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렇지 않아도 필살기라 불릴 만한 강력한 공격에 세르미네의 분노와 의지까지 더해지니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새하얗게 불타는 빛의 용은 붉은 눈을 빛내며 포효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마족의 몸통을 뚫고 지나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마족은 비명조차 내지 않았다. 하지만 빛의 수호룡이 뚫고 간 마족의 몸에는 고통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었다. 몸은 검게 상흔 주위를 태우며 뻥 뚫렸고, 눈알에서는 검은 피가 마치 분수처럼 솟구쳤다. 마족은 숨을 거두며 천천히 옆으로 기울었다. 소리 하나 내지 않던 족의 몸은 90도로 기울어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쿵, 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마족이 쓰러지는 것을 숨을 몰아쉬며 지켜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마족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가연에게 달려갔다.
‘가연아, 가연아…!’
세르미네의 머릿속은 가연의 걱정으로 가득했다.
“가연아, 괜찮나? 정신 차려!”
세르미네가 다가간 곳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가연이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세르미네와 똑같이 안색이 창백해진 채 가연의 몸을 흔드는 마이데가 있었다.
“가연아, 일어나!”
가연은 한눈에 봐도 피를 잔뜩 흘리고 있어 몹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세르미네는 모두 마이데의 탓이라 느껴졌다. 그의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마음에 주먹이 부들거렸다. 하지만 모든 이성을 동원해 세르미네는 분노를 꾹 눌러 참았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온 마이데는 이미 자기 잘못을 아는지 세르미네를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접고 다급히 말했다.
“가서 루아를 불러올게. 가연이를 업고 집에 돌아가 줘.”
자신에게 명령하는 듯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이데는 가연의 안전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그 마음은 세르미네 또한 같았기에, 그는 군말하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알았다.”
“고마워.”
마이데는 감사 인사를 하자마자 순간 이동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세르미네는 작게 혀를 찼다. 복잡한 심경을 떠안은 채 그는 가연을 양손으로 안아 들었다. 작은 체구인 탓에 큰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아 그의 마음이 더욱 아팠다.
‘역시 모든 게 처음부터 잘못됐어. 이 녀석을 전투에 끌어들인 것도, 마이데와 협력한 것도 전부!’
세르미네의 마음에 눌러 참았던 원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리석게도 정신 공격에 걸리다니!
정신 계열 마족은 인간의 가장 약한 마음에 파고드는 법이었다. 세르미네 또한 약점이 있었고, 정신 계열 공격에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을 탓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혐오감, 그것을 남에게 투영해 씌우고는 손가락질하며 아닌 척, 자신은 그 부류와 다른 척 가면을 썼다.
실제로는 다를 게 하나 없는데도.
세르미네는 마이데의 약점을 알았다.
죽은 아내, 상실의 슬픔. 세르미네 또한 익히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저 마이데가 한심하기만 했다. 그래서 속으로 그를 욕하고, 손가락질했다.
그는 가연을 안은 채 순간 이동을 사용해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에는 인기척이 없고,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치르티티샤는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집에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면 세르미네의 실책을 여과 없이 꼬투리 잡힐 게 뻔했다.
우선 자신의 침대에 가연을 내려놓은 세르미네는 옆에 놓인 나무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세르미네 역시 온몸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눈엔 가연의 부상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연의 이마에는 크게 긁힌 상처가 나있었다. 그곳에서 피가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찢어진 소매의 베인 상처에서도 피가 나와 가연의 베이지색 후드를 붉게 물들였다. 세르미네는 손수건을 꺼내 상처의 피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렇게 말없이 가연을 돌보기를 십여 분,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마이데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뒤에서 천천히 한 소녀가 걸어들어왔다.
남색의 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수수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폴라로이아와 비슷한 연배의 소녀였다. 그와 똑같은 무표정에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검은 눈, 그리고 대조적으로 눈과 같이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손에 금으로 만든 지팡이를 잡은 소녀는 느린 걸음으로 마이데가 열어준 문을 통해 방 안에 들어왔다. 세르미네는 그녀를 보자마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아. 아틀란티스는 괜찮나?”
소녀는 다름 아닌 아틀란티스의 마지막 남은 무녀, 루아였다. 그녀는 세르미네를 조용히 올려다보며 작은 입술을 떼었다.
“폴라로이아와 제 수호룡에게 맡겨두고 왔으니 짧은 시간이라면 괜찮습니다. 리슈아는 어디 있지요?”
자리를 비켜달라는 그녀 특유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세르미네는 옆으로 세 걸음 몸을 물렸고, 루아는 침대에 누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가연에게 다가갔다.
“제법 큰 부상이군요. 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말을 마친 루아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끝에 달린 금으로 만든 원판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더니 판에 붙어 있던 아홉 개의 보석이 중앙의 구를 중심으로 십자 형태를 이뤄 정렬했다. 그리고 중앙의 구가 반으로 열리고, 그 안에서 남색의 돌이 번쩍이며 빛을 발했다.
세르미네도 익히 그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랜드 크로스. 극히 일어나기 힘든 기적을 일으켜 요동치는 상황을 무에 가까운 안정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었다.
이 힘은 또한 가장 강한 치유의 힘이기도 했다. 아틀란티스의 동력을 이용해 끌어오는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대륙의 무녀들뿐이었다.
넘실대는 깊은 바닷물과 같은 색을 가진 빛이 지팡이에서 나와 가연의 몸을 덮었다. 흐르는 피가 멎고, 큰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갔다. 이윽고 군데군데 찰과상과 긁힌 자국만 조금 남고 가연의 부상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가연의 창백했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왔고, 표정 또한 편안하게 변했다.
허나 워낙 충격이 큰 데다 체력 손실이 심해 가연은 당장 눈을 뜨지 않았다. 깊이 잠든 가연을 잠시 바라보던 루아는 힘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됐습니다. 이 정도면 조만간 눈을 뜨겠지요.”
그러자 세르미네는 마음을 놓았다. 루아는 섣부른 허세를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힘은 확실했다.
세르미네는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루아에게 내어 주었다. 그녀는 느린 몸짓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세르미네, 그리고 마이데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루아의 검은 눈은 마치 블랙홀 같았다. 그 안에 빨려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곳, 무엇을 담고 있는지 모르는 미지의 장소와도 닮아 있었다.
세르미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아는 그의 마음을 전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전투 중 가진 마이데에 대한 분노, 그리고 며칠 동안 끓어오른 질투. 인정하기 싫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외면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긴 말은 않겠습니다. 아틀란티스를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지요.”
루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녀의 말이 신경 쓰였다.
역시 루아는 알고 있었다. ‘긴 말은 않겠다.’ 그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가연이는 내가 돌볼 테니, 너도 가서 쉬어.”
마이데가 모처럼 마음을 풀고 세르미네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그 나름대로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런 그를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가연의 옆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것인가.
리슈아를 기만하고 있는 주제에.
그는 거칠게 마이데의 어깨를 잡아 뒤로 물렸다. 마이데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별말 없이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이 모든 소란에도 가연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까보다는 조금 혈색이 도는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가연을 보며 세르미네는 또 한 번 마음이 무거워졌다.
*
저녁 무렵이 되자 치르티티샤가 돌아왔다. 말없이 외출했던 그는 역시 어디에 다녀왔는지는 밝히지 않고, 익숙하게 밀린 집안일을 처리했다.
그는 가연의 부상을 보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나름대로 걱정 어린 말을 세르미네에게 던지기는 했다.
“저런, 큰일이었네요. 고생했어요.”
식사를 하겠냐는 물음에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가연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밥이 목을 넘어갈 리가 없었다.
세르미네는 계속 자리를 떠나지 않고 가연을 지켜보았다. 치르티티샤가 가져다준 물그릇에 수건을 적셔 연신 가연의 이마를 식히는 것이 그가 행동하는 전부였다. 심지어 방의 불조차 밝힐 생각을 하지 않아 치르티티샤가 책상에 놓인 고양이 모양 전등을 켜고 가야 했다.
‘이 바보가 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려 한 거지….’
그는 아마 소리가 안 들리는 마족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인형에 달려있던 방울을 마족의 다리에 매려 했던 게 틀림없었다. 제가 아끼는 인형을 뜯어 방울을 떼어낼 정도로 세르미네를 생각해주는 건 고마웠다. 하지만 세르미네의 마음속에선 스스로의 무능함이 자꾸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좀 더 믿음직한 자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남을 탓한 다음엔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이 그를 괴롭혔다. 세르미네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스스로를 탓하고, 남을 미워했다. 그 중심에는 마이데가 있었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나고, 세르미네는 잠시 물이라도 마실 겸 방을 나왔다. 등이 꺼진 어두운 부엌에 검고 긴 그림자가 보였다. 익숙한 모양을 그리고 있는 뒷모습, 다름 아닌 식탁에 홀로 앉은 마이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