문장을 찾아 걸었다. 그가 들어왔던 입구의 근처, 벽에 꽂힌 단검의 조금 떨어진 맞은편에 마지막 문장이 있었다.

검게 흐르다 굳은 핏자국과 함께 남아있는 마지막 문장은 짧고 간결했다. 그리고 그 문장을 본 세르미네는 너무 놀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숨을 집어삼키며 본 마지막 문장, 유난히 휘갈겨 쓴 글씨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치르티티샤 님. 당신이 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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