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럼 아틀란티스의 예산이라는 건 전부 각 나라의 세금이라는 건가요?”
가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족에게서 지구를 지켜주는 대신 받는 일종의 방위비 같은 거지.”
“그러니까 내 노동의 결과이기도 하니, 케이크 조금 많이 먹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잖아.”
리레시아가 우쭐한 표정으로 말하자, 세르미네는 무표정으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물론 저렇게 돈을 쓰면 예산을 관리하는 루아가 한소리를 하지.”
“세르미네 님! 그 이야기는 안 해도 되잖아요!”
리레시아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지만, 그리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세르미네는 그런 리레시아를 한 번 보더니 다시 가연을 보며 말을 이었다.
“멸망 이전 아틀란티스는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었다. 하지만 멸망 이후 인력이 부족하게 되면서 우리도 인간들의 사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지. 서로 돕고 살자, 이런 거야.”
“그렇군요.”
가연은 그제야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가 귀여워 세르미네는 머리를 슥 쓰다듬었다.
“아앗, 세르미네 님! 저도, 저도 쓰다듬어주세요~!”
그리 말하며 리레시아는 자신의 보라색 드레스 해트를 벗었다. 제 딴에는 쓰다듬어달라는 의미임에 틀림없었지만, 세르미네는 그의 뜻대로 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연이 보는 앞이었다.
“그냥 쓰고 있어.”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리레시아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쓰다듬어주지 않아 시무룩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말을 제 입맛대로 왜곡한 리레시아는 오히려 눈을 빛냈다.
“세르미네 님도 역시 제가 이 모자를 쓰는 편이 귀엽고 멋지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역시 탁월하셔요!”
리레시아는 다시 모자를 머리에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붉은 루비와 같은 눈동자를 담은 날카로운 눈매가 제법 예쁘게 휘어졌지만, 세르미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는 그저 귀찮은 일이 싫었다. 알아서 해석하라며 리레시아를 내버려 둔 채 세르미네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눈빛으로 가연을 바라보았다.
“리슈아. 네가 잘 먹는 모습도 보기 좋다만, 무리해서 먹을 필요는 없다.”
가연은 그야말로 입에 케이크를 욱여넣고 있었다. 좋아하는 설탕 과자까지 옆으로 치워놓고 케이크를 거의 마시다시피 한 가연은 세르미네를 애타게 올려다보았다.
“세르미네 씨….”
케이크 맛을 다 봤으니 어서 나가자는 뜻이었다. 가연 역시 리레시아가 그리 탐탁지 않았다.
그리고 세르미네 또한 가연이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았다. 다른 사람의 표정은 외면하거나 읽지 못해도, 리슈아에 한해서라면 귀신같이 알아채는 세르미네였다.
“그래. 알았다. 그럼 리레시아, 자리를 내줘서 고마웠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앗, 세르미네 님! 저도, 저도 갈래요~!”
리레시아는 남아있는 케이크에는 미련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는 세르미네를 따라 일어섰고, 가연은 울상인지 찌푸린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도 온다고? 네 일정이 있을 텐데?”
“에이, 일정이 어디 있어요. 있던 일정도 세르미네 님을 위해서라면 없애야죠. 리슈아가 케이크를 맛볼 수 있도록 제가 자리까지 마련했는데, 같이 가요~”
싫어하는 연적에게 자리까지 내줬으니 너도 양보해라, 이 소리였다. 세르미네는 그 의중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이런 면에서 그는 고지식했다.
“이런, 리슈아. 어쩌지? 리레시아가 동행해도 되겠나?”
당연히 가연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하지만 리레시아는 가연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에이, 어때요. 세르미네 님만 허락하셨으면 됐죠. 가요!”
리레시아는 세르미네의 왼쪽 팔을 자신의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이런, 리레시아. 그러면 걸을 수가 없잖나.”
“세르미네 씨!”
이번에는 가연이 세르미네의 오른팔을 끌어안았다. 졸지에 양손이 묶인 세르미네는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리슈아, 당신. 세르미네 님이 곤란해하시잖아. 그거 놔.”
“그쪽이야말로 그것 좀 놔요. 먼저 잡아놓고 왜 그래요.”
순식간에 카페 안 사람들의 이목이 세 사람에게 쏠렸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둘을 들어 올리다시피 하며 카페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 천천히 가자.”
“세르미네 씨! 왜 저 사람에게는 그렇게 물러요? 마이데 씨에게는 안 그러면서.”
카페를 나온 가연이 강하게 항의했다. 세르미네도 스스로 이유를 뾰족하게 댈 수가 없었다. 그저 리레시아가 이러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은 할 뿐이었다. 하지만 변명 같기에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세르미네는 오른팔의 가연이 더욱 신경 쓰였다. 평소에는 이렇게 진한 스킨십을 하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리레시아가 눈앞에 나타나니, 마치 세르미네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행동했다. 그런 사소한 행동이 세르미네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정말 기억이 없는데도 이러는 건가.’
애정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좋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놓칠 수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런 불안감도 길게 가지는 못했다. 근처의 예쁜 소품 가게에 들른 가연은 크리스마스 리스 모양의 작은 열쇠고리를 들어 올렸다.
“세르미네 씨, 이거 예쁘죠?”
세르미네가 봐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잘 어울려.”
“앗, 세르미네 님! 저, 이건 어때요? 이게 더 예쁘죠?”
갑자기 리레시아가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검은 십자가가 달린 붉은 장미 브로치를 들고 있었다.
“그, 그렇군. 그것도 너와 잘 어울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리레시아도 칭찬하며 그의 몫 역시 계산해야만 했다.
그 때문인지 가연은 더욱 도끼눈이 되었다.
“세르미네 씨, 저기 봐요! 저 옷, 세르미네 씨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얼른 주변의 큰 옷가게로 들어간 가연이 옷을 하나 집어 들며 말했다. 하얀 셔츠에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것이 세르미네의 마음에도 들었다.
“음, 확실히 그렇군. 괜찮으니 한 벌 장만할까.”
“당신이 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세르미네 님은 정장이 잘 어울리신다고!”
이번엔 리레시아가 언제 계산까지 마쳤는지, 옷이 담긴 봉투를 하나 세르미네에게 내밀었다. 꽤 고급 재질의 옷을 한 번 꺼내 보니 이것 또한 세르미네와 상당히 잘 어울렸다.
“그래. 이것도 괜찮군. 이미 샀으니 잘 입도록 하지.”
그로서는 최대한 가연의 편을 들어 말을 꺼낸 것이었다. 하지만 리레시아는 의기양양했고, 가연은 홱 토라져 흥,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그런 과정을 대여섯 번쯤 거치자 세르미네는 몹시 곤란했다. 그는 이전처럼 리레시아가 도를 넘지만 않으면 그를 강하게 제지하지 않았다. 리레시아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처럼의 데이트를 방해받는 것은 곤란했다. 무엇보다 가연의 심기가 몹시 좋지 않다는 것을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결국 이리저리 끌려다닌 끝에 세르미네는 그들에게 각각 무지개색 솜사탕을 하나씩 쥐여주었다. 그리고 벤치에 앉고서야 한시름 돌릴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좌우로 앉은 그들이 곁눈질하며 견제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리레시아는 언제쯤 돌아갈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오른쪽에서 솜사탕을 오물오물 먹는 가연을 보니 또 마음이 누그러졌다. 괜히 리레시아와 언쟁을 하면 다른 의미로 분위기가 망가질 수 있었다.
“어?”
그러던 와중, 가연이 앞을 보더니 갑자기 세르미네의 소매를 가볍게 잡아끌었다.
“세르미네 씨. 저기 봐요.”
그가 가리킨 곳은 야외 테라스와 마주 보고 있는 옷가게였다. 세르미네가 보기엔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었다.
“왜 그러지?”
“저기 마네킹이요. 방금 움직이지 않았어요?”
“아니. 그리 보이지는 않는다.”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었고, 가연은 이상하다는 듯 갸우뚱해 보였다.
“그런가요….”
하는 수 없이 가연은 다시 솜사탕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가연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잠시 정적 후, 갑자기 쇼핑몰 안에서 귀가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으악!”
“저, 저게 뭐야!”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야외 테라스로 몰려왔다. 그제야 세르미네 역시 보았다. 마네킹이 기이한 움직임으로 한 발짝씩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마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