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세르미네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내가 바로 들은 것이… 맞지?’
그가 머뭇거리자 가연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앗, 곤란하시면….”
“아니다. 뭐, 잠자리 정도 같이하는 거야 옛날에도 자주 그랬으니….”
행여나 가연이 이대로 돌아가 버릴까 싶어 세르미네는 황급히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저, 저 진짜 잠만 잘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가연이 말을 쥐어짜 내며 세르미네의 침대로 올라왔다. 세르미네는 그런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작게 흘리며 대꾸했다.
“누가 뭐라고 했나?”
그는 행여나 가연이 무서울까 봐 늘 끄고 자는 테이블의 작은 전등을 끄지 않았다. 가연이 선물해 준 고양이 모양의 작고 노란 전등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지도 못한 채 말이 없었다. 가연은 가져온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눈만 빼꼼 내놓은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같이 천장을 보는 척하며 가연을 계속 곁눈질했다.
“저기, 세르미네 씨.”
“왜 그러나.”
“그, 저….”
가연은 좀처럼 제 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세르미네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가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큰 결심을 한 건지, 가연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세르미네, 라고 불러도 돼요?”
세르미네는 적잖이 놀랐다. 머리부터 가슴을 지나 발끝까지 꽉 조여 오는 아련한 느낌이 들어 그는 이불을 세게 쥐었다.
리슈아의 얼굴로, 리슈아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를 듣는 날이 또다시 오다니.
그동안 가연은 세르미네를 ‘세르미네 씨’라고 부르며 거리를 두었다. 그 점이 못내 아쉬웠던 세르미네였다. 하지만 재촉할 수 없어 기다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두 달이 흘렀다.
“앗, 곤란하면 그냥 세르미네 씨라고 부를게요.”
그가 대답하지 않자 가연이 미안하다며 말을 이었다. 세르미네는 물기를 약간 머금은 금색 눈동자를 돌려 가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제야 대답했다.
“아니다. 그렇게 불러도 된다.”
기왕이면 존댓말도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세르미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고마워요. 그럼, 세… 세르미네.”
가연은 작게 세르미네를 불러놓고는 제가 부끄러워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세르미네에게는 그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가연에게만큼은 더욱 자신의 붉어진 눈가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군.’
그간의 고생을 전부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산타의 존재를 믿으며 세르미네는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아침, 연말 분위기로 한껏 어수선한 가운데 갑자기 마이데가 말을 꺼냈다.
“가연아. 시간 있어?”
식사 시간이었다. 양송이 크림 수프를 한 숟가락 뜨던 가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이데를 바라보았다.
“시간이야 있죠. 무슨 일이세요?”
그러자 마이데는 익살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청재킷의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두 장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네가 가고 싶다던 놀이공원의 자유이용권 티켓을 구했어. 연말이라 구하는 거 굉장히 힘들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세르미네는 마이데가 무얼 하든 관심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애꿎은 빵만 뜯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들어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왜 리슈아와 가는 건가? 리레시아를 부르면 그도 좋아하지 않겠나?”
“에이, 가연이가 가고 싶다고 한 건데. 게다가 내가 누구랑 가든 생관 없잖아, 안 그래?”
세르미네는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는 가연의 대답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가연은 신이 나서 들고 있던 식기도 내려놓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좋아요. 오늘 당장 가는 거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세르미네의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다급히 가연을 말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냈다.
“오늘은 훈련을 조금 바꿔보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가연의 마음은 이미 놀이공원으로 가 있었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세르미네를 바라보며 애원했다.
“그건 내일 하면 안 될까요. 저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인데.”
그러더니 세르미네를 위한답시고 가연은 마이데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마이데 씨, 혹시 표를 하나 더 살 수 있을까요? 세르미네도 가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러자 마이데의 안경 너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름을 그냥 부르는 사이가 된 거야? 이야, 부럽네. 흠흠, 아무튼 지금은 연말이라 당일표는 구할 수 없어. 이것도 아슬아슬하게 겨우 구한 거니까 말이야.”
마치 유감이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세르미네는 마이데가 전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저 티켓을 구한 것 또한 의도한 일일 터였다.
하지만 가연이 가겠다고 나서는 걸 말릴 구실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그를 마이데와 단둘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식사 후 신이 나서 한껏 차려입고 가연과 나가는 마이데의 뒷모습을 세르미네는 이를 갈며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요? 이리 와서 빨래 좀 널어요.”
치르티티샤가 세 번을 불러서야 겨우 현관에서 눈을 뗀 세르미네였다. 그는 성큼성큼 빨래 건조대로 다가가더니 빨래를 집어 들고는 신경질적으로 탁탁 털었다.
“그렇게 분해요? 그래도 가연 씨가 가고 싶어 하던 놀이공원이잖아요. 진작 표 좀 구해다 주지 그랬어요.”
으득, 하고 세르미네는 이를 다시 한번 갈았다. 누구보다 리슈아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으면서, 거기까지 행동하지 못한 자신에게 속이 탔다. 물론 마이데에게 분노 또한 느끼고 있었다.
“당신도 참 큰일이네요. 마이데는 일부러 저러지, 가연 씨는 눈치가 없지….”
세르미네가 탁탁 털던 옷의 단이 투둑, 뜯겨나갔다. 너무 강하게 잡아당긴 탓이었다.
치르티티샤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서둘러 빨래를 던지듯 널어놓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쾅, 소리가 나게 일부러 문을 닫은 그는 저녁 시간까지 방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치르티티샤의 말은 틀리지 않다. 내가 뭘 그리 못했기에 리슈아는 저 녀석에게 붙는 것인지….’
*
날이 어두워질 시간이 되자 가연과 마이데가 돌아왔다. 꽃 머리띠를 꽂고 양손에 풍선과 인형을 가득 든 가연은 몹시 신나 보였다.
“마이데, 오늘은 고마웠어요.”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세르미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하마터면 커피를 뱉어낼 뻔했다.
‘마이데… 라고?’
자신은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쳤는데, 마이데는 이렇게 쉽게 얻어걸린단 말인가. 세르미네는 문득 아침에 눈을 빛내던 그를 떠올렸다.
“가연이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다 해줘야지. 다음에 또 말만 해.”
핫핫, 하고 웃던 마이데와 세르미네의 눈이 마주쳤다. 마이데는 가연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세르미네를 향해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완전한 승자의 미소였다.
‘저 녀석이….’
세르미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잔을 든 손이 떨려왔지만 이대로 방에 휙 들어가 버리면 그의 패배였다. 세르미네는 꾹 눌러 참았다.
저녁 식사 내내 가연은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마이데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이 세르미네의 속을 알 리가 없었다. 세르미네에게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이다 못해 지옥 불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마이데, 저 녀석만 없었더라면…!’
평소라면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마족이 아닌 이상 저주를 퍼붓지는 않는 세르미네였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니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치르티티샤는 이 모든 상황을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저 은은하게 웃으며 그들을 지켜보는 모습이 세르미네는 못마땅했다.
‘그래. 결국 저 녀석도 내 편이 아니지. 오로지 리슈아만이 나의 편, 나의 사람이야.’
생각이 기우니 점점 리슈아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만 갔다. 어떻게 해서든 가연을, 리슈아를 마이데에게서 떼어놓아야 했다.
그리고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야 해. 둘이서 함께 살아가는 거야.
어디선가 그리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언젠가 들어본,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 소리가 마음에서 나온 소리라고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