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의 루드베키아-9화 (9/87)

9화

마족이 사라지면서 견고하던 결계도 차츰 연기처럼 옅어졌다.

본래 세계와 결계가 한데 뒤엉켜 일그러지나 싶더니 세르미네의 귓가에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세르미네와 가연, 그리고 마이데는 역의 입구에 서 있었다. 마족 소동은 모르는 듯 사람들은 제 갈 길을 오가기에 바빴다.

“결계가 사라졌네.”

마이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그 사실보다도 가연의 손 위에 놓인 수호석이 더욱 신경 쓰였다. 가연 또한 갑자기 나타난 신기한 보석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겨버렸다.

“이게 대체 뭐에요?”

“이건….”

가연의 물음에 세르미네가 수호석에 대해 설명해주려는 차에 마이데가 그 사이를 끼어들었다.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엔 길어질 텐데, 어디 카페라도 좀 갈까?”

카페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세르미네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 자리에서 또 마이데에게 선수를 뺏기기 싫어 그동안 주변의 유명한 카페들을 조사해둔 그였다.

“그럼 이번엔 내가 안내하지.”

세르미네는 앞장서서 역 위의 번화가로 걸어갔다. 그러자 떨어져 있던 가연의 짐을 주워든 마이데가 가연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직도 수호석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가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세르미네의 뒤를 따랐다.

*

이전의 동네보다 더욱 번화한 곳인 만큼 그럴듯한 카페도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 중 세르미네는 베이지색의 간판에 멋들어지게 이름이 적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계속 수호석만 들여다보던 가연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겨우 수호석에서 눈을 뗐다. 그만큼 가게 안은 화려했고, 진열장 속의 디저트는 전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뭐든 골라. 많이 놀랐을 테니까 먹어서 풀어야지.”

마이데가 선심 쓰는 척 가연에게 말을 하자, 세르미네는 속으로 코웃음 치고는 비어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세르미네의 머릿속엔 온통 리슈아 생각뿐이었다. 수호석을 보니 더욱 옛 생각이 깊어졌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수호석을 넣은 로켓을 목에 걸고 해맑게 웃던 리슈아.

“세르미네 씨? 뭐해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세르미네는 정신을 차렸다. 접시가 가득 놓인 쟁반을 든 가연과 마이데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 중이었다.

“어디 다친 데라도 있어?”

마이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그보다….”

세르미네는 테이블 위에 접시를 하나둘 놓고 있는 마이데를 보았다. 각각 다른 디저트가 담긴 접시가 총 여섯. 그 중 세르미네의 몫도 하나 있었다.

“대체 뭘 이리 많이 산 거냐. 루아가 알면 어떡하려고 그래.”

“리슈아, 아니 가연에게 들어가는 돈은 아끼지 말라고 루아도 말했으니 괜찮아.”

마이데의 말에 세르미네는 가연을 흘긋 보았다. 딸기타르트와 커스터드 쿠키 슈, 그리고 캐러멜로 코팅한 딸기 크림 에클레어와 블루베리 파르페를 앞에 놓은 가연은 좀 전의 마족 소동은 까맣게 잊은 표정이었다.

‘뭐, 상관없나.’

세르미네는 고개를 돌렸다. 마이데의 앞에도 따뜻한 커피와 화이트초콜릿 칩이 박힌 버터 쿠키가 놓여 있었다. 향을 맡아보니 안티구아를 베이스로 카페의 특색에 맞게 조합한 고급 커피였다.

‘겸사겸사 제 사리사욕도 챙기는군.’

세르미네는 내심 못마땅했지만 굳이 여기서 마이데의 천성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르미네는 가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딸기타르트를 연신 잘라 먹는 모습이 그의 눈에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맛있는가?”

“네. 세르미네 씨도 드셔보실래요?”

가연이 포크에 딸기를 푹 찍어 세르미네에게 건넸다.

‘저 소중하다는 딸기를 나에게 주다니….’

옛날, 딸기 바구니를 끌어안고 세상 제일가는 보물이라도 얻은 듯 기뻐하던 리슈아가 떠올랐다. 그만큼 리슈아는 딸기를 좋아했고, 가연이 그 딸기를 나누어주자 세르미네는 조금 전 결계 속에서 얻은 설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연의 소중한 딸기를 덥석 받아먹기엔 미안했다.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네가 많이 놀랐을 테니 먹고 기분 풀어라.”

그 말에 갈 곳 잃은 딸기가 잠시 멈칫, 하더니 이내 가연의 입으로 쏙 들어갔다. 세르미네는 만족스럽게 바라보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보다 리슈아. 수호석을 좀 꺼내 보지 않겠나?”

“이거요?”

그러자 가연이 재킷 주머니에 소중히 넣어두었던 초승달 모양의 보석을 꺼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반사해 보라색으로 빛나는, 상당히 예쁜 보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게 대체 뭐에요?”

가연의 물음에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마이데가 달칵, 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수호석이야. 기사들에게는 힘의 원천이자 상징과도 같은 거지.”

그러더니 마이데는 세르미네에게 설명을 이으라며 신호를 보냈고, 세르미네는 자신의 펜던트에서 둥글고 하얀 보석을 꺼내 가연의 수호석 옆에 나란히 놓았다.

“이건 내 수호석이다. 빛의 수호룡이 잠든 수호석이지.”

“그리고 이게 내 거. 물의 수호룡이 잠든 물의 수호석이야.”

옆에서 마이데가 손가락으로 물방울 모양의 푸른 보석을 집어 가연에게 보여주었다. 가연은 그 두 개를 번갈아 보다가 궁금한 것을 세르미네에게 물어보았다.

“빛의 수호룡에, 물의 수호룡이라니. 무슨 속성이 있나 봐요? 게임처럼 말이에요.”

“게임은 아니지만 네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기사들은 대부분 서품을 받을 때 자신의 힘에 맞는 속성까지 부여되지.”

“그럼 여기엔 어떤 수호룡이 잠들어 있어요?”

가연이 보라색 수호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둠의 수호룡이다. 리슈아는 어둠의 기사였지.”

“힉, 어둠이라뇨. 그럼 막 성격도 이상하고…. 아무튼 안 좋은 것 아니에요?”

가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자신의 수호석을 펜던트에 넣었다.

“그런 건 다 인간의 편견이다. 어둠이든 빛이든 그저 속성에 지나지 않아.”

“맞아. 리슈아가 얼마나 귀여웠는데. 그리고 빛의 속성이라고 해서 성격이 좋은 게 아닌 건 세르미네를 보면 알잖아.”

옆에서 마이데가 농담조로 끼어들자, 세르미네는 그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흠, 아무튼 수호룡이 잠든 수호석은 기사들의 힘을 증폭해주는 역할을 한다. 기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돌이지.”

“그럼 이게 나타났다는 건 제가 드디어 기사가 됐다는 건가요?”

기대 반 우려 반의 목소리로 가연이 세르미네를 향해 물었다. 파르페를 떠먹던 작은 스푼이 크림 위에서 멈춘 걸 보며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모양이다. 처음 수호석을 봤을 땐 나도 기대했지만… 아직 힘이 발현하지는 않았어.”

“그럴 수가….”

가연은 풀죽은 얼굴로 다시 손을 움직여 스푼으로 파르페를 뒤적였다.

“기대하고 있었나 보구나?”

마이데의 물음에 가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세르미네는 자신 앞에 놓인 페퍼민트 티를 한 모금 마시고는 위로랍시고 말을 건넸다.

“수호석이 나타났으니 절반은 온 거나 다름없어. 나머지 방법은 내가 찾아보도록 하겠다.”

세르미네의 말에도 가연은 기분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시험 때문에 복잡한 거겠지. 마족도 나타났고….’

세르미네는 가연의 심정을 짐작해보았다. 벌써 오후였다. 늦가을의 해는 벌써 지평선 가까이 기울어 있었다. 오늘 해야 할 시험공부를 못 하게 된 가연의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디저트를 산더미처럼 먹고 난 뒤 저녁 식사로 샐러드 바 뷔페까지 다녀오자 그제야 가연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나서 세르미네와 가연은 집으로 돌아왔고, 가연은 조금이라도 시험공부를 하겠다며 방에 틀어박혔다. 마이데는 잠시 아틀란티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세르미네는 그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벼운 운동을 하고, 반신욕으로 몸을 풀어준 다음 독서를 하다 잠드는 게 그의 일과였다. 특별한 사정이 없고서야 일과를 지키지 않는 건 세르미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밤늦은 시간, 가연에게 잠을 자야 한다고 잔소리를 한 뒤 세르미네는 독서에 빠져있었다. 한창 책에 빠져있던 그의 귀에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이 시간에 누구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발신자를 보니 마이데였다. 세르미네는 받을 가치도 없다 생각해 전화기를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메시지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중요한 용건인가 싶어 세르미네는 휴대폰을 켰다. 그러자 짤막한 한 문장이 적힌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1층에 있는 선술집으로 와.]

발신자는 역시나 마이데였다. 이미 읽은 이상 못 본 척 무시할 수도 없어 세르미네는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사는 아파트는 주상복합으로 1층부터 5층까지는 상가 건물이었다. 온갖 가게로 하나의 쇼핑몰을 이루는 그 상가의 1층에 마이데가 말한 선술집이 있었다.

세르미네 역시 술을 좋아했기에 가게에 들어서는 건 부담이 없었다. 마이데가 미리 일러두었는지 점원은 세르미네를 보자마자 마이데가 기다리는 자리로 안내했다.

“왔어?”

만석을 이루는 테이블 중 가장 구석 자리에 마이데가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자신도 같은 것을 가져다 달라 부탁하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 시간에 사람을 불러놓고는 변변치 않은 이야기면 가만 안 두겠다.”

“우와, 무서워라. 그렇게 인상 쓰지 말고 이것 좀 먹어봐.”

마이데는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각종 꼬치구이가 담긴 접시를 세르미네 쪽으로 내밀었다. 세르미네는 고기 꼬치를 하나 자신의 앞접시에 가져왔지만, 여전히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내가 아무려면 별 이유도 없이 널 불렀겠냐. 다른 게 아니라 리슈아, 그러니까 가연이 때문에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

그리 말하는 마이데의 안경 너머 눈빛에는 장난기가 싹 지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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