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세르미네의 온 힘을 담은 일격이 마족을 향해 날아갔다. 하얀 수호룡은 마족의 방어막도 단번에 뚫고 목표에 직격했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방어막이 산산조각이 나고, 뒤이어 풍선이 팡, 하고 터졌다. 이리저리 찢긴 풍선 조각이 떨어지자 마족의 검은 기운도 스륵, 사라졌다. 그러자 붉은 눈을 빛내며 살아 움직이던 산타 풍선이 바람 빠지듯 수축하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해치웠나.”
세르미네는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등 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빙의한 마족이 사라지자 마네킹과 갖가지 물건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근처에 마족 반응 없음.”
요란한 소리 속에서 또렷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르미네가 뒤를 돌아보니 폴라로이아가 예의 태블릿 PC를 들여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리레시아가 연락했나?”
세르미네가 물었다. 하지만 폴라로이아는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아니면 리레시아였기에, 세르미네도 대답은 특별히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이 꽤 복잡했기에 폴라로이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사람들의 기억을 빠르게 소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르미네 씨!”
“세르미네 님!”
그때, 위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세르미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빠른 발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가연과 리레시아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왔다.
“세르미네 님! 마족의 핵을 해치우셨군요!”
감동이라도 받은 것처럼 리레시아가 눈을 빛냈다. 그러자 그보다는 침착한 가연이 상황을 설명했다.
“움직이던 물건들이 갑자기 뚝 멈췄어요. 몇몇 분이 상황을 맡아주신다고 하기에 달려왔는데, 전부 끝난 건가요?”
“그래. 다 해치웠다. 폴라로이아도 왔으니 이제 일을 마무리해야지.”
“기억 소거 작동 준비 완료. 명령 대기 중.”
폴라로이아가 작은 입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버튼은 누르지 않은 채 어쩐지 녹색 눈동자로 가연을 올려다보았다.
“어, 저, 저요?”
“명령 대기 중.”
폴라로이아는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자 세르미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가연에게 폴라로이아의 의도를 설명했다.
“인간들의 기억을 지워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거야. 네가 인간들과 친밀하게 협력했으니 말이야.”
“저는….”
가연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 인간들을 신경 쓰는 거야? 그렇게 약해빠진 마음으로 어떻게 기사를 해? 세르미네 님이 걱정하시잖아!”
리레시아가 발을 구르며 성을 냈다. 세르미네는 눈을 찌푸리며 리레시아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보는 눈이 없는 지금, 그에게 표현을 자제할 이유는 없었다.
“리레시아. 리슈아에게 도가 넘는 말을 하지 마라.”
그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리레시아도 꼬리를 내렸다.
“알겠어요. 하지만 제 말이 틀린 것은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리레시아의 말 자체는 세르미네도 찬성하는 바였다. 때문에 그는 조금 더 완곡하게 가연을 달랬다.
“전생에도 그랬지. 인간들과 몹시 친하게 지냈어. 나는 늘 그걸 걱정했다. 친하게 지내면 지낼수록 상처받는 건 너뿐이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가연은 좀체 대답하지 못했다. 세르미네는 전생과 똑같은 그의 반응에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말을 더 잇지 않았다. 대신 폴라로이아를 향해 말을 건넸다.
“내가 리슈아를 책임질 테니, 기억 소거를 실행해줘.”
“명령 입수 완료. 기억 소거 실행.”
폴라로이아는 세르미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PC의 버튼을 눌렀다. 주변에는 별다른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가 실행한 것이니 효과는 확실했다.
“실행 완료. 아틀란티스로 귀환.”
말을 마친 폴라로이아는 순간이동으로 모습을 감췄다. 세르미네는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가연의 손을 잡았다.
“가자.”
“어디를요?”
가연이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세르미네는 입꼬리를 조금 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기억을 지웠고, 곧 아틀란티스의 정령이 와서 복구를 시작하겠지. 하지만 오늘 쇼핑몰을 운영하긴 힘들 거다. 거리로 나가서 맛있는 것을 사주지.”
“앗, 세르미네 님! 저도! 저도요!”
리레시아가 세르미네의 왼팔에 매달리려 하자, 세르미네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가서 루아에게 보고를 해줘. 어쩐 일인지 치르티티샤나 마이데가 오지를 않는군. 믿을 건 너밖에 없다.”
은근히 리레시아를 추켜세우자 그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저에게 맡겨주세요! 제가 세르미네 님의 ‘유일한’ 지원군이 되어드릴게요!”
세르미네가 채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리레시아 역시 모습을 감췄다. 세르미네는 혹시 가연이 불쾌해하지 않을까 눈치를 살폈지만, 딱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눈치 없는 것이 이럴 땐 감사할 일이군.’
*
가연이 이제 능숙하게 전투를 해내자 세르미네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는 마족이 나타나도 당황하거나 살려달라고 외치기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변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가연은 마족과의 전투 이래로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밥을 먹으면서도, 트리에 장식을 달면서도, 심지어 훈련 도중에도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무릎이 까지는 일도 있었다. 세르미네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우선 둘만의 자리가 생길 때까지 물어보는 것을 미뤘다.
쇼핑몰에서의 데이트가 마족 때문에 흐지부지 끝나자, 세르미네는 크리스마스 당일 가연과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았다.
크리스마스 시즌 내내 화려하고 인파로 북적이는 쇼핑몰이었지만, 오히려 당일은 비교적 한산했다. 가게의 점원들도 조금은 여유로운 표정이었고, 음식점은 절반 이상의 테이블이 비어있었다. 여전한 것은 화려한 장식과 중앙 계단의 산타 풍선뿐이었다.
리레시아 때문에 편히 케이크를 즐기지 못한 가연을 세르미네는 쭉 신경 쓰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이 꽉 들어차지 않은 이전의 그 카페로 세르미네는 가연을 안내했다.
“오늘도 부쉬 드 노엘을 먹을 건가?”
세르미네의 물음에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은 딸기타르트와 레모네이드로 할래요.”
“그럼 나도 같은 걸로 하지.”
단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세르미네였지만, 오늘은 가연에게 맞춰주고 싶었다. 그는 타르트 두 개와 음료 두 잔을 가지고 가장 안쪽의 편안한 자리를 향했다.
가연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서 포크로 딸기를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턱을 괴고서 애꿎은 딸기만 건드리는 모습이었다. 세르미네는 ‘또 생각에 잠겼구나.’ 하고 짐작하고는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기, 리슈아.”
“네?”
그래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는 재깍 반응하는 가연이었다. 세르미네는 어떻게 말을 떼만 좋을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요즘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나?”
인사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고 나서 세르미네는 덜컥 겁이 났다.
‘정말로 몸이 안 좋은 것이면 어떡하지.’
옛날부터 리슈아는 제가 아프거나 힘든 일은 입 밖에 잘 내지 않았다. 덕분에 세르미네는 리슈아의 작은 움직임, 말투까지 전부 파악하는 눈썰미를 지니게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덕분에 가연의 상태를 마이데보다 빠르게 눈치챈 점은 그에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뇨. 어디 아프진 않아요.”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세르미네는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았지만, 그럼 대체 무슨 일인지 이내 다시 걱정이 앞섰다.
“그럼 왜 그러나? 어제도 훈련을 하다 너답지 않게 다치지 않았는가.”
세르미네의 시선이 테이블 너머 가연의 무릎 쪽으로 향했다. 바지 속에 가려져 있는 그의 무릎에는 커다란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
가연은 계속 딸기를 포크로 건드리고 찌르다 이내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았다. 그리고 세르미네를 올려다보는 하늘색 눈에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저, 저기 세르미네 씨….”
“그래. 뭐든 말해 봐라.”
가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심을 한 듯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세르미네를 향해 대본을 읊듯 말을 꺼냈다.
“저희는 꼭 마족과 싸워야만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