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세르미네 씨! 정신 차려요! 일어나 봐요!”
가연의 목소리가 마치 물 밑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왔다.
세르미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깨와 허리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날카롭게 머리끝까지 전해졌다.
“윽…!”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와 세르미네는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새빨간 피가 손바닥을 가득 적시고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괜찮아요, 세르미네 씨? 정신이 들어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가연이 세르미네의 머리를 무릎에 받치고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가연의 뺨을 쓰다듬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저, 저 마족은….”
마족이 발을 딸깍거리며 키이이, 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가연은 어깨를 떨며 세르미네와 마족, 그리고 부러진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괜…찮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세르미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싸울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간신히 검으로 한 번 막아 공격을 흘려넘긴 덕분에 치명상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에 입은 부상으로는 무기를 휘두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검까지 부러졌다. 힘이 회복되어 무기가 온전히 돌아오려면 최소한 이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만 했다.
“제가 리슈아였다면… 힘이 있었다면…!”
가연은 자신의 무력함을 탓했다. 분명 리슈아라면 이 상황에서 세르미네의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기사도, 전생의 기억도 없는 자신은 그저 짐만 될 뿐이었다.
기억 따위 아무래도 좋다, 자신은 리슈아가 아니라 주가연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가연이었다. 그렇기에 세르미네에게 왠지 모를 끌림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세르미네는 자신을 위해 몸을 내던졌다. 가연은 이토록 마음이 아팠던 적이 없었다.
세르미네는 가연에게 도망갈 마지막 틈이라도 만들어 주기 위해 온 힘을 손에 집중했다.
“도망가, 리슈아. 아니 가연아. 이번에는 너를 꼭 구하고 말겠어.”
그의 손이 하얗게 빛나자 가연은 세르미네에게 언성을 높였다. 목소리는 이미 울음으로 범벅이 되어 반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말아요! 혼자 살아남으면 무슨 소용인데요! 세르미네 씨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정곡을 찔린 세르미네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연은 그사이 주머니에서 수호석과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을 켠 그는 단축 번호와 통화 버튼을 누르더니 이내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아마도 마이데에게 연락을 했겠지, 하고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초승달 모양의 보라색 보석을 손에 쥔 가연은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내가 리슈아라면, 진짜로 리슈아라면 제발 부탁이니 힘을 줘요! 이번엔 내가 세르미네 씨를 도와주고 싶어요! 구하고 싶어요!”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이 안쓰러웠다. 그는 리슈아의 각성을 바라긴 했지만, 기적은 믿지 않았다. 차라리 마이데가 오는 걸 기다리는 게 나을 거라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하지만 수호석은 가연의 편이었다. 가연이 손에 쥔 수호석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더니 이내 검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광채가 그의 손을 뒤덮었다.
“세르미네 씨? 이, 이게 뭐예요?”
세르미네도 이 현상을 알고 있었다.
기사 서품을 받고 수호석이 하사되면 늘 있는 관례였다.
수호석과 기사의 공명. 그 절차를 거쳐 수호룡의 힘은 기사에게 귀속되었다.
“가연아. 수호석에 의지를 담아 높이 들어 올려!”
세르미네의 말과 함께 거미 마족이 그들을 다시 덮쳐왔다.
가연은 반사적으로 수호석을 든 손을 위로 치켜들었고, 그러자 공간 속의 기분 나쁜 암흑을 몰아낼 진짜 어둠이 가득 흘러나왔다.
그 힘은 가연의 모습을 변하게 했다. 마치 만화 속 등장인물의 변신처럼 손끝부터 어둠의 힘에 뒤덮인 가연은 이내 눈에 익은 모습으로 변했다.
다름 아닌 리슈아의 모습이었다.
“으악, 이, 이게 뭐야!”
가연의 비명을 신호처럼 거미 마족이 다시 발을 치켜들고 그들을 내리찍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들을 보호해준 방어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푸른 방어막을 보자 가연과 세르미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마이데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괜찮아? 연락받고 왔더니 이게 무슨….”
눈치가 빠른 마이데는 전화 너머 들린 소동에 금세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는 부상 입은 세르미네를 보고 한 번 놀라고, 가연의 모습을 보고 두 번 놀랐다.
우선 자신이 가진 미약한 치유의 힘으로 세르미네의 상처에 응급처치를 한 마이데는 그를 안전한 곳에 숨도록 했다.
“나도 싸울 수 있다.”
세르미네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마이데는 보기 드물게 단호했다.
“무리하다가 목숨을 잃으면 리슈아가 좋아할 리 없잖아.”
조금 전에 가연을 혼자 내보내려 했던 자신이 떠올라 세르미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마이데는 가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단하네. 보니까 온전히 리슈아가 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지금 당장은 싸울 수 있겠어.”
“저, 저도 싸울 수 있나요?”
가연이 묻자, 마이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무기인 전투 도끼를 보여주었다.
“우선 무기를 불러내. 네가 싸우고 싶다는 의지를 다지면 손에 무기가 나타날 거야.”
마이데는 자신이 전투를 보조하겠다며 가연을 안심하게 했다.
“내가 지시할 테니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해. 우선 리슈아는 방어와 속박 마법이 특기였어. 그건 알아둬.”
마이데가 도끼를 찍어 내릴 기세로 달려 나가자 가연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 싶었는지 눈을 꼭 감았다.
“무기, 무기… 리슈아의 무기….”
그러자 손에 길쭉하고 검은 형태가 나타나더니 이내 큰 낫의 모양을 드러냈다.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낫을 보자 가연은 다시 놀라 하마터면 무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 이런 위험한 물건이…!”
“그게 리슈아의 무기다! 뛰어올라 적을 공격해!”
세르미네의 외침에 가연은 황급히 무기를 다잡고 발을 들어 점프를 시도했다.
그러나 소심한 도약과는 다르게 몸이 마족의 몸통 위까지 올라 한 바퀴 빙글 돌자 가연은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보다 못한 마이데가 가연의 허리를 잡고 땅에 착지했다. 그는 하는 수 없지, 하고 웃으며 가연에게 다음 지시를 했다.
“수호석을 무기에 끼우면 날개가 생길 거야. 그편이 낫겠네.”
“이걸 이렇게요?”
가연은 낫과 손잡이 이음새에 있는 홈에 수호석을 끼운 뒤 세르미네가 했던 대로 한 바퀴 돌렸다.
그러자 등에 마치 천사 날개 같은 모양의, 하지만 검은색의 날개가 한 쌍 돋아났다. 제 의지대로 파닥파닥 움직이는 날개가 신기했던 모양인지 가연은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한 번 발을 떼고 날아보았다.
“와, 세상에! 하늘을 날 수 있다니!”
“잘했어! 이제 무기를 들고 마음껏 휘둘러봐!”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동시에 칭찬하자 가연은 자신감을 얻은 모양이었다. 더 이상 겁먹어 우는 소리를 내지 않고 날아가더니 제 딴에는 열심히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공격의 대부분은 마이데 몫이었다. 그가 도끼로 다리 하나를 쓰러뜨리고, 몸에 도끼로 흠집을 내는 동안 가연은 눈을 꼭 감고 에잇, 하는 소리와 함께 낫을 허공에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을 탓하지 않았다. 이전 같으면 쓸데없이 나서지 말라 했을 그였다.
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각성 상태로 저렇게 애쓰는 가연의 모습과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며 외치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마족은 아무래도 마이데보다 가연이 더 약하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마이데의 공격을 막아내며 마족의 입은 가연을 향해 돌아갔다. 곧 그 입에서 지난밤 보았던 부식액이 가연을 향해 튀어나왔다.
“위험해! 방어막을 펼쳐!”
세르미네의 외침에 가연은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네모 모양의 반투명한 막이 손을 중심으로 생겨나 부식액을 완전히 막아냈다.
그 사이 마이데는 도끼로 거미의 몸통을 가르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순간, 세르미네와 가연도 똑똑히 보았다. 거미의 몸통 위에 녹색의 불길한 기운이 서리더니 이윽고 한 사람의 형상을 이뤘다.
“세타?”
마이데의 움직임이 멈췄다.
세르미네도 그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마이데가 인간이던 시절의 아내 이름이었다.
“젠장. 저 바보가!”
마이데가 위기에 처하자 세르미네는 손에서 하얀 단검을 뽑아내 거미 마족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바로 뒤이어 번개로 몸통을 후려치자 환상은 스륵, 모습을 감췄다.
그제야 세르미네는 마족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거미는 숙주였다. 정신 계열 마족이 중급 마족에 기생하는 형태로 나타나 함께 협동 작전을 펼치며 결계를 깔아두었고, 자신들은 거기에 걸려든 것이었다.
‘이제 반격할 때이군.’
세르미네는 다짐했다. 폴라로이아가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최소한 어떤 적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파악했으니 그에 맞게 대처하면 승산이 있었다.
마이데가 정신 공격을 멈춘 거미 마족에게 공격을 가하는 동안, 세르미네는 거미의 약점을 재빠르게 파악했다. 입 위에 달린 여덟 개의 작고 빨간 눈. 저곳이 분명 약점이었다.
다른 사람과 협력해 적을 쓰러뜨리는 것은 탐탁지 않던 세르미네였다. 괜한 방해가 될뿐더러 그는 눈앞에서 어떠한 희생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신념이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과연 무엇이 옳은지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