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갑작스러운 선포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루아는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그저 흐르는 상황에 몸을 맡긴다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잔잔한 목소리로 세르미네에게 되물었다.
“어째서인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루아는 모든 걸 알고 있지만, 굳이 세르미네의 입으로 그 까닭을 듣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딱히 그녀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가 봐도 네 사람의 동거는 언제 파국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루아의 시선을 받으며 세르미네는 잠시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으레 이런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을 꺼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루아에게는 그런 것이 오히려 불리했다.
“그냥… 서로 너무 안 맞기도 하고, 리슈아는 내가 따로 보호하면 되니까….”
말재간이 없는 세르미네로서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정말 그것이 전부입니까?”
루아는 다시 질문을 던지자, 세르미네의 말문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세르미네는 나름 객관적으로 상황을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루아를 설득하기엔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세르미네.”
그저 평온한 목소리로 루아가 세르미네를 불렀다. 그러나 마치 질책을 받는 느낌에 세르미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할 뻔했다.
“당신과 마이데의 결속이 부족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감추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그게….”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세르미네는 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사람이 어찌 만인과 마음이 잘 맞겠습니까.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루아는 기도실 한쪽의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이곳은 예배당이 아니었기에 기도를 위한 의자는 놓여있지 않았다. 하지만 간간이 오는 손님들을 위해 한쪽에 붉은 벨벳 쿠션이 놓인 하얀 의자가 두 개 있었다. 세르미네는 그중 쿠션이 없는 의자의 끄트머리에 불편하게 앉아 루아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감정에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단지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당신에게는 맞는 것이겠지요.”
루아는 잠시 눈을 감고 한 호흡 말을 쉬더니, 이내 다시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과 시기를 선택하는 것에서 한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세르미네, 마이데에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과 별개로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
세르미네는 루아를 설득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루아의 답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는 입술이 하얗게 변하도록 꽉 깨물었다. 그것이 세르미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박이었다.
그 모습을 본 루아도 더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향을 바꿔, 세르미네의 뜻을 조금이나마 들어주는 길을 택했다.
“그래도 납득하기 힘들다면, 잠시나마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허락하지요. 리슈아의 환생은 제가 잘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세르미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연에 대한 걱정도 어느 정도 해결했고, 만족스럽진 않아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알았다. 며칠간은 혼자 돌아다니며 마족을 처치하도록 하지.”
“무리하지 마십시오. 혼자 감당하기 힘든 마족이 나타나면 바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겠다.”
세르미네가 혼자 또 무리할 것을 알았는지 루아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누구와도 협력하지 않겠다고 다시 결심한 세르미네였다.
그런 속내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 루아는 아주 조금 무표정한 얼굴에 걱정의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말을 덧붙이지는 않고 세르미네를 배웅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다녀올게.”
세르미네 또한 루아의 걱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문 앞까지 깔린 붉은 융단을 따라 저벅저벅 걸었다. 발걸음이 조금 무겁긴 했지만,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이전과 같이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마치 리슈아가 죽고 난 뒤, 복수심에 불타 마족을 퇴치했던 시절과 같은 방법이었다. 온 세계를 순찰하고, 루아의 지시를 받거나 우연히 마족과 맞닥뜨리면 퇴치를 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긴 나선 계단을 내려와 탑 밖으로 나온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 이제 어디로 간담…?”
그러나 첫 행선지는 늘 고민이었다. 세르미네는 가급적 한국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가고 싶었다.
물론 가연은 걱정이었지만, 마이데와 최대한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아무리 아틀란티스의 시원한 바람에 머리를 식혀도 그 생각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예 지구 반대편으로 가 버릴까.’
그리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도망가는 것만 같아 조금 불쾌하기도 했지만, 머리를 식히는 데에는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었다.
‘어디 보자. 한국의 반대편이면 남아메리카던가.’
그곳은 치르티티샤의 고향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가 그 넓은 대륙의 어디 출신인지, 기사가 되기 전엔 무엇을 했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마이데와 치르티티샤, 리레시아, 그리고 폴라로이아까지. 대륙의 멸망 이후 기사가 된 네 사람은 리슈아와 세르미네가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데려온 인재들이었다.
마이데와 리레시아, 폴라로이아는 제각각 사연이 있어 갈 곳을 잃고 기사가 되었지만 치르티티샤는 달랐다. 그저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나 마족 퇴치를 돕다 기사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런 경우도 있던가?”
기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틀란티스의 기사들 중 일부는 인간 세계로 마족 퇴치를 나왔다가 바깥에 다시 정착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사랑을 하거나 누군가를 돕는 등 제각각의 사연을 가진 자들이 분명 존재했고, 황제인 우라노스는 그것을 너그럽게 봐주었다.
단, 조건은 아틀란티스의 일을 직접적으로 발설하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바깥세상에도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해 모호한 전설이나마 남게 되었다. 아틀란티스에 대해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고향을 그리는 이들은 노래를 하거나 시를 지어 그리움을 달랬다. 덕분에 대륙의 멸망 뒤에도 그 전설은 지금까지 쭉 이어져 내려왔다.
기사의 자격은 그들의 피를 가진 후예가 가지고 있었다. 선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어도, 수호룡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아틀란티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된 운명일까.
세르미네는 여전히 분노에 가득 차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동했다. 결국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행선지는 정해졌다.
“남아메리카라. 그러고 보니 그곳은 예전에 리슈아와도 간 적이 있지.”
긴 세월 순찰을 하게 되면 지구 곳곳 안 가본 곳이 없기 마련이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이 있었다. 리슈아와 세르미네가 함께 마족을 퇴치한 추억이 어린 장소, 세르미네는 그곳으로 좌표를 잡고 순간 이동을 했다.
*
“이, 이건…?”
도시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작은 마을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세르미네였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고, 눈앞의 풍경이 바뀌며 나타난 것은 숲과 나무, 커다란 잎이 빼곡하게 우거진 밀림이었다.
심지어 한 여름의 날씨에, 어두운 밤중이었다. 완전히 시기를 잘못 골랐다며 세르미네는 혀를 찼다.
“그래도…, 뭐, 상관없나.”
세르미네는 마음을 환기하려 일부러 말을 내뱉었다. 안 그랬다간 일이 풀리지 않아 생긴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어찌할까 고민했다. 하늘을 날며 마을을 찾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이 대륙의 밀림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날개 기술에는 제한 시간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걸어서 마을까지 가기로 했다. 어차피 별을 보며 방향을 잡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커다란 나뭇잎에 가려지긴 했지만, 하늘은 다행히도 맑았다.
세르미네는 북쪽으로 행선지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재킷을 벗어 허리에 묶은 그는 발을 잘못 디디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차마 대검을 뽑을 수는 없어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 얼굴만 한 나뭇잎을 세르미네는 손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언제 와도 정말 험난한 곳이군.”
강이 근처에 있는지 습기까지 차 후텁지근했다. 차가운 맥주와 푹신하고 뽀송뽀송한 이불이 간절했기에 세르미네는 더욱 힘을 내서 걸었다.
‘대도시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빨리 작은 마을이라도 나왔으면….’
그러던 차에 갑자기 유난히 큰 나뭇잎 두 개가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세르미네는 신경질을 내며 손으로 나뭇잎을 찢다시피 걷어냈다.
“방해된다!”
짜증 섞인 말을 내뱉은 그의 눈에 다음 순간 보인 것은 멀리서 빛나는 작은 불빛이었다. 붉은 빛 두 개가 약한 바람에 흔들렸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건 뭐지?’
전등 속 빛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모닥불을 피웠을 때 아른거리는 불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세르미네는 저 불이 횃불이라고 확신했다. 밀림 속의 마을은 문명의 영향을 받지 못한 곳도 꽤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아직도 횃불을 쓰는 곳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편한 숙소는 없어도 최소한 목을 축일 수는 있겠지, 세르미네는 기대를 품고 불빛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점차 불빛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생각은 기대에서 의문으로 변해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마을이 아니었다. 아니, 민가조차 아니었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것이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찌를 듯 삼각형으로 높이 솟은 건물 한 채. 돌을 네모반듯하게 깎아 만든 그 건물은 분명 고대의 유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