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리슈아. 내가 정말 밉거나… 그런 건 아니지?”
세르미네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지금껏 리슈아, 그리고 가연에게 미움을 산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연이 자신에 대한 애정을 떠올려주었기 때문에 지금 더 마음에 여유가 없는지도 몰랐다. 그 애정을 부정적인 형태로 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일로 세르미네 씨를 미워하진 않지만… 처음부터 이런 훈련은 너무 힘들어요.”
“그렇군.”
세르미네는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더니 뭔가를 슥슥 적었다. 가연이 보고 싶어 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세르미네는 그가 봤다간 훈련을 포기할까 싶어 차마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럼 일주일 동안 근육 단련은 하지 않겠다. 오늘은 무기를 쥐는 법을 알려주마.”
가연은 무기를 쥐고 쓰는 폼이 대단히 어설펐다. 그나마 지난번 마족은 보조 기술을 사용해서 퇴치할 수 있었지만, 늘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마이데가 오려면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틀란티스에 정기적인 보고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가연은 그사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를 대비했고, 세르미네는 옆에서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
“나 왔어.”
해가 기울쯤 되자 마이데가 양팔에 한 아름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그 소리에 가연과 세르미네가 얼른 나가보니 마이데가 긴 봉과 목검들을 크기별로 소파에 늘어놓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되지? 날붙이를 제외하니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
“그래. 이거면 충분해.”
어차피 리슈아의 무기는 긴 낫이었다. 처음에는 목검으로 시작해 봉으로 연습을 하면 충분할 거라 세르미네는 판단했다.
“자, 리슈아. 이제 나가서 다시 훈련을 하자.”
세르미네는 목검 두 자루를 집어 들고는 가연을 돌아보았다. 가연도 충분히 몸이 풀렸는지 군말 없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세르미네의 뒤를 따랐다.
다시 찾은 새벽의 공원은 저녁이 되자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가연은 부끄러움 탓에 보는 눈이 없는 곳을 원하는 눈치였다.
“세르미네 씨.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훈련에 방해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군. 혹시 적당한 곳을 알고 있나?”
그러자 가연은 익숙하게 공원을 지나 산으로 연결된 길을 찾아 들어갔다. 얼마 안 가니 과연, 약수터의 뒤편에 인적 드문 공터가 하나 있었다.
“밖에서 조용하게 책을 읽고 싶을 때 자주 찾는 곳이에요. 나무에 가려져서 여기는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적당한 넓이의 공터에는 가로등도 두 개 놓여 있어 밤늦은 시간까지 훈련이 가능해 보였다. 세르미네도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들고 있던 목검 중 하나를 가연에게 넘겨주었다. 가연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질의 목검을 신기하게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전반적으로 검은색을 띤 목검은 빛을 비추는 각도에 따라 푸르스름한 색을 발하기도 했는데, 일정한 간격을 따라 연한 노란색의 물결 모양 무늬가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이런 나무로 만든 목검은 처음 봐요. 외국에는 이런 목재가 있나 봐요?”
“이건 아틀란티스에서만 나는 목재로 만든 거다. 기사들의 훈련에 사용하는 것이니 특별히 심고 기른 나무에 장인이 가공을 더했지.”
그러면서 세르미네는 짧게 추억어린 말을 덧붙였다.
“그 나무는 전부 리슈아가 책임지고 가꾸던 것이다.”
헤에, 하고 가연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리슈아도 식물을 좋아하나 보네요. 그래도 나무를 키우는 건 꽤 힘들 텐데….”
“그래. 리슈아는 정원 가꾸는 걸 아주 좋아했지. 자, 이제 그 목검을 한번 들어봐라.”
세르미네의 지시에 가연은 목검을 들고 한껏 폼을 잡았다. 그 딴에는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자세를 잡은 것이 세르미네의 눈에도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영 아니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그, 그런가요…?”
가연이 멋쩍게 웃었지만, 세르미네의 표정은 꽤 엄했다. 그는 가연의 뒤로 돌아가 그의 팔과 손을 잡아주며 자세를 교정했다.
“완전히 틀렸어. 자, 이건 이렇게 잡고, 오른손은….”
“세르미네 씨…!”
가연이 당황한 목소리로 몸부림치며 세르미네를 밀어냈다. 얼떨결에 두 걸음 밀려난 세르미네는 영문을 몰라 저도 함께 당황했다.
“왜 그러나? 뭔가 문제가 있나?”
가연은 고개를 들 줄 몰랐다. 세르미네가 언뜻 보니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조금 뒤, 가연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 그게… 귓가에 바로 그렇게 속삭이면 어떡해요!”
가연은 필사적이었다. 아직도 귀에 느껴지던 감촉이 생생한지 연신 귀를 문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별일 아니라는 태도였다.
“무기를 쥐는 법을 알려준 것뿐이지 않나. 어디 아픈 것이 아니라 다행이군.”
그럼 계속하도록 하지, 라며 세르미네는 다시 가연의 뒤로 돌아가려 했다.
“으아아, 말로 알려주세요! 저 잘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리슈아도 이렇게 알려주니 금세 따라 했다. 지금의 너라고 못할 건 없다.”
그게 아닌데, 이 말만을 외우며 가연은 세르미네를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세르미네는 가연이 얼굴을 붉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그의 손을 잡아가며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새삼 자신의 한 손에 다 들어오는 가연의 두 손이 투박한 자신과는 몹시 대조적이라고 느껴졌다. 굳은살 하나 없는 가연의 손은 새하얗고 굉장히 부드러웠다.
심지어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가연은 세르미네보다 한참 체구가 작았고, 자연히 세르미네의 눈에 가연은 아직 여리고 미숙하게만 보였다.
‘이런 리슈아를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무기를 들고 싸우게 해야 하다니….’
물론 기사들 중에는 가연보다 훨씬 작은 자들도 있었다. 당장 리레시아만 봐도 가연과 거의 비슷한 체구이지만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우는 기사였다.
하지만 리슈아만큼은 언제나 지켜주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세르미네는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 한번 탓했다.
“저기, 세르미네 씨?”
세르미네가 잠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안고 있자 가연은 당황해 세르미네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세르미네는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하군.”
가연은 어찌나 긴장했는지 손이 다 뻣뻣했다. 가연의 등을 통해 심장 고동 소리가 세르미네의 가슴으로 전해질 정도였으니, 가연 또한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그가 좋아하는 딸기마냥 붉게 변해버린 얼굴로 가연은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세르미네 씨. 저, 저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가연이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이런 데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엄격했다.
“안 된다. 오늘은 자세를 확실히 알려줄 때까지 끝낼 생각이 없어.”
가연은 예의 히잉, 하는 소리를 내며 울상을 지었지만, 세르미네는 끝까지 훈련을 강행했다.
밤이 깊어 치르티티샤와 마이데가 번갈아 가며 연락을 해 올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만족했고, 가연은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
그 후로 세르미네는 아침저녁으로 가연의 훈련까지 책임졌다. 가연은 시작된 기말고사와 더불어 훈련까지 하려니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세르미네가 보았을 때 가연의 전투 능력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목도를 쥔 자세도 어색하지 않아 슬슬 긴 봉으로 바꿀까 고심하는 중이었다.
세르미네야말로 훈련과 마족 퇴치를 병행하느라 나날이 고전이었다. 쉴 틈이라고는 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뿐이니 그는 훈련할 때 가연과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그날 아침도 어김없이 두 사람은 공원을 달렸다. 이제 가연은 전부 완주를 해도 첫날처럼 지쳐 쓰러지지 않았다.
“좋아. 이제 기초 체력도 어느 정도 잡혔고, 무기를 쓰는 자세도 상당히 나아졌다.”
처음으로 세르미네가 칭찬을 하자, 가연은 멋쩍게 웃으며 수통의 음료를 천천히 들이켰다.
“그리고 알려줄 게 있다. 오늘부터 사흘 정도, 나와 마이데, 그리고 치르티티샤 모두 집을 비울 거다.”
그 말에 가연은 음료가 잘못 넘어갔는지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세르미네가 등을 두드려주자 겨우 진정한 가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집을 비우신다고요? 왜요?”
동거를 시작한 지도 이제 몇 주가 지났다. 가연은 잠시라도 세르미네가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루아에게 보고가 있었다. 성층권 너머에 다수의 마족이 감지되었다는군. 처리하러 가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마족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거죠?”
가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확히는 모른다.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주도록 하지. 별일이 없길 바라야겠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말하면서도 세르미네는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지 않을까 몹시 걱정이 되었다. 자신 또한 그런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생각한다는 것을 세르미네는 내심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스스로는 능력이 되기 때문에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연은 달랐다. 이제 막 무기를 잡기 시작한 풋내기였다.
‘걱정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임무를 소홀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르미네는 제발 마족이 사흘 동안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