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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17화 (17/87)

17화

“넌 리슈아가 아니야.”

세르미네는 짧게 읊조리며 가짜 리슈아를 향해 검을 횡으로 그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금색 눈동자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볼 수 없었다. 마이데마저 내심 감탄할 정도였다.

세르미네도 검에 베인 리슈아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이 가짜 리슈아는 진짜와 똑같았다. 생긴 것도, 목소리도, 심지어 세르미네에게 매달리는 모습까지도.

그 때문에 더더욱 가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진짜 리슈아를 욕보이는 것만 같았다. 세르미네는 약해지려는 마음에 애써 채찍질을 가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치명상을 입은 정신계 마족은 리슈아의 모습 그대로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렸다. 죽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세르미네와 마이데에게 타격을 주려는 의도였다. 세르미네는 일부러 고개를 돌렸고, 마이데는 도리어 마족에게 한 번 더 일격을 가해 마족의 형체조차 남지 않도록 했다.

완전히 마족이 죽자 붉은 하늘이 다시 검게 변하더니 이내 크게 흔들렸다. 결계가 깨지려 하고 있었다.

“리슈아, 이쪽으로 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가연을 세르미네가 손짓해 불렀다. 정신계 마족을 해치우는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던 가연은 그 손짓에 쪼르르 세르미네의 곁으로 다가왔다.

“결계가 깨질 때 큰 반동은 없지만, 밖에 어떤 마족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가연이 불안하지 않도록 마이데가 일부러 밝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가연은 오히려 불안함이 가중된 모습이었다.

“마족이… 또 있어요?”

그 사실은 세르미네도 금시초문이었다. 그는 그저 자연스럽게 가연을 옆으로 불렀을 뿐이었다. 세르미네는 설명해보라는 의미로 마이데를 바라보았고, 마이데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밖에도 마족이 대거 포진해 있긴 했지. 아냐! 그, 다 하급 마족이었어. 치르티티샤가 상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르미네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마이데를 보자 그는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가연은 여전히 불안함을 지우지 못했지만 세르미네는 신경 써야 할 대목이 따로 있었다.

“치르티티샤도 왔나?”

“그래. 가연이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는 안 들리고 상황이 안 좋아 보였으니까. 루아에게 상의하러 가기엔 시간이 빠듯해서 옆에 있던 치르티티샤와 함께 왔어. 저기 봐.”

마침 마이데의 말이 끝나자마자 결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바깥 풍경이 드러났다. 산속의 조그만 공터에 작은 거미 마족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것이 세 사람에게도 보였다. 순간 세르미네는 긴장해 검을 뽑으려 했지만, 이내 그것들 대부분이 움직이지 않는 시체임을 깨달았다.

“뭐예요. 늦었잖아요.”

뱀 소환수를 옆에 거느리고 있는 치르티티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여전히 단정한 정장 차림에 한 손에는 채찍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못 볼 거라도 봤어요? 왜 그래요? 기껏 마족을 해치워 놨더니. 그보다 당신….”

세 사람의 이목을 한 몸에 받은 치르티티샤가 너스레를 떨더니 이내 세르미네를 가리켰다.

“거기 상처, 벌어졌네요. 안 아파요?”

그의 지적에 세르미네는 그제야 조금 전 마족에게 입은 상처를 돌아보았다. 조금 아물었다 싶은 상처는 전투로 인해 다시 벌어져 있었고, 피가 조금씩 배어 옷에 스며들고 있었다. 가연을 보호하며 싸우는 데 열중하느라 아픈 줄도 모르던 세르미네였다. 그는 그제야 쿡쿡 쑤시는 통증을 느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당신은 쉬는 게 좋겠네요. 그리고 거기 두 사람은 나 좀 도와줘요. 아직 마족이 남아있는데 혼자 다 해치우게 할 셈이에요?”

치르티티샤는 마이데와 가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이데는 그 말에 가연을 한 번 보고, 치르티티샤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이 맞지. 가연아, 다시 리슈아로 변할 수 있겠지?”

“네!”

가연은 허둥대며 짧게 대답하더니 손에 보물처럼 쥐고 있던 수호석을 더욱 꽉 쥐고 눈을 꼭 감았다.

“변해라, 변해라, 변해라!”

‘저런다고 변할 리가….’

세르미네는 황당했지만 그 모습이 퍽 귀여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수호석은 다시 한번 보라색 빛을 발하더니 가연을 리슈아의 모습으로 변하게 했다.

“세르미네 씨, 마이데 씨! 이거 봐요! 또 모습이 변했어요!”

가연이 폴짝거리며 신난 기색을 숨기지 않자 치르티티샤가 톡 쏘아붙였다.

“기뻐하긴 이를 텐데요. 마족과 싸워야 하니 무기나 꺼내세요.”

“네….”

가연은 금세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이내 낫을 꺼내 들었다. 아직도 그는 치르티티샤를 대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내가 뒤에서 보조해줄 테니까 너무 겁먹지 마라.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그리 말하며 세르미네는 가연도 이제 익숙해진 단검을 공중에 몇 개 불러냈다. 이 기술은 힘을 꽤 쓰는 반면 효율이 그리 좋지 않아 평소의 세르미네라면 잘 쓰지 않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몸이 전투 불능 상태일 때에는 상당히 요긴했다.

그러나 사실 치르티티샤가 대부분의 마족을 해치워 놓은 데다 하급 마족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상대하던 마족이 까다로웠기에 상대적으로 더욱 그리 보이는 면도 있었다.

마이데는 치르티티샤와 함께 온 산을 누비며 잔챙이 하나까지 남김없이 휩쓸었고, 가연은 세르미네의 도움을 받긴 했어도 열 마리 정도의 마족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산에는 마족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치르티티샤가 뱀 소환수를 이용해 시체까지 먹어 치운 덕분이었다.

“휴. 이제야 다 끝났네요.”

일부러 과장되게 땀을 훔치며 치르티티샤가 산을 올라 세르미네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 뒤에는 마이데가 휘파람을 불며 도끼를 어깨에 지고 따라오고 있었다.

“와, 두 분 싸우는 게 굉장히 멋있어요! 저도 그렇게 싸우고 싶어요!”

가연이 눈을 빛내며 둘을 맞이하자, 치르티티샤가 코웃음을 쳤다.

“이제 막 무기를 쥔 당신이요? 겁먹어서 제대로 낫조차 휘두르지 못하면서요?”

“그, 그건….”

가연이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이데는 표정을 굳히고 가만히 서서 치르티티샤의 뒤통수를 노려보았고, 세르미네는 한숨을 쉬며 가연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아니다. 잘했어. 그래도 이제 전투에 나설 필요는 없다. 오늘은 내 실책이었어.”

하지만 그리 말하는 세르미네에게서 예전만큼의 확신에 찬 어조는 들을 수 없었다. 그 역시 가연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투에 투입해도 좋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자, 이야기는 마저 돌아가서 할까요? 부상자를 이런 산속에 세워놓는 취미는 없거든요.”

치르티티샤는 마이데에게 앞장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이데는 아직까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가연도 그를 바라보자 얼른 얼굴을 풀고 따라오라며 앞장서 산의 길을 텄다.

이제는 근처 지리에 훤한 마이데는 일부러 인적 드문 곳을 골라 걸었다. 여기저기 얼룩덜룩하게 묻은 마족의 피나 자잘한 상처들, 무엇보다 세르미네가 입은 큰 부상을 누가 보면 소동이 일어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마이데가 길 안내를 하고, 가연이 어설프게나마 세르미네를 부축해 뒤따르는 동안 치르티티샤는 가장 뒤편에서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야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치르티티샤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 나서도 되지 않아도 될 일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마이데는 가끔씩 인정이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세르미네는 그런 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세르미네를 눕힌 가연은 얼른 달려가 약과 붕대 등을 담아둔 상자를 가져왔다. 손은 움직일 수 있는 세르미네가 자신의 허리에 약을 바르는 것을 치르티티샤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가서 좀 도와주지?”

마이데가 넌지시 말하자 치르티티샤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되물었다.

“손은 쓸 수 있지 않아요? 그리 말하는 당신은 왜 가만히 있죠?”

“정말 인정 없기는.”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마이데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사이 가연은 미지근한 물을 떠 왔고, 붕대를 다 감은 세르미네는 물을 마시더니 이내 베개를 쌓아 만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좀 낫군.”

“좋아요. 그럼 루아에게 상황을 보고하러 떠나기 전에….”

치르티티샤는 세르미네의 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작게 쉬었다.

“정말 집이 엉망이군요. 게다가 전투마저 콩가루마냥 마음이 영 맞질 않으니, 역시 내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아직도 함께 살겠다는 의견을 포기하지 않은 건가?”

세르미네의 물음에 치르티티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거죠. 당신들도 내가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나요? 가령 방금 전처럼 말이죠.”

세르미네는 마이데를 바라보았다. 그가 결계로 들어오기 전 있었던 일을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치르티티샤 또한 마이데에게 직접 말해보란 눈치를 주었고, 마지못해 그는 입을 열었다.

“뭐, 맞는 말이야. 치르티티샤의 도움이 없었으면 결계 안으로 진입하는 것도 늦어졌겠지. 뭐라 딱 집어 말할 순 없어도 함께 살아서 손해 볼 건 없을 거야.”

“그래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죠?”

치르티티샤는 이번에는 가연을 향해 물었다.

“저, 저요? 저야… 세르미네 씨에게 도움이 되는 분은 더 계시면 좋을 거라 생각해요.”

“흐음.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지만, 찬성이라고 해 두죠. 자, 그럼 과반수가 찬성이니 내가 있어도 된다는 뜻이죠?”

치르티티샤는 손뼉을 딱 치며 기쁜 목소리로 그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그럼 잘 부탁해요.”

세르미네는 갑자기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건지 따지고 싶었지만, 몸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려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차피 세상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으니.

다음 날 아침부터 세르미네는 스승의 그 격언을 마음에 새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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