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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26화 (26/87)

26화

가연은 굳게 결심했는지 눈을 빛내며 세르미네를 보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을 수 초간 잠자코 바라보았다. 가연을 몹시 아끼고 사랑하기에 더욱 걱정된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작게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멀었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알려주겠다.”

세르미네치고는 완곡하게 돌려 말한 대답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 세르미네였지만, 조금씩 말과 행동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가연이 그를 이해하며 변하는 만큼, 세르미네 또한 가연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자신 또한 예비기사 시절에는 저렇게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모한 전투도 많이 벌여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가연에게 그런 꼴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도 기사의 덕목이다. 지금의 네가 할 수 있는 건 대피소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거야.”

“그래, 가연아. 협력이 중요하다는 건 세르미네보다 가연이가 더 잘 알고 있지? 우리는 널 믿고 중요한 일을 맡긴 거야.”

마이데가 은근슬쩍 세르미네를 내려 말하며 가연을 달랬다. 세르미네는 그를 흘겨보았지만, 마이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자 가연도 더는 의견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는 세르미네에게 약속을 꼭 지키라며 매달렸다.

“정말이죠? 나중에 꼭 실전에 대해 알려주시는 거예요!”

“그래. 약속하마. 폴라로이아, 이 녀석을 잘 부탁한다.”

세르미네는 가연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가연은 세르미네와 떨어지는 것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르미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명령 입수. 리슈아의 안전을 최우선. 텔레포트 실행.”

폴라로이아의 작은 입에서 딱딱한 말이 떨어지고,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텔레포트의 여운인 작고 하얀 빛무리가 사라질 때까지 마이데와 세르미네는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켜보았다.

“자, 그럼 우리도 가야지? 가연이를 혼자 오래 둘 수는 없으니까.”

마이데가 몸을 일으키자, 세르미네 역시 대검에 수호석을 끼우고 한 바퀴 돌렸다. 그러자 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맞는 말이다.”

“그럼 누가 먼저 마족을 해치우는지 겨뤄볼까?”

마이데가 짓궂게 말하자 세르미네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대답 없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굳이 메신저로 좌표를 확인하지 않아도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당장 하급 마족 두 마리가 그들을 노리며 기회를 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르미네가 검을 쥐고 날아오르자 마족들도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면, 그리고 오른쪽에서 덤벼오는 두 마족을 세르미네는 눈으로 빠르게 살폈다. 그 역시 배가 약점임을 한 번에 간파해냈다.

오른쪽의 마족이 세르미네의 허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정면의 마족은 입에서 광선을 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어림없지!”

세르미네는 날개에 힘을 실어 몸을 지지한 후, 발로 오른쪽 마족을 강하게 걷어찼다. 그러자 마족은 공중을 두 바퀴 돌며 나가떨어졌고, 앞의 마족은 빈틈이라 생각했는지 광선을 입에서 쏘아 보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전부 계산한 후 행동하고 있었다. 하급 마족의 광선은 자신의 힘으로 방어가 가능했기에 그는 검을 들어 광선에 정면으로 맞섰다.

예상대로 광선은 세르미네의 몸에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검을 중심으로 하얀 방어막이 그의 정면은 감쌌고, 보라색 광선은 그 옆으로 비껴나가 공중에서 분해되었다.

광선 공격이 끊어짐과 동시에 그는 빠르게 앞으로 날아가 다시 한번 정면의 마족을 걷어찼다. 그리고는 오른쪽의 마족이 다가오자 검을 횡으로 그었다. 검풍의 압력으로 인해 두 마족이 다시 멀찍이 떨어졌고, 세르미네는 검을 활로 바꿔 들었다.

“키엑!”

하얀 화살 두 발은 정확히 마족의 배에 각각 꽂혔다. 꽂힌 화살을 중심으로 조금씩 배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마족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숨이 끊어졌다.

세르미네는 가연보다 더욱 강한 힘과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하급 마족은 힘을 실은 화살을 꽂는 것으로 처치할 수 있었고, 다수의 적이 다가와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공중에서 지상을 노리던 적 열 마리를 퇴치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스스로의 감을 믿으며 적을 섬멸한 세르미네는 지상으로 내려와 날개를 접었다. 그가 착지한 곳은 인문학관의 입구였다.

“여어, 내가 이겼지?”

그곳에는 지상의 적을 전부 없앤 마이데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기가 찼지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마이데는 사소한 것도 세르미네와 경쟁하고 싶어 했고, 이유는 전부 리슈아에게 잘 보이기 위함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하에 위치한 강의실, 지금은 마족을 피해 대피소로 쓰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강의실 두 개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불안한 기색과 더불어 언뜻 흥분한 모양새였다.

“저, 저기 그렇게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요! 그러지 마세요!”

가연의 외침이 들려오자 세르미네는 황급히 처음 보이는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새빨간 얼굴로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화를 내는 가연이 보였다.

“리슈아, 무슨 일이지?”

세르미네가 그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묻자, 찰칵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꺄! 서로 좋아하나 봐!”

“어쩜 좋아! 올리자, 올리자!”

몰려 있던 사람들은 반지하의 창문으로 마족이 전부 쓰러지는 것을 보았을 터였다. 자연히 긴장이 풀린 그들은 이 전대미문의 사건과 갑자기 나타난 특수한 이능력의 사람들을 신기하게만 생각했다.

자연히 그들의 마음은 이 대사건을 여기저기에 알리고 싶어 했다. 더군다나 자신과 같은 동기, 같은 대학교의 학생이 히어로라니,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다.

“가연아, 여기 좀 봐줘!”

그런 외침까지 들려오자 가연은 세르미네를 올려다보았다.

“세르미네 씨, 어떡하죠?”

그러자 옆에서 무슨 소동이 일어나든 가만히 앉아 태블릿 PC를 조작하던 폴라로이아가 작게 툭 내뱉었다.

“SNS의 실시간 트렌드에 괴수 사건 등극. 대학명 거론. 주가연 이름 확인. 사진 다수확인.”

“저거 봐요! 어떡해요!”

그러나 세르미네는 담담하게 가연을 달래줄 뿐이었다.

“괜찮다. 넌 할 수 있는 걸 잘 해냈어. 저들의 반응은 크게 신경 쓰지 말고, 우선 복도에 나가 있어. 마이데가 기다리고 있으니 안전할 거야.”

오히려 마이데에게 가연을 잠시나마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불쾌한 세르미네였다. 가연은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를 몇 번이고 돌아보며 강의실을 나섰다.

“폴라로이아. 언제나처럼 부탁한다.”

세르미네의 말에 폴라로이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태블릿 PC에 크게 떠오른 버튼을 눌렀다.

“기억 조작 실행.”

그 직후, 별다른 큰 이변은 없었다. 다만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하나둘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할 뿐이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시험, 시험 어떡해!”

그들은 마족 소동 따위 까맣게 잊은 것처럼 보였다. 세르미네와 폴라로이아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사람들의 대다수가 건물 밖, 또는 자신들이 있어야 할 강의실로 돌아갔다. 복도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가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세르미네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가연의 물음에 옆에서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마이데가 간단히 설명을 했다.

“보통 인간들의 기억에서 마족, 그리고 우리 기사들에 대한 걸 지워버린 거야.”

“어떻게 그런 것까지….”

가연은 매우 놀랐다. 그러자 세르미네가 폴라로이아를 한 번 보더니 가연에게 이어 설명했다.

“폴라로이아의 역할 중 하나가 그것이다. 마족 소동을 목격한 인간들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지. 이 녀석은 정신 계통에 강해.”

“그래. 지금까지 마족이 인간들을 습격하거나 인간들이 마족을 목격한 경우는 꽤 많거든. 그러니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선 기억을 조작해야만 해.”

마이데의 말에 가연은 세르미네를 보며 물었다.

“그럼 저도 기억을 조작당한 적이 있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다 겪는 건 또 아니니까. 게다가 네가 마족과의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있었다면 내가 더 빨리 알아차렸겠지.”

“그래. 내 기억에도 가연이 널 본 적이 없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는 건 각 나라의 수장들뿐이야.”

마이데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지만, 가연은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아마 무너진 건물이나 부상자를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폴라로이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폴라로이아. 아틀란티스의 수리 정령은 도착했나?”

“현재 다른 지역 수복 중. 30분 이내 도착 예정.”

폴라로이아는 여전히 PC에서 눈을 떼지 않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세르미네는 가연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자. 상황을 살펴야지.”

“아, 네….”

가연은 세르미네의 큰 손에 자신의 하얗고 작은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마이데는 씁쓸하면서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앞장서서 걷는 두 사람이 그것을 알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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