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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27화 (27/87)

27화

달그락,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 세르미네는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 칼같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그로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는 것 또한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방 한쪽에 놓인 안락의자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흔들거리는 의자 위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니 온갖 상념이 휘몰아쳤다. 그리고는 이내 생각들은 침전되고 수면 위에 남은 것은 요즘 들어 세르미네를 괴롭히는 고민이었다.

후우, 세르미네는 숨을 내뱉고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연하게 내린 커피였지만 유난히 씁쓸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저녁 내내 이 의자에 앉아 놀던 가연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제 기말고사가 완전히 끝나 가연은 방학을 맞았다. 그는 저녁 훈련이 끝나면 세르미네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놀곤 했다.

“세르미네 씨, 이거 봐요. 성적이 잘 나왔어요! 장학금도 나온대요!”

가연은 오늘 나온 성적표에 한껏 들떠 있었다. 세르미네는 장학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가연이 저리 기뻐하니 그 역시 기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조금씩 올라왔다.

‘우리는 대체… 사랑하고 있는 게 맞나.’

물론 가연은 리슈아의 기억이 없으니 옛날 같은 애정을 그에게 보여줄 리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세르미네는 애가 탔다.

가연은 기억보다도 리슈아가 느꼈던 감정이 더 먼저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무의식에서 한 행동이겠지만 사소한 태도 하나하나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것이 보였다.

더욱 다정하고, 더욱 친밀하고, 더욱 애정 어린 행동들.

그 때문에 세르미네는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어서 기억을 찾고, 모든 걸 옛날로 되돌리고 싶었다.

리슈아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라앉았던 모든 기억, 마음들이 하나둘 기포처럼 솟아올랐다. 옛 기억에 애가 타는 건 자신뿐인지, 세르미네는 가연이 야속하단 마음도 들었다.

*

이윽고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떠들썩한 날이니 세르미네도 크리스마스를 모르지는 않았다.

어느 새벽에 토해냈던 독백 같은 마음과는 달리 세르미네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아침에는 가연과 훈련을 하고, 치르티티샤가 차려놓은 식사까지 마친 그는 난데없이 한 쪽지를 받았다.

“이게 뭐지, 치르티티샤?”

빼곡하게 물건의 목록이 적힌 쪽지를 보며 세르미네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긴 뭐예요. 크리스마스니까 집을 장식해 보려는 거죠. 이 쇼핑몰에서 전부 구할 수 있는 거니, 가연 씨와 같이 다녀와요.”

“저도 가도 되나요?”

가연의 물음에 치르티티샤는 보기 드물게 사람 좋은 미소를 대답과 함께 보냈다.

“그럼요. 가서 마음껏 원하는 걸 사 오도록 해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세르미네는 이게 무슨 쓸데없는 일이야 싶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치기로 했다.

예전에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틀란티스의 성은 반짝반짝 예쁘게 꾸며지곤 했다. 물론 그것은 전부 리슈아의 취향이며 그의 공이었다. 게다가 그 시기만큼은 리슈아에게 적대적인 리레시아도 유일하게 서로 협심하는 때이기도 했다.

‘리슈아가 즐겁고 행복하다면 무슨 상관이겠나.’

비록 트리며 장식용 전구에 요리 재료까지 빼곡하게 적힌 쪽지가 세르미네를 괴롭히고 있지만, 가연은 들떠 기뻐하고 있었다. 그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고생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 일인지 마이데는 오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데이트에는 최고의 날이었다.

치르티티샤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밑층에 위치한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색색의 전구와 장식품들이 여기저기 걸려 반짝거렸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와, 역시 이 시기가 제일 좋아요!”

가연은 신이 나 있었다. 그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세르미네 또한 덩달아 기분이 들뜰 정도였다. 가연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있었다.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가 쥐여 준 쪽지로 시선을 옮겼다.

“어디 보자, 작은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품….”

“우와, 세르미네 씨! 저기 케이크 정말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

가연이 갑자기 세르미네의 손을 놓고 달려갔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운영하는 카페였다. 진열장 속에 놓인, 딸기 크림으로 장식을 하고 위에 산타 모양의 설탕 과자를 얹은 부쉬 드 노엘을 가연은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세르미네는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무엇보다 우선순위는 가연의 즐거움과 행복이었다. 진열장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케이크를 바라보는데, 어찌 사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 부쉬 드 노엘 하나와 샹그리아 두잔, 하나는 논 알콜로 주시오.”

“와, 세르미네 씨! 고마워요!”

가연이 눈을 빛내며 세르미네에게 매달리자, 그는 몹시 뿌듯했다. 영수증과 진동벨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난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카페 안에는 앉아서 먹을 빈 테이블이 보이지 않았다. 가연은 신이 나서, 세르미네는 그를 따라오느라 빈자리가 있는지 확인을 못 한 탓이었다.

“이런. 어쩌지….”

가연 또한 자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때, 멀리서 세르미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세르미네 님 아니에요?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익숙한 목소리에 세르미네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페의 한쪽 테이블에서 케이크와 차를 마시던 리레시아가 세르미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도 온 건가? 뭐, 이 시즌을 좋아하던 너라면 그럴 법도 하다만.”

그에게 다가간 세르미네가 별 의미 없이 인사를 건넸다. 하필 리레시아가 이곳에 있다니, 세르미네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가연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고, 이미 계산을 끝낸 뒤였다.

리레시아는 세르미네의 인사에 깊이 감동 받은 모양이었다.

“세르미네 님이 제 취향을 기억해주시다니! 감동이에요! 아, 모처럼이니 함께 앉아서 케이크라도 드시지 않을래요?”

리레시아는 자신의 맞은편 빈자리를 가리켰다. 세르미네는 선뜻 호의를 받아야 하나 싶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빈자리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불길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리레시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가연 역시 머뭇거리며 그 옆에 앉았다.

“리슈아, 당신은 부른 적 없는데? 저리 가.”

“뭐라고요?”

가연은 화가 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더니 그는 망설임 없이 세르미네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가요, 세르미네 씨. 자리라면 곧 생길지도 몰라요.”

세르미네 또한 리레시아의 도 넘은 발언에 속이 끓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다. 이곳은 카페고, 보는 눈이 많았다.

게다가 세르미네가 보기에는 앞으로도 빈자리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카페에는 계속 손님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진동벨이 울렸고, 세르미네는 리레시아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레시아. 그러지 말고 리슈아도 동석하면 안 되겠나? 크리스마스니까 네가 조금만 봐줘.”

리레시아와 가연을 둘만 두지 않기 위해 세르미네는 가연에게 케이크를 가져와 달라 부탁했다. 그러면서 리레시아에게도 부탁을 하니 그 또한 의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뭐, 세르미네 님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좋아요. 크리스마스니까 자비를 베풀도록 하지요!”

가연이 듣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세르미네는 리레시아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리레시아는 단번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가연이 테이블에 케이크와 음료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가연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케이크를 포크로 꾹꾹 찔러 입에 욱여넣는 가연에게 리레시아는 한마디 톡 쏘아붙였다.

“남이 사준 케이크를 그리 맛없게 먹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아?”

“무슨 소리예요. 생활비는 나도 내고 있어요. 당신이야말로 아틀란티스의 예산을 그렇게 마구 써도 되는 거예요?”

리레시아의 앞에는 이미 먹은 케이크의 흔적만 세 조각이었다. 그러고도 수많은 디저트와 고급 차까지 마시는 모습을 보며 가연은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리레시아는 허, 하고 황당하게 웃어 보였다.

“세르미네 님에게 뭐 들은 건 있나 봐? 그래, 그 예산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

가연은 거기까지 들은 바가 없어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뭔가 비밀이라도 있냐는 의심 어린 시선을 받자 세르미네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수상한 건 아니다. 내가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잘못이지.”

“어디서 훔쳐 오고 그런 건 아니죠?”

“야, 넌 아틀란티스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리레시아가 발끈하자, 세르미네는 손을 들어 그를 진정하게 했다.

“리슈아는 아직 기억이 없으니 하는 수 없다. 별 건 아니야. 이전에 마이데가 마족에 대해 아는 건 각국의 수장들뿐이라고 했지? 바로 그들에게서 받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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