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가연은 마족 하나를 해치운 뒤 눈꺼풀 위로 흐르는 땀을 씻어냈다. 이 추운 날씨에도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러나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족 하나가 사람들을 공격하려 했다. 이제는 마족들도 가연이 사람들을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들은 교묘하게 사람들을 공격하는 척하며 가연을 유도했고, 그가 쓰러지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이봐! 여기 봐!”
그때, 한쪽 구석에 모여 이 상황을 초조하게 보던 군중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람들 중 일부 용기 있는 자들이 나서 마족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저런 어린아이도 싸우는데, 우리가 가만있을 수는 없습니다!”
가연은 엄밀히 말해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와 행동이 자연스레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 때문인지 유난히 중장년층에서 가연을 돕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생겨났다.
덕분에 일은 한결 수월해졌다. 가연은 온전히 마족과의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불안한 사람들을 달래고, 소란이 일지 않도록 질서를 잡는 일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스스로 찾아서 하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그 모습을 보고 느끼는 것이 있었다. 지금껏 길고 긴 세월 동안 마족과 싸우면서 인간이 그 현장을 목격하는 일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다들 마족이 무서워 도망가고, 벌벌 떨기에 바빴다. 인간이 인간과 협력하고, 기사들을 돕는다는 일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세르미네도 어차피 잊어버릴 일이라며 인간들은 안중에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리해서는 안 되었다. 세르미네가 리슈아를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싶은 만큼, 리슈아는 인간들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세르미네 또한 리슈아가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지키고 싶었다. 가연의 말대로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아….’
세르미네의 마음속에 무언가 자리 잡으려 하고 있었다. 아직은 형체를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존재했다.
그는 한 번만 더 자존심을 굽히기로 했다.
“리레시아! 여기 이 마족을 맡아줘!”
마침 리레시아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르미네의 부탁을 들은 그는 오히려 기뻐 보였다.
“세르미네 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는 수호룡이 깃든 자신의 주먹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불의 수호룡이여! 내 앞을 막는 자를 모조리 태워버려라!”
외침과 동시에 붉게 변한 주먹에 화염의 기운이 서리더니 그가 주먹을 내리꽂을 때마다 적을 새카맣게 불태웠다. 오랜 시간 쓸 수는 없는 기술이지만, 온 힘을 일격에 실어 적의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 기술이었다. 이리하면 핵이 아닌 빙의 계열 마족의 잔챙이는 옮겨가지 못하고 숙주와 함께 불타 사라졌다.
지속 시간은 삼 분 남짓, 가면 갈수록 버거워지는 기술임에도 리레시아의 표정은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투지에 불타는 표정으로 적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며 세르미네는 안심하고 가연에게 달려갔다.
“리슈아, 너는 방어막을 펼치고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에만 집중해. 마족은 내가 상대하겠다.”
세르미네가 달려오자 가연은 눈에 띄게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자칫 긴장이 풀리려는 마음을 가연은 애써 다잡았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세르미네가 세 마리의 마족을 상대하는 동안 가연은 사람들에게 붙으려는 한 마리를 해치우려 했다. 그러나 좀처럼 틈이 보이지 않았다. 무기를 휘두르려 해도 자칫하면 사람들이 다칠 수 있었다.
‘어떡하지, 방법이 있을 텐데….’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생각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전에 세르미네가 쓴 단검, 그 기술과 비슷한 것을 쓸 수만 있다면, 하고 그는 바랐다.
‘어…?’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전에도 이렇게 마족을 상대한 적이 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자신은 그런 무기를 사용했다. 가연은 혹시나 싶어 떠오른 대로 힘을 집중해보았다.
그러자 가연의 주변에 마치 유리 파편이 깨진 것 같은, 검은색 수정이 수십 개 떠올랐다. 그것들은 가연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의 주변을 얌전히 떠다니고 있었다.
“어? 앗, 나, 날아가라!”
그러자 검은 수정은 가연이 의도한 대로 마족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뭔가 부족했다.
순간 가연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잠깐 동안 가연은 어딘가 붕 뜬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검은 실이 뻗어나가더니 마족의 다리를 잡아챘다. 뒤집힌 마족의 배로 수정 칼날이 쏟아졌고, 마족은 비명을 질렀다.
“어, 어?”
생각지도 못한 연계 기술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가연을 덮쳤다.
‘이게 뭐지?’
그러나 깊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가연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마족에게 뛰어올라 낫의 반대쪽, 장식이 달려 있는 뾰족한 끝으로 상처 부위를 찔렀다.
그제야 마족은 숨이 끊어졌다. 가연이 바닥으로 착지하자, 그 사이 마족들을 전부 해치운 세르미네가 달려왔다.
“괜찮나?”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그 많은 마족을 벌써 다 해치우신 거예요?”
“그래. 지금은 저 마족들보다 빙의 계열 마족의 핵을 찾아야 해.”
세르미네의 말에 가연이 잠시 턱에 손가락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내 그를 향해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기… 세르미네 씨가 더 잘 아시겠지만, 혹시 핵은 더 특이하고 상징적인 것에 있지 않을까요?”
세르미네 역시 확신이 없었다. 빙의 계열 마족의 핵은 그야말로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빙의 계열 마족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빙의한 물건들이 모두 평범했기에 그리 느꼈을지도 몰랐다.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그렇지만 특이하고 상징적인 것이 대체 무엇이지?”
세르미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답은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당신들, 저 괴물들 해치우는 경찰이지? 지금 이 쇼핑몰에서 상징적인 것은 역시 중앙 계단의 산타 풍선이지!”
선두에서 사람들을 진정케 하던, 나이 든 여성이 대뜸 말을 건넸다. 그러자 여성의 아들로 보이는 꼬마 아이가 말을 이었다.
“산타 풍선이 먼저 움직였어요! 그다음에 하얀 인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같은 목격담이 이어졌다. 세르미네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다음, 가연에게 뒤를 맡기고 중앙 계단으로 달려갔다.
야외 테라스가 있는 곳은 4층, 중앙 계단의 산타는 3층에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뻥 뚫린 공간에 도착한 세르미네는 한 층을 가볍게 뛰어내렸다.
“저건가!”
세르미네의 눈앞에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이는 풍선 인형 하나가 있었다. 그 인형은 산타 모습을 하고 북을 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북은 원래의 색일 터인 붉은 색 위에 거무스름한 빛이 더해져 있었다.
심지어 산타의 눈도 새빨간 색이라 어디를 봐도 쇼핑몰의 마스코트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족임이 확실했다. 그것도 가까이서 보니 확신이 섰다. 저것은 빙의 마족의 핵이었다.
세르미네는 우선 뛰어올라 마족이 서린 북 모양 풍선에 검을 날렸다. 하지만 그 풍선은 단단한 방어막으로 막혀 있어 세르미네를 저 멀리 튕겨냈다.
“윽, 이런….”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지만, 세르미네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어차피 핵을 처리하면 사역이나 다름없는 다른 빙의 계열 마족들은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당장은 힘을 아낄 필요는 없었지만, 세르미네가 우려하는 것은 후에 다시 상공에서 마족들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리레시아는 힘겹게 마족을 상대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언제 가연이 다시 위험에 처할지 몰랐다.
‘하는 수 없지. 그것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세르미네는 결심하고 검에 온 힘을 실었다. 그러자 검신이 새하얗게 빛나며 그 위로 용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가연과 처음 만난 날 썼던 기술이었다.
“빛의 수호룡이여! 내 앞을 가로막는 적을 섬멸하라!”
그의 외침과 함께 새하얀 날개를 가진 수호룡이 일직선으로 쭉 뻗었다. 목표는 마족의 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