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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34화 (34/87)

34화

다음 날부터 세르미네는 의도적으로 마이데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물론 인사 정도는 나누었지만, 필요 이상의 대화나 마주침은 일절 없었다.

“세르미네. 리레시아가 연말에 한 번 아틀란티스로 다 같이 오라는데, 어때?”

마이데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세르미네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방금 마이데가 한 말 그대로 폴라로이아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차라리 마이데와 치르티티샤가 손잡고 같이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가연과 단둘이서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싶었던 세르미네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폴라로이아에게 할 수는 없으니 그는 짤막하게 ‘고려해 보겠다.’고 써 보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세르미네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유치하다는 것쯤은 세르미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 작게라도 좋으니 숨을 트고 싶었다. 어쩌면 은연중에 가연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리슈아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그는 내 것이야.’

깨닫지 못하는 사이 소유욕과 집착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세르미네는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은 이상한 형태로 튀어나왔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겠다고 마음먹고 방을 나섰지만, 세르미네의 발은 부엌으로 향하는 대신 가연의 방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세르미네? 여기서 뭐 해요?”

때마침 방에서 나온 가연이 물었다. 세르미네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말만을 내뱉었다.

“아니, 그냥 말이다.”

“그래요? 전 지금부터 잠시 마이데와 외출할 건데, 세르미네도 같이 갈래요?”

가연은 무심코 말했지만, 세르미네는 가연의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어디를 가는데 그러나?”

“아뇨. 별 건 아니고, 제 인형이 망가졌는데 마이데가 좋은 수선 가게를 안다고 해서요.”

인형이라면 필시 가연이 늘 안고 자는 토끼 인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세르미네는 왜 그걸 좀 더 빨리 살피지 못했나, 하고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를 후회할 때가 아니었다. 가연은 세르미네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좋다. 같이 가도록 하지.”

가연이 행여나 말을 번복할까 싶어 세르미네는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이 순간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르미네도 가는 거야?”

다름 아닌 마이데였다. 마이데는 세르미네보다 큰 키를 이용해 그의 뒤에서 가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세르미네는 마이데가 몹시 못마땅해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서 희열이 느껴졌다.

“리슈아가 함께 가자고 하지 않나.”

세르미네는 의기양양한 마음이 묻어나려는 것을 애써 숨기며 마이데에게 툭 내뱉었다.

“뭐, 상관없지.”

마이데는 짧게 한마디만 하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가연 역시 인형을 챙기러 가겠다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세르미네는 마음속으로 마이데의 존재를 지우고는 가연과의 데이트를 상상하며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

마이데가 알고 있다는 수선 가게는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마이데와 세르미네는 서로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가연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떨어져 앉은 그들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피했다.

그저 가연만이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신이 나 떠들 뿐이었다.

평일 낮인 탓에 승객이 없는 버스 안에서 여유를 부린 그들은 삼십 분 뒤 마이데의 신호에 맞춰 내렸다.

“와, 여기는 처음 와 봐요. 신기하다.”

약간 오래된 느낌이 있는 동네에 발을 디딘 가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낡은 건물들이 즐비한 동네이긴 했지만, 이런 곳일수록 유서 깊은 가게들이 보물처럼 숨어있기 마련이었다.

“이쪽으로 와. 조금 복잡한 길이긴 한데, 내가 안내할게.”

이때다 싶어 마이데가 앞으로 나섰다. 가연은 토끼 인형을 안고 그 뒤를 종종 따랐고, 세르미네는 인상을 찌푸리며 가장 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가연을 살피며 따라갔다.

‘이상한데….’

가연의 삐죽 뻗친 보라색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세르미네는 문득 생각했다. 어딘가 이 동네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몇 발자국 더 가자, 세르미네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동네가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아무리 번화가가 아니라지만, 사람이 사는 주택가인 이상 이렇게 걸으면 오가는 사람을 마주치거나 자동차 소리가 들리기 마련이었다.

“이봐.”

세르미네가 앞서가던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쫑긋거리며 움직이고 있던 가연의 더듬이 같은 머리카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일이에요?”

가연은 의아했지만, 마이데는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너도 느꼈지?”

세르미네는 그 모습이 매우 얄미웠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족이야. 그것도 꽤 강한 놈. 중급 정도는 되겠군.”

마이데의 말에 세르미네는 대답 대신 검을 불러내 뽑아 들었다. 그 행동이 마치 신호라도 된 것처럼 동시에 그들 옆의 벽돌담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요란한 소리가 나야 하는 법인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벽돌이 와르르 무너지며 먼지가 크게 일었고,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연을 뒤로 보내고 무너지는 벽돌을 막아냈다.

“저기, 저기 보세요! 마족이에요!”

가연이 다급히 외치며 무너진 담이 감싸고 있던 삼층 주택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 보인 것은 주택의 지붕 위를 기어가는 은회색의 마족이었다.

손가락처럼 긴 다리 두 개를 바쁘게 움직이는 마족의 둥근 몸통에는 눈 하나가 달려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단면의 관절이 끊임없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마족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마 가연이 우연찮게 발견하지 않았으면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마족의 머리 위에 검은 기운이 서리더니 붉은 탄환이 가득 쏟아졌다. 아마 담벼락을 무너뜨린 것과 같은 공격인지, 탄환은 사방으로 튀며 주변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마이데는 얼른 물의 방어막을 넓게 쳤다. 가연과 세르미네는 그 안에서 또 한 번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저기 무너지고, 탄환이 날아다니는데도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세르미네와 마이데, 그리고 가연이 내는 소리만 귓가에 들려왔다.

“결계인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풍경에서 소리만 인위적으로 지워졌다면 결계임이 틀림없었다. 아마 본래의 공간에 똑같은 풍경을 가진 이공간이 덧씌워졌을 것이라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우연찮게 결계 속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과연 우연일까?”

세르미네의 말에 마이데가 토를 달았다. 어쩌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었다. 아틀란티스의 기사가 셋이나 타고 있었으니, 필연일 거란 생각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마이데의 말이 성가시기만 했다.

그는 긴말하지 않고 마족에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말려들 사람도 없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르미네의 검은 마족에게 채 닿지 못했다. 가만히 서서 그들을 지켜보기에 방어력 위주의 마족인가 싶어 온 힘을 다해 내리쳤지만, 검은 목표를 잃고 땅에 꽂혀버렸다. 마족은 검이 머리 위로 다가온 순간 잽싸게 움직였다.

“이런!”

세르미네는 간신히 검을 다시 뽑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마족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마족은 검을 피해 빠르게 움직였음에도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세르미네! 위예요! 위에 있어요!”

가연이 다급하게 말하자, 세르미네는 고개를 젖혀 위를 바라보았다. 마족이 쏜 탄환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스스로 방어막을 펴기엔 시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몸을 굴려 탄환을 피했다. 다행히 폭발하는 탄환에 휩쓸리진 않았지만, 거친 시멘트 바닥을 구르느라 여기저기 찰과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탄환 세례가 멈추자 자세를 바로 하고 일어섰다. 여전히 마족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마이데가 가연의 주변에만 방어막을 두르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너는 왜 가만히 서 있는 거지?”

세르미네가 거칠게 노성을 토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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