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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29화 (29/87)

29화

마족은 실로 기괴했다. 온 쇼핑몰의 마네킹이 일제히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몸이 강화된 것인지 위력도 엄청났지만, 그 움직임은 보통 인간들에게 겁을 주기에 충분했다.

“엄마, 엄마아아….”

있을 수 없는 모양으로 팔의 관절을 꺾은 후 달려오는 마네킹이 보이자 아이들은 일제히 울어댔다. 그러나 그 부모라고 해서 마네킹을 해치우거나 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달랠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아이를 안고 야외 테라스로 대피하기에 바빴다.

혼란의 인파 사이를 세르미네는 재빨리 뚫고 지나갔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들려 있었다. 새르미네는 하얗게 빛나는 검으로 눈앞에 당장 보이는 마네킹을 힘껏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석고 재질의 마네킹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무리 마족의 힘으로 강화가 되어 있었다고는 해도 세르미네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하필 이 쇼핑몰에는 마네킹이 무수히 많았고, 거기에 더해 소품들은 셀 수조차 없었다. 부서진 마네킹에서 검은 기체가 스륵, 빠져나가더니 이내 바로 옆의 가게에 놓인 곰 모양의 인형에 흡수되었다.

“저건 빙의 계열 마족이군…!”

곰 인형이 고개를 360도 돌리는 것을 보며 세르미네가 중얼거렸다. 인형은 맹렬한 기세로 빠르게 달아나는 사람들을 위협했다.

“세르미네 님,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때 나선 것은 다름 아닌 리레시아였다. 세르미네보다는 조금 느렸지만,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그는 귀에 달고 있던 마름모 모양의 붉은 보석 귀걸이를 떼어냈다.

귀걸이의 장식으로만 보이던 보석은 리레시아의 수호석이었다. 작은 두 개의 보석을 자신이 끼고 있는 장갑 위 손등의 파인 금속에 끼운 리레시아는 그것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씩 돌렸다.

“불의 수호룡이여! 나와 함께 하자!”

리레시아의 몸 위로 붉은 도마뱀 모습의 용이 아른거렸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리레시아의 두 손에 화기가 서렸다. 불이 걷히고 난 자리에는 리레시아의 작고 하얀 손이 아닌, 전설 속의 용과 같은 붉고 단단한 피부의 손이 생겨 있었다.

“간다!”

리레시아는 빠르게 마네킹에게 주먹을 날렸다. 수호룡의 힘이 서린 주먹은 아무리 강화된 석고라도 단번에 쩍 하고 부숴버렸다. 거기에 더해 세르미네보다 체구가 작고, 무기도 가벼워 더욱 날렵하게 싸울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단순했지만, 수호룡의 능력 덕분에 적을 묵직한 힘으로 확실히 처리할 수 있었다. 몸을 돌려 다리를 걸어 마네킹을 쓰러뜨린 뒤, 몸통 한가운데에 주먹을 내리꽂는 그의 표정은 마치 희열에 젖은 듯했다.

그러나 세르미네도, 리레시아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야외 테라스로 대피한 사람들이었다.

아직도 쇼핑몰 안은 마네킹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든 층에서 빙의 계열 마족이 나타났는지 사람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세르미네는 그들의 비명 소리를 흘려들으며 눈앞의 적을 베어 넘기는 일에 열중했다. 하지만 빙의 계열의 적은 핵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무엇이 핵인지 모르니 무작정 쓰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일을 끝내는 것이 차라리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세르미네와 리레시아가 빙의 계열 마족에 집중하는 사이, 가연은 허둥대며 야외 테라스의 사람들을 진정케 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앗, 거기! 앞으로 나가면 안 돼요!”

그는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일반인으로 보이는, 일개 대학생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하늘에서 이전에도 보았던 검은 마족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저, 저건! 학교를 습격했던 마족이잖아!”

가연은 얼른 수호석을 손에 쥐고 리슈아로 모습을 바꿨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약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낫을 들고 적을 향해 달려들고자 했다. 그러나 길고 위협적인 무기를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뭐야!”

“저 사람 어떻게 저런 걸 들고 있지?”

마치 자신을 마족과 한 패인 것처럼, 자신 또한 사람들을 해칠 것처럼 겁먹은 군중들을 보자 가연은 서둘러 해명하기 바빴다.

“아니, 아니에요! 이건….”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마족이 광선을 뿜어내려 힘을 모으는 것이 보였다. 가연은 얼른 그곳으로 뛰어가 낫을 휘둘렀다. 우선 시선을 끌고 광선을 뿜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를 봐!”

가연이 필사적으로 무기를 휘둘렀지만, 낫은 움직이는 반경이 상당히 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멀찍이 떨어졌고, 가연은 제가 더 놀라 팔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마족의 시선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다. 마족은 가연을 공격하려 달려들었고, 가연은 손에서 검은 실을 뽑아내 그의 네 다리를 전부 묶어버렸다.

“세르미네 씨! 도와줘요! 마족이 사람들을 공격해요!”

마침 세르미네는 테라스 입구 쪽에서 마네킹에 빙의한 마족 세 마리와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가연의 외침에 돌아온 세르미네의 대답은 의외였다.

“리슈아, 위험하니까 이쪽으로 와! 지금은 빙의계 마족의 핵을 찾는 게 먼저야!”

세르미네는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한 말이었다. 빙의 계열 마족은 물건에 빙의하고 난 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결속력이 강해졌다. 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하나가 되어 힘도 차츰 강해지는 것이 이 마족의 무서운 점이었다. 다행히 사람에 빙의하는 고위 마족은 아니었지만, 마네킹이나 다른 물건에 빙의한 채 시간이 흐르면 뒤에 있는 검은 마족보다 더욱 위협적일 게 뻔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다급하게 가연을 불렀고, 가연은 놀람과 황당함을 섞은 표정으로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예요? 사람들이 위험하다고요! 저는 혼자서 이 마족을 전부 상대할 수 없어요!”

세르미네는 세르미네대로 마족을 상대하랴, 거기에 가연에게 외치랴 정신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다소 신경질적이 되었다.

“왜 말을 듣지 않나! 네 말대로 너는 그 마족을 다 상대할 수 없어!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해!”

세르미네의 말을 듣자 가연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몹시 분하고 억울했다. 온전한 리슈아였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무력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세르미네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겨우 한 마리씩 상대하던 마족을, 이 많은 사람들을 지켜가며 해치우는 건 가연에게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어차피 기억이 지워질 인간들이었다. 자신이 애를 쓰고 구해내도 저 사람들에게는 잊어버릴, 그래서 허무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르미네의 말에는 반박하고 싶었다.

“그래도 전 사람들을 구할 거예요! 제 한계가 그거밖에 되지 않아도, 발버둥 칠 거에요! 후회하긴 싫어요! 세르미네 씨도 그럴 거잖아요!”

세르미네에게 말을 남기고 가연은 마족 앞에 섰다. 설령 상처 입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해내야 한다는, 자신밖에 해낼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마족의 수는 꽤 많았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것만 해도 열 마리가 넘을 정도였다. 아마도 빙의 계열 마족이 군중을 혼란에 빠뜨리면 그사이 공격을 가하기 위해 함께 온 모양이었다.

가연은 침착하게 한 마리씩, 발을 묶고 배를 노리는 방법을 썼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마족이 광선을 뿜으려 하면 방어막을 펼쳐 막아냈다.

당연히 가연의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점점 팔은 저리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늘어갔다.

심지어 가연은 제대로 된 기사의 몸이 아니었다. 큰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었다.

그걸 아는 세르미네는 달려가고 싶었지만, 하필 그때 빙의 계열 마족이 몰려들었다. 백 개가 넘는 마네킹들이 세르미네를 빙 둘러싸고, 심지어 야외 테라스로 가는 길목을 겹겹이 막고 있었다.

‘의도한 건가?’

이상했다. 마치 마족들이 일부러 세르미네를 막아서는 것 같았다. 그는 순간 뒷골이 서늘했다.

머뭇거릴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나아갈 수도 없었다. 날아서 가기에는 입구가 너무 좁았다. 게다가 막아서는 마족들을 해치우지 않고 넘어가면 뒤따라와 사람들을 습격할 수 있었다.

“젠장, 리슈아!”

세르미네는 검기까지 실어가며 최대한 빠른 속도로 마족을 해치웠다.

‘누군가 가연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가연이 구하던 도움을 이제는 세르미네가 구하고 있었다. 이럴 때 마이데나 치르티티샤가 있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세르미네는 도리질했다. 아니, 아니야. 역시 자신이 가야만 했다.

그러나 가연을 도와줄 자는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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