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지금 네게 활약할 기회를 주는 거잖아. 어디 한번 멋지게 나서봐.”
마이데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어딘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런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기사로서의 의무도 내다 버릴 자가 절대 아니었다. 이것은 세르미네가 마이데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세르미네는 마이데를 기사로서는 존중하고, 신뢰했다.
하지만 여유 부릴 틈은 없었다. 가연이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세르미네의 뒤를 가리켰다.
“세르미네! 뒤에 있어요!”
세르미네가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땅에 내려온 마족이 탄환을 쏘아 보내려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가연이 제법 빠르게 알려준 덕분에 세르미네는 선제공격을 날릴 수 있었다.
“이놈이 어딜!”
세르미네는 검기를 날렸다. 하지만 명중하기도 전에 마족은 재빠르게, 그리고 소리도 없이 움직여 검기를 피해 모습을 감췄다. 그나마 탄환 공격을 저지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마이데는 여전히 웃으며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쯤 되니 그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은 옅어지고, 세르미네는 부아가 치밀었다.
차라리 마족을 눈으로 쫓으며 위치를 알려주는 가연이 더 의지가 될 지경이었다.
‘역시 다른 녀석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세르미네는 마이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이 마족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혼자 처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눈을 감고 마족의 기척을 느껴보려 했다. 움직임도 꽤 빠른데다가 소리까지 나지 않으니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족이 가진 고유의 기운은 대개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뿜어져 나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마족은 이상할 정도로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눈을 감으니 오히려 역효과였다. 기척을 느낄 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청각이었다. 때문에 눈을 감고 소리를 들으려 하는 것이지만, 이 마족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시야까지 막히니 오히려 더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수의 아군으로 마족을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개체는 하나뿐이니 많은 숫자의 눈으로 시야를 넓히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게 최선이라는 걸 세르미네도 알았다.
하지만 마이데는 협력할 의사가 없어 보였고, 세르미네 또한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리슈아를 내 손으로 지켜야 해!’
그는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지금까지의 자신이 너무나 물렀었다.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세르미네는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마이데, 세르미네를 도와주면 안 돼요?”
뒤에서 가연이 마이데에게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르미네는 그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일부러 적에게 더욱 신경을 집중했다.
자신의 왼쪽에 있는 붉은 지붕의 집 위에 마족의 발끝이 보였다. 세르미네는 반쯤 무너진 벽돌 담을 한번 딛고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저기 있군!”
작은 옥탑방 뒤로 깔딱거리며 모습을 감추려는 마족에게 세르미네는 빛의 단검을 만들어 날렸다. 온전히 명중하지는 못했지만, 세 번 꺾인 긴 왼쪽 발을 검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상처 자리에서 검은 피가 조금씩 배어 나왔고, 마족은 놀랐는지 지붕에서 풀쩍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마이데, 저는 괜찮으니까 세르미네를 도와줘요.”
가연이 한 번 더 마이데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마이데는 씨익 웃으며 그제야 도끼를 뽑아 들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야.”
세르미네는 잠시 움직임을 멈춘 마족에게 달려들려 발을 떼었다. 목표는 상처를 입힌 다리였다. 그러나 그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뛰어오르더니 이내 마족을 향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받아라!”
마이데의 목소리와 함께 그가 도끼를 휘둘렀다. 워낙 움직임이 큰 동작이라 마족은 여과 없이 적의 행동을 파악하고 다시 모습을 감췄다. 모처럼 얻은 기회를 놓친 세르미네는 어이가 없었다.
“마이데, 너 지금 뭐 하는 건가?”
세르미네는 화가 나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러나 마이데는 태연하게 몸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쩌겠어. 마족이 너무 빠르네. 그보다 세르미네, 네가 우리의 리더라도 돼?”
“뭐?”
“나는 너를 배려해서 싸울 의무가 없어. 네 명령을 들을 의무는 더더욱 없지.”
세르미네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마이데의 멱살을 잡고 싶어 부들거리는 손을 겨우 억눌렀다. 가연이 보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마이데에게서 등을 돌렸다. 일단 마족을 처리하고 난 뒤 마이데와 결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족을 다시 바라본 세르미네는 놀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리슈아! 돌아와!”
리슈아의 모습으로 변한 가연이 마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품에 꼭 안고 있던 토끼 인형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세르미네! 좋은 생각이 있어요! 저한테 맡겨주세요!”
그렇게 외친 가연은 마족의 뒤로 돌아가 가까이 붙으려 틈을 노렸다. 마족은 세르미네와 마이데를 바라보느라 가연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마이데! 리슈아를 어서 보호….”
“세타!”
세르미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마이데는 가연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세르미네는 의아함을 넘어 지금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라고?’
마이데가 부른 이름, 그가 보인 이상 행동, 거기에 더해 가연의 의중까지…. 세르미네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틈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연의 안전이었다.
세르미네 역시 마이데의 뒤를 따라 가연을 보호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이대로 마족이 가연을 알아채지 못하길 마음속으로 바라며 검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딸랑-
가연의 손에서 방울 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워낙 주변이 조용하다 보니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세르미네는 가연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리슈아, 괜찮아! 돌아와!”
제발, 제발 마족이 눈치채지 못했길 바라며 세르미네는 가연을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마족의 붉은 눈이 빙그르르 돌더니 이내 가연을 향해 돌아갔다.
뒤이어 마족의 머리 위로 예의 붉은 탄환이 생겨났다. 그것은 가연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연은 그 사실을 아직 몰랐다.
“안 돼!”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동시에 외쳤다. 그제야 가연은 고개를 들어 마족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탄환이 가연을 향해 쏟아졌다. 방어막을 펼치기엔 너무 늦은 순간이었다.
“아악!”
가연의 비명이 적막을 찢었다. 마이데는 가연에게 쏟아지는 탄환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지만, 세르미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가연에게 다가가 그를 세게 밀어냈다. 자신에게도 탄환의 피해가 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살갗이 쓰려왔다. 머리에도 부상을 입었는지 눈두덩을 타고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오로지 가연의 상태만이 신경 쓰였다.
“리슈아, 리슈아! 젠장, 가연아!”
탄환이 폭발하며 튀는 불꽃 너머로 쓰러진 가연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마이데가 얼른 다가갔다.
“세타! 거짓말이지? 일어나, 일어나!”
그제야 세르미네는 상황이 얼추 정리되었다. 아마 이 마족은 정신을 교란하는 기술도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자신과 가연은 무사하고 마이데만이 그 기술에 걸려들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정신 계열 공격은 폴라로이아의 담당이었다. 당연히 그를 불러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를 여유도 없거니와, 세르미네는 폴라로이아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혼자 정리해야만 한다는 근거 없는 사명감이 활활 불탔다.
‘저런 한심한 녀석 따위, 리슈아에게 잘 보일 여지를 주면 안 돼!’
그의 마음에는 마족과 마이데에 대한 분노, 그리고 가연을 향한 다급함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세르미네는 탄환의 나머지 폭발을 막기 위해 검에 검기를 두르더니 마족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 보냈다.
“빛의 수호룡이여! 공격을 막고, 적을 섬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