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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16화 (16/87)

16화

세르미네는 검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렸지만, 마이데의 치료와 그가 가진 자연치유력 덕분에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는 찰나의 시간 동안 가장 효율적인 작전을 구상해냈다. 폴라로이아처럼 근거를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작전은 짤 수 없어도, 세르미네는 기사들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자였다. 세르미네는 작전을 구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리를 굴려 어떻게 하면 가연을 그나마 부담이 적은 위치에 넣을지 생각했다.

마이데는 여전히 거미 마족에게 공격을 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약점은 파악하지 못했는지 몸통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르미네는 조용히 가연에게 다가갔다. 가연은 마이데를 올려다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지시사항 없이 스스로 전투에 참여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리슈아. 저 녀석의 발을 최대한 많이 묶어놔. 너라면 할 수 있어.”

세르미네는 가연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잡으며 조언했다. 그러자 가연은 자신이 없다는 표정으로 세르미네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가연을 달래주고자 한껏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잘 해내면 딸기타르트든 뭐든 원하는 대로 사줄게.”

가연이 리슈아였던 전생부터 세르미네가 잘 쓰던 방법이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 방법이 먹히는지 가연은 입을 오물거리며 대답할 말을 찾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한번 해 볼게요!”

“그래. 네가 마족을 속박하고 싶다고 바라면 그대로 나타날 거야.”

세르미네는 그리 설명하며 가연의 어깨를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떼었다. 그와 동시에 마이데가 저편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우물쭈물하고 있을 거야!”

그도 혼자서 마족을 상대하기엔 힘에 부쳤는지 답지 않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세르미네는 이번엔 마이데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시선을 돌리는 동안 약점을 공격해! 보면 알겠지?”

약점을 크게 말했다간 마족이 눈치채고 그곳을 더욱 강하게 보호할 수 있었다. 에둘러 말했지만 마이데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거라 세르미네는 믿었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마족을 직접 처치하는 게 아닌, 뒤에서 보조하는 역할은 세르미네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부디 이게 맞는 길이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다 해도… 이번만이야!’

그의 결심과 동시에 마이데가 마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그는 마족의 약점을 파악하고, 일격을 날리기 위해 한발 물러서서 힘을 모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그 모습을 보고는 가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리슈아. 지금이야!”

“앗, 네!”

가연은 힘차게 대답하더니 눈을 꼭 감고 팔을 앞으로 내밀어 허우적거렸다. 제 딴에는 마족을 속박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기원하는 모양이었지만, 세르미네가 보기엔 영 모양새가 아니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는 성공이었다. 마족이 정신을 차리고 한 걸음씩 천천히 앞으로 발을 떼는 순간, 가연의 손에서 검고 긴 끈이 여러 다발 뻗어 나왔다.

“우왓, 이게 뭐야!”

가연은 깜짝 놀라 손을 거두려 했다. 그러자 세르미네는 다급하게 가연을 향해 말했다.

“괜찮아, 잘했어! 그대로 적을 묶고 싶다고 바라면 돼!”

세르미네의 말에 가연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검은 끈은 가연의 의지대로 움직여 거미 마족의 앞쪽 네 다리에 칭칭 감겼다. 가연은 잠시 놀란 듯 바라보다가 이내 그 끈을 꽉 잡고 두 손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세르미네의 기억 속 리슈아는 완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또한 아틀란티스의 기사, 그중에서도 정예 기사였다. 아무리 환생해 기억이 없다고는 하지만 힘이 깨어난 가연이라면 중급 마족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아무리 가연이 움직임을 봉인했다고 하더라도 약점인 눈에 다가가는 순간 마족은 입에서 부식액을 뿜어 공격할 게 뻔했다. 세르미네는 그 공격을 막는 역할을 자처하기로 했다.

“여기를 봐!”

세르미네는 마족의 주변에 하얀색의 강한 번개를 끊임없이 일으켰다. 마족도 그 번개의 원흉이 세르미네라는 걸 알았는지 빨간 눈으로 그를 보더니 예상대로 부식액을 뿜어냈다.

“어림없지!”

세르미네는 얼른 검에 꽂힌 수호석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는 등에 돋아난 날개를 이용해 날아올라 마족의 공격을 유인했다. 최대한 마이데와 리슈아에게서 멀리 떨어진 그는 검기를 두른 검으로 부식액을 받아치고, 막아가며 마족이 자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부상 입은 세르미네의 몸으로 무한정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마이데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저기가 약점이란 말이지….”

마이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주변이 푸른색 빛으로 넘실거렸다. 마이데는 온 힘을 한 번에 끌어내 세르미네가 검에 검기를 싣듯 도끼의 날을 푸르게 물들였다.

“마이데! 서둘러!”

팔 끝을 아슬아슬하게 부식액이 스치고 지나가자 세르미네는 거칠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내려다보니 가연 또한 슬슬 힘에 부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젠장, 알고 있어! 간다!”

마이데는 발을 떼더니 마족의 정수리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도끼의 날을 정확히 마족의 붉은 눈을 향하게 했다. 다음 순간, 두 손으로 쥔 도끼를 정확히 목표를 향해 내리꽂으니 마족의 눈을 중심으로 아예 몸이 두 쪽으로 쩍 갈라졌다.

“이런, 힘을 너무 실었나 보군.”

바닥에 착지한 마이데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임과 동시에 가연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 사, 살려줘요!”

거미 마족이 죽으면서 잡아당기던 힘이 없어지자 가연의 몸이 뒤로 쏠렸다. 바둥거리며 넘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막는 가연을 세르미네가 얼른 다가가 잡아주었다.

“아이고, 아이고야….”

가연이 세르미네의 품에 푹 쓰러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보라색 빛이 번쩍이더니 리슈아의 옷 대신 원래 입고 있던 옷을 걸친 가연이 나타났다. 아마 힘도 동시에 사라졌을 거라고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숙주인 거미 마족은 쓰러졌지만, 아직 거기에 기생하고 있던 정신계 마족은 해치우지 못했다.

숙주를 잃은 정신계 마족은 거미 마족의 시체에서 스멀스멀 빠져나왔다. 불길한 짙은 녹색의 기체가 허공을 맴돌자 세르미네는 반사적으로 가연을 자신의 몸 뒤에 숨겼다.

“저 녀석, 또 우리의 약점으로 모습을 바꿀 셈이군!”

그리 말을 내뱉은 세르미네의 머릿속에 묘책이 하나 스치고 지나갔다. 부상 때문에 활을 쏠 수 없기에 찾은 방법이었다.

“리슈아. 최대한 뒤로 물러서 있어.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반경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만.”

세르미네는 가연이 정신 계열 마족에게 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가연에게서 어떤 마음의 상처를 보고 비출지는 모르지만, 유쾌하지는 않은 기억일 게 뻔했다. 그런 걸 감당하는 건 자신과 마이데만으로도 족했다.

가연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세르미네는 자신의 옆에 빛으로 이루어진 단검 여섯 개를 띄웠다. 그리고는 마이데를 향해 말했다.

“저 녀석의 시선을 번갈아 가며 끌자. 내가 먼저 할 테니 그 틈에 공격을 퍼부어!”

세르미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도 허상이 나타나면 다시 무너지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빛의 단검을 하나 날렸다. 뭉쳐진 녹색 기체에 단검이 꽂히자 화살보다는 약해도 마족의 몸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족이 세르미네를 보았다. 이내 기체가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아까도 보았던, 녹아내리는 리슈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르미네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마이데, 어서!”

“알았어! 이런 기분 나쁜 녀석 따위!”

그 형상은 마이데에게 있어서도 큰 상처와 다름없었다. 마이데 역시 리슈아의 형상에 직접 도끼를 내리긋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대신 마이데는 도끼를 던져 한 면의 날이 가짜 리슈아의 등에 꽂히도록 했다.

그러자 마족은 이번엔 마이데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리슈아의 형상도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이내 다시 뭉쳐 한 여성의 모습이 되었다. 세르미네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죽은 마이데의 아내, 세타였다.

마이데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마족이 모습을 바꾸는 시간 동안 보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모습은 변했어도 그들이 준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단검은 처음 세르미네가 상처 낸 자리의 바로 아래쪽에 꽂혔고, 마족에게 일어난 균열은 더욱 커졌다.

세 번이나 공격을 맞자 마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 사람씩 공략해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마족은 공간 전체를 변화시키려 몸을 크게 틀었다.

검게만 보이던 공간에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가연은 처음 보는 광경에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그곳이 어디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처, 리슈아가 죽었던 장소였다.

“안 돼! 멈춰야 해!”

공간 전체가 변하면서 주는 정신적 상처는 인물 하나만이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컸다. 그것을 조금 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세르미네는 다급히 검을 뽑고는 검기를 둘렀다.

“이번 공격으로 끝내겠어!”

세르미네는 눈앞에 보이는 리슈아를 향해 검을 날렸다. 폐허가 된 고성으로 달려가려던 리슈아, 아니 리슈아의 모습으로 변한 정신계 마족은 날아오는 검기를 막으려 입을 뗐다.

“세르미네, 나를 공격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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