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마이데는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아직도 감정을 제대로 풀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런 마이데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치르티티샤가 어디 다녀왔냐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마이데가 많이 상심했나 봐요.”
닫히는 문소리를 들은 가연이 세르미네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코웃음만 쳤다. 가서 말이라도 잘해보라는 가연의 의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지. 일어났으면 뭐라도 먹는 게 좋겠다. 가져오마.”
세르미네는 가연을 두고 부엌으로 나왔다. 냄비를 휘젓던 치르티티샤가 찬장을 열어 안을 살피는 세르미네에게 물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그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붉은 빛깔의 요리를 한 번 흘긋 보더니 찬장에서 수프 하나를 꺼냈다.
“아니, 네가 만드는 요리는 가연이 먹기에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말이야. 수프라도 하나 데워줄까 싶다.”
그는 인스턴트 수프를 전자레인지에 넣고는 컵에 찬 물을 따라 잠시 식탁에 앉았다. 차가운 얼음물이 목을 타고 뜨거운 속을 식히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감정에 휘둘리는 건 어리석은 자들이나 범하는 실수다.’
머리로는 생각해도 마음은 그에 따라주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굳게 닫힌 마이데의 방문을 노려보았다.
또다시 욕지거리가 속에서 올라오려는 찰나,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세르미네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다 된 모양이군.”
전자레인지에서 나는 소리였다. 덕분에 정신이 든 세르미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데워진 수프를 그릇에 잘 담았다.
“그거, 내가 가져다줘도 될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세르미네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마이데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
세르미네는 뭔가 말을 할까 움직이려던 입을 멈췄다. 그냥 무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수프 그릇을 담은 쟁반을 손에 들고 마이데를 지나치려 했다.
“왜 그래, 이젠 가연이에게 가지도 말라 이건가?”
“너 때문에 위험에 처했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지. 그런데 무슨 면목으로 보겠다는 거지?”
결국 세르미네는 입 밖으로 빈정거리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마이데는 그런 세르미네의 앞을 막고 서서 보기 드물게 몹시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정신 계열 마족에게 당한 건 자랑이 아니지. 나 때문인 것도 사실이고 말이야. 근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너 또한 당한 적이 많잖아.”
“적어도 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너는 네 아내의 죽음에 대해 극복해낼 의지가 있기나 한 건가?”
세르미네는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마이데는 주먹으로 식탁을 쾅 내리쳤다.
“그놈의 의지, 의지! 그래, 너는 그렇게 잘나서 리슈아의 죽음을 이겨내기라도 한 거냐? 설령 네가 해냈다고 해도, 그걸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도 되는 자격이 생긴다고 여기는 건가?”
“나는 네 녀석과 다르다. 주변인에게도, 당사자에게도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지.”
“리슈아의 죽음이 네 탓인 걸 회피하면서 말인가? 주변에서 전부 어르고 달래주니 책임 의식도 사라지나 보지?"
“뭐라고?”
이번에는 마이데가 세르미네의 약점을 찔렀다. 세르미네는 몹시 화가 나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네가 뭘 안다고…!”
“그럼 너는 뭘 알지? 네가 나에 대해, 리슈아에 대해 아는 게 뭔데?”
이제 둘은 서로를 노려보다 못해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분위기였다. 자연스레 소란은 커졌고, 치르티티샤는 이미 나와서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치르티티샤 씨, 어떻게 좀 말려볼 수 없을까요.”
겨우 몸을 일으켜 문밖까지 나온 가연이 부엌에서 물러나 거실에 서 있던 치르티티샤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노란 앞치마를 두른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지켜보던 그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제는 한밤중에 옆집에서 찾아오기라도 할까 봐 말렸던 거예요. 난 남의 일에 괜히 끼어드는 취미는 없어요.”
“그럴 수가….”
가연은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이 치고받고 싸우지는 않을까 싶어 그는 치르티티샤에게 한 번 더 부탁했다.
“그래도 어떻게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아침이어도 소동이 커지면 이웃에게 폐가 될 것 같아요.”
가연은 치르티티샤가 신경 쓰는 점을 언급하며 말을 건넸다. 물론 그가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치르티티샤는 타인에게 불필요한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가연은 의도치 않게 그 점을 건드렸다.
“그러면 왜 당신이 나서지 않는 건지 의문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 이번에는 당신 말대로 하도록 하죠.”
선뜻 내키지는 않는 모습이었지만 치르티티샤는 둘을 말리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떼었다.
그러나 그가 채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에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너와는 더 이상 함께 못 가겠어!”
“네 녀석과 손잡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다!”
그리고 세르미네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빠른 속도로 걸어가 현관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세, 세르미네! 어디 가요!”
당황한 가연이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지만, 세르미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조만간 데리러 오마. 기다려라.”
말을 마친 세르미네는 씩씩거리며 문을 거칠게 닫았다.
어떻게 아파트를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화에 잠식당한 세르미네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겨울의 찬바람이 뺨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그제야 발을 멈춘 세르미네는 잿빛 하늘이 마치 자신의 마음 같아 쓰게 웃었다.
“어이가 없군.”
평소 자신이라면 그런 식으로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마이데와 다를 바 없는 한심한 짓을 하고 말았다고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회는 없었다. 조금 전의 상황에서 참고만 있었다면 오히려 계속 마음에 걸려 어떻게 화를 발산했을지 몰랐다.
세르미네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오로지 가연뿐이었다. 행여나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마이데가 수작을 부리진 않을지, 치르티티샤가 싫은 소리를 하거나 구박하진 않을지 걱정이었다.
‘역시 더는 안 되겠어.’
은근히 사람 속을 긁는 치르티티샤와 가연에게 해만 입히는 마이데, 두 사람과 동거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혹시라도 리슈아에게 허튼짓은 안 하겠지? 루아가 계속 주시할 테니 말이야.’
세르미네는 루아에게 상의를 한 후,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독단적으로 거처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그런 뒤, 가연을 데리러 오겠다고 마음먹었다. 만약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도, 루아나 폴라로이아는 가연을 계속 주시할 것이고, 그러면 마이데나 치르티티샤도 가연에게 섣부른 수는 쓰지 못할 터였다.
그는 한산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한 번 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하얀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이내 거둬진 빛 너머로 주변의 풍경이 바뀌고, 그가 아는 아틀란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틀란티스는 한국과는 다르게 구름이 조각조각 떠 있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위치에 존재하고 있기도 했지만, 이곳의 하늘은 인공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늘 날씨와 온도, 습도까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어 대륙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륙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지만, 대부분 멸망으로 인해 파괴되고 겨우 식물 정도만 다시 자생한 수준이었다. 기사들과 무녀의 생활공간은 왕성과 그 주변 정원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전생의 리슈아가 가꾸어놓은 왕성의 정원, 세르미네는 그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리슈아의 흔적이 담긴 그 정원을 둘러보겠지만, 오늘은 영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루아에게 얻어내야 하는 답이 있었다.
세르미네는 다듬어진 큰길의 끝에 서 있는, 하얗고 커다란 성이 아닌 그 옆에 삐죽 솟은 벽돌 탑으로 향했다. 그곳이 루아가 기거하는 무녀들의 탑이었다.
규모가 큰 성인만큼 탑이라고 해도 방이 수십 개 달린 하나의 대형 건물이었다. 아틀란티스가 번영할 당시에는 방이 꽉 찰 정도로 무녀들이 많았지만, 지금 이 탑에 있는 건 루아 하나뿐이었다.
세르미네는 중앙에 놓인 나선계단을 쭉 따라 올라갔다. 탑의 꼭대기에는 대기도실, 열 개의 별빛이라 이름 붙은 큰 방이 하나 있었다. 루아는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을 대기도실에서 보냈다. 때문에 세르미네는 루아가 그곳에 있을 거라 확신했다.
계단은 상당히 높았지만 세르미네의 체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만 발소리가 탑의 빈 공간에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 그의 신경에 거슬렸다. 아마 루아도 그가 왔음을 눈치챘겠다 싶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세르미네는 탑의 꼭대기에 있는 황금 조각이 새겨진 붉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역시 루아는 중앙의 석상 앞에서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르미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자주 옆에 있곤 하던 폴라로이아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며 세르미네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춘 후 단도직입적으로 루아게게 말을 꺼냈다.
“루아, 더 이상 동거를 할 수 없게 됐다. 다른 방안을 마련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