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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21화 (21/87)

21화

“어둠의 기사 아포피스. 나와도 몹시 사이가 안 좋았지.”

“어둠의 기사요? 세르미네 씨가 전에 어둠의 기사는 리슈아, 그러니까 저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가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수호석을 꺼내 보라고 지시했다. 가연이 품에 잘 넣어둔 보라색 초승달 모양의 보석을 꺼내자, 세르미네는 그것을 손으로 가리켰다.

“수호석은 아틀란티스가 명맥을 잇는 동안은 없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안에 잠든 수호룡도 수호석만 있다면 불멸의 존재. 다음 주인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어.”

“아틀란티스는 멸망했다면서요. 수호석도 같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바로 그 점 때문에 리슈아와 나, 그리고 루아가 살아남았지. 특히 리슈아는 기사이기 이전에 왕의 후계자였으니까.”

후우, 하고 세르미네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무리 각오는 했다지만 씁쓸한 기억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몹시 피곤했다.

“아무튼 그 아포피스가 고위 마족과 결탁했어. 그는 마족의 침공을 돕기 위해 내부에서 움직였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결계를 만드는 무녀들에게 독을 먹인 일이었어.”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가연이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세르미네는 파르르 떨려오는 눈꼬리를 애써 누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포피스의 인망은 썩 좋지 않았지만, 집은 부유했어. 성의 하인들을 돈으로 매수한 그는 무녀들을 대부분 죽였고, 그 사이 마족들이 대거 침공했다.

처음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던 아포피스는 결국 태양의 기사 라에게 꼬리가 잡혔어. 내 선배이자 전우이기도 했던 라는 아포피스를 처단하겠다고 일대일로 이레를 맞붙었어. 하지만 둘 다 그만 죽고 말았다.”

“그래도 아포피스가 죽었으니 마족들만 처리하면 되지 않나요?”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마족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어. 우라노스 폐하께서는 당초 아포피스가 결탁한 고위 마족과 그 수하만이 침공할 거라 예상하셨지. 하지만 결계가 뚫린 하늘을 마족이 가득 메우는 바람에 빛마저 한 줄기 들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움직임까지 질서정연했어.”

“아포피스가 결탁한 마족이 하나가 아닌가요?”

“그건 모른다. 작정하고 마족들이 정보를 공유한 것인지, 아니면 고위 마족 위로 그들을 통솔하는 자가 있는지는 아직도 밝혀진 것이 없다.”

세르미네는 타들어 가는 목을 축이고자 테이블에 놓인 물병을 들었다. 가연과 자신의 앞에 컵을 하나씩 놓은 그는 미지근한 보리차를 그 안에 담아 가연에게도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군. 지루하진 않나?”

“전 괜찮아요. 세르미네 씨야말로 괜찮으세요?”

“난 신경 쓰지 마라. 그래, 그래서 마족의 침공을 받은 아틀란티스는 모든 기사들과 백성들, 심지어 왕까지 나서서 싸웠음에도 멸망하고 말았다. 그나마 폐하께서 남은 정예 기사들과 목숨을 걸고 펼치신 금기의 마법 덕분에 마족들을 함께 동반자로 데려갈 수 있었지. 대륙의 명맥도 간신히 이을 수 있었어.”

“그때 살아남은 것이 세르미네 씨와 리슈아, 그리고 루아라는 분이군요.”

“맞다. 리슈아는 왕의 후계자였어. 폐하께서는 리슈아를 동쪽 탑에 보호하셨고, 아포피스의 마수에서 살아남은 예비 무녀 루아도 함께 탑으로 보내셨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으며 호위역이 된 게 바로 나다.”

세르미네는 긴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물을 마셨다. 그러면서 가연이 무언가를 떠올린 기색을 비치지 않을까 살폈지만, 가연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직설적으로 묻는 길을 택했다.

“혹시 뭔가 떠오른 게 있나?”

가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가연의 말을 기다렸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떠올린 게 지난번 결계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기억이 생각난 것인지…”

“그래.”

어렵사리 아픈 기억을 떠올렸지만, 수확은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이쯤에서 만족하고 이야기를 마치기로 했다.

“얘기는 여기까지 하겠다. 말이 길어졌군.”

“저, 저기. 세르미네 씨!”

갑자기 가연이 몸을 앞으로 굽히며 큰 소리로 세르미네를 불렀다.

“왜 그러나?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다 들린다.”

세르미네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하지만 가연은 목소리만 약간 낮췄을 뿐 결의에 찬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리슈아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결계에서 마지막으로 본 환상, 그게 리슈아가 죽었던 때죠? 알고 싶어요!”

“그건… 왜 묻지?”

세르미네는 토해내듯 겨우 입 밖으로 질문을 던졌다.

“저는 알고 싶어요. 과거의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누구인지를요.”

가연은 그저 가볍게 던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또한 진심으로 자신을 마주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속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내장의 벽을 타고 그 열기가 올라가 눈가를 시큰거리도록 자극했다.

몇백 년을 괴롭혀왔던 기억, 며칠 동안 더욱 그를 옥죈 기억. 역시 아직은 태연하게 입 밖에 낼 자신이 없었다.

“저기, 세르미네 씨?”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표정만 더욱 굳히자 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곤란한 질문이라면 지금 당장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전 그저 세르미네 씨가 혼자 모든 걸 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리슈아….”

“저는 세르미네 씨를 위해 과거의 일을 어서 마주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하지만 세르미네 씨가 아직, 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두 번이나 소중한 걸 잃고도 세르미네 씨는 버텼잖아요. 그러니까 세르미네 씨 잘못은 없어요. 자책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세르미네는 쓰게 웃었다. 늘 꼬맹이라고 놀리던 리슈아에게서 이런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품속에서 보호해야 할 존재가 아닐지도 몰랐다.

“많이 컸군.”

세르미네는 가연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가는 결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그래. 아직 내가 그 일을 마주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네게 가르쳐줘야 할 것은 생겼군.”

“그게 뭔가요?”

가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르미네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아직 온전한 리슈아가 아니야. 아틀란티스도 갈 수가 없지.”

정곡을 찌르는 세르미네의 말에 가연의 눈빛에서 기대감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앞으로 마족을 수도 없이 마주할 테고, 스스로의 몸 정도는 보호할 필요가 있다.”

“그, 그러면…!”

“나는 이제껏 내가 어느 순간이든 널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로 그건 불가능하단 걸 알았다. 물론 앞으로도 널 지키겠지만, 네 몸 하나 지킬 기술은 배워두면 좋겠지.”

가연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신이 나 치르티티샤에게 자랑하러 거실로 나갔고, 그걸 보는 세르미네 역시 신기하게도 다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가연 또한 마족이 두렵고 무서울 게 뻔했다. 생긴 것이나 덩치부터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니, 기억이 없는 가연이 겁먹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두려움과는 별개로 가연은 세르미네의 도움이 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아마도 그가 몸을 던져가며 가연을 지키려 하기 때문일 거라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는 세르미네도 받아들일 때였다.

‘하지만 정말 딱 몸을 지킬 정도만이야. 또다시 리슈아를 잃을 수는 없어.’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세르미네는 당장 날이 밝으면 가연의 훈련을 시작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

“리슈아, 리슈아. 일어나라.”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남은 새벽 네 시. 세르미네는 온 집안의 불을 다 켠 뒤, 가연을 열심히 깨웠다.

“세르미네 씨… 지금이 도대체 몇 시인데….”

더듬거리며 간이 테이블 위의 시계를 본 가연은 기겁을 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연이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약속대로 오늘부터 훈련이다. 나와서 기본 운동부터 하자.”

세르미네는 가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세수를 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옆을 따라다니며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그의 눈빛은 엄격한 선생과도 닮아 있었다.

그들은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와 어두운 골목을 오 분 정도 돌았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것은 산을 끼고 있는 제법 큰 규모의 공원이었다.

“와, 이 시간에 공원은 처음 와 봐요.”

가연은 가볍게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말을 던졌다. 그러나 이내 돌아온 세르미네의 대답에 그는 앞날이 잠시 아찔해졌다.

“이제 자주 오게 될 거다. 앞으로 새벽 네 시, 이 공원을 열 바퀴씩 달리겠다.”

“네?!”

가연은 슬금슬금 몸을 빼려 했지만, 퇴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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