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세르미네 씨, 마이데 씨를 불러요!”
가연은 그저 마이데와 함께 마족을 물리치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그의 입에서 마이데의 이름이 나오자 아까 전처럼, 아니 그보다 더욱 심장이 조여들었다.
‘왜, 어째서 그 녀석을 찾는 것이냐, 리슈아!’
고작 세 음절의 단어가 자신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기껏 자존심을 굽히고 마이데의 충고를 들었건만,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네게 마이데는 대체 무엇이냐! 나보다도 더 믿음직하단 말이냐? 나를 봐, 그 녀석은 필요 없어!”
무력함이 말이 되어 꽉 다문 이빨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세르미네의 의지를 담은 검이 더욱 새하얗게 불타올랐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타오르는 검을 앞으로 향하게 했다. 단 한 번의 검기로 승부를 낼 심산이었다.
“가라, 빛의 수호룡이여! 내 앞에 길을 만들어라!”
그의 명령을 받아 검기에 실린 수호룡은 회색빛 바다를 가르고 가연이 갇힌 상자까지 뻗어나갔다. 이대로 반투명한 상자까지 부수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힘이 부족했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욱 넓어진 길만으로도 세르미네는 충분했다.
수호룡의 힘이 회색 액체를 밀어내는 동안 세르미네는 다시 한번 상자를 향해 뾰족한 검 끝을 세웠다. 그러나 완력이 부족했는지 검을 찔러 넣어도 상자에는 금조차 가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수호룡의 힘이 서서히 다해가고 있었다.
“세르미네. 그러니까 혼자서 해결하지 말라고 했잖아.”
세르미네의 귓가를 듣기 싫은 목소리가 강하게 때렸다. 그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려다보니 상자 위에 마이데가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자신의 몸집만 한 전투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선 마이데는 세르미네를 향해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이 세르미네는 몹시 못마땅했다. 하지만 공격을 위해 펼친 빛의 수호룡은 힘이 다해가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여태 버틸 수 있는 건 마이데가 그 위에 물의 수호룡으로 힘을 더했기 때문이었다. 분하지만 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마이데는 물의 기사였다. 물 뿐만 아니라 액체 성질을 가진 모든 걸 조종할 수 있었고, 마족의 성질이 물이라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때문에 양쪽으로 회색 액체를 밀어내는 수호룡의 힘은 단순히 두 힘을 더한 정도가 아니었다. 더욱 견고한 힘으로 길을 터낼 수 있었고, 그 영향을 받아 상자가 바닥에 잠기는 속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수호룡으로 길을 유지해줘, 세르미네! 이 상자는 내가 부술게!”
자신만만하게 외친 마이데는 상자를 지지대 삼아 높이 뛰어오르더니 날카로운 도끼날을 빛내며 하강했다. 그의 도끼가 상자에 부딪히자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쩌적, 하고 상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이데는 또한 기사 중 힘이 가장 강했다. 단순한 근력만으로는 세르미네를 훨씬 상회하는 힘이었으니 여유롭게 상자를 부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가연아! 파편이 튈 수 있으니 머리를 막아!”
“네, 네?”
도끼를 찍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마이데가 가연을 향해 외쳤다. 가연은 당황해 머리를 막을 만한 물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가방은 잡혀 오면서 어딘가에 떨어뜨렸고, 들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반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가연을 마주한 세르미네 역시 놀고 있지는 않았다. 그도 검으로 상자 끝을 찌르고는 온 힘을 다해 칼날을 박아 넣고 있었다. 때문에 천장과 벽에 금이 쩍, 하고 깊게 파이자 가연은 하는 수 없이 재킷을 벗어 머리에 뒤집어썼다.
이윽고 상자의 벽이 완전히 산산이 조각났다. 그와 동시에 회색 액체가 사라지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같은 색의 팔을 무수히 가진 곤충 형태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이군!”
마이데가 부서진 상자 속에서 가연을 꺼내자 세르미네는 몸을 돌렸다. 마족을 상대할 차례였다.
마족은 하나, 모습이 흡사 사마귀를 닮은 중급 마족이었다. 다만 팔이 비정상적으로 많았는데, 끝에 달려있던 사람 모양의 손이 흐물흐물하게 녹더니 온갖 무기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우습지. 간다!”
세르미네는 스스로 느낀 설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족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지, 세르미네는 거들떠보지 않고 그의 공격을 검으로 변한 팔 하나로 막아섰다.
마족이 노리는 건 가연과 마이데였다.
마이데는 절반 이상 땅 밑으로 박힌 상자로 들어가 가연에게 손을 뻗었다. 파편이 떨어지는 것을 옷으로 막고 있던 가연이 마이데의 손을 잡자, 가벼운 가연의 무게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마이데는 높이 뛰어 깨진 천장을 뚫고 나갔다.
그 틈을 마족은 노리고 있었다. 온갖 무기를 든 팔 중 낫을 든 팔이 가연의 몸을 가를 기세로 다가왔다. 횡으로 휘두르는 그 낫을 공중으로 뛰어오른 마이데가 피할 재주는 없었다. 세르미네와는 다르게 마이데는 수호석의 힘을 깨워도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나….”
짧은 시간 동안 마이데는 최선의 판단을 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운명을 운에 맡겨보기로 했다.
마이데는 가연의 손을 놓았다. 그 사이로 마족의 낫이 지나간 덕에 가연의 몸이 두 동강 나는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이었다.
마이데조차 날지 못하는 하늘을 가연이 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연스럽게 가연의 몸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으악!”
“마이데 저 녀석, 무슨 짓을!”
가연의 비명에 세르미네가 달려가려 했지만, 마족의 다른 팔들이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저리 비켜!”
검을 휘두를 시간도 아까웠다. 세르미네는 손에서 하얀 번개 줄기를 뽑아내 마족을 향해 거칠게 던졌다. 이걸로 움직임을 봉한 뒤 가연에게 달려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연에게 달려가기 전, 뜻밖의 기적이 일어났다. 떨어지면서 살려달라는 말을 염불처럼 외던 가연에게서 보라색 빛이 번쩍였다.
“저, 저게 뭐야!”
순간 당황해 세르미네가 내뱉었지만, 그 광채는 세르미네와 마이데 모두에게 익숙했다. 다름 아닌 리슈아가 힘을 발휘할 때 무기에 서리던 기운이었다.
그와 동시에 가연의 몸이 반 바퀴 공중에서 돌더니 발부터 땅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바로 마이데가 노린 것이었다.
아틀란티스의 기사는 본래 불로불사의 몸이었다. 게다가 꽤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 좀 전의 높이에서 떨어진다 한들 죽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죽지는 않으나 부상은 입는다는 점과 가연은 아직 각성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마이데는 가연의 안에 잠든 리슈아의 힘에 기대기로 했고, 작전은 성공이었다.
“마이데,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나 작전이 성공했다고 해서 세르미네의 분노까지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그런 그를 마이데가 식은땀을 흘리며 진정하게 했다.
“어차피 루아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면 혼날 텐데, 굳이 두 번 혼낼 필요는 없잖아.”
루아의 이름이 나오자 세르미네도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의 조용한 질책은 위력이 상당했다. 아틀란티스의 기사 중 그 앞에서 태연할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두고 봐.”
세르미네는 그 말만 남기고 마이데에게 가연을 보호하도록 했다. 그 사이 마족이 곤봉을 든 팔로 공격을 시도했고, 세르미네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가연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이상 이제 마음에 걸릴 것이 없었다.
중급 마족이긴 해도 형체를 드러내고 힘으로 공격하는 자라면 세르미네 혼자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었다. 비록 마이데보다 근력은 다소 약하지만, 세르미네는 멸망에서도 살아남은 정예 기사였다. 밸런스가 갖춰진 신체 조건과 잘 훈련된 기술, 이것이 세르미네의 강점이었다.
그는 빠르게 마족의 약점을 파악했다. 수많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마족이 가진 무기는 전부 근접해서만 공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즉, 원거리에서는 방해받지 않고 자신이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세르미네는 쥐고 있던 검을 활로 바꿔 들었다. 그의 무기는 두 가지, 대검과 활이었다. 검만큼 익숙하게 사용하진 못했지만, 세르미네는 활 솜씨도 수준급이었다.
그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그러자 손에서 하얀빛의 화살이 나와 장전되었고, 세르미네는 마족의 몸이 아닌 머리 위를 향해 화살을 쏘아 보냈다.
“빛의 수호룡이여, 적을 섬멸할 화살의 비를!”
마치 주문 같은 말과 동시에 화살이 마족의 머리 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수히 많은 하얀 화살이 생겨나더니 마족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피할 곳은 없었다. 마족이 비명을 지르자 세르미네는 화살을 하나 더 장전했다. 아까보다 더욱 크고 무거운 화살이었다. 화살의 비를 가로지르는 육중한 그 화살이 마족의 몸을 꿰뚫자, 비명이 더욱 날카롭고 거세졌다.
마이데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화살의 비가 멎자, 그는 얼른 달려가 도끼로 마족의 팔을 연달아 세 개 떨어뜨렸다. 그가 본래 가진 막강한 근력과, 수호석의 힘이 서린 도끼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몸통이 화살에 뚫리고, 팔까지 잃은 마족은 이전의 기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육체에 입은 치명상 때문에 몸의 민첩함이나 힘이 상당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 마족에게 세르미네가 결정타를 날렸다. 다시 검으로 바꾼 무기로 마족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대각선으로 쭉 내리그으니, 마족은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둘로 갈라졌다.
조금 전까지 회색의 액체로 가득하던 바닥은 이제 검은 마족의 피로 흥건했다.
“리슈아, 괜찮나?”
마족이 죽은 것을 본 세르미네는 몸을 돌려 가연을 향해 달려갔다. 어차피 뒤처리는 마이데가 확실히 해둘 것이었고, 그에게 가연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가연은 멍하니 서서는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멀리서 살피니 가연에게 별다른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세르미네는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했다.
“세르미네 씨, 이것 봐요!”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가연은 손을 내밀어 자신이 보고 있던 것을 세르미네에게도 보여주었다.
세르미네는 가연의 작은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놀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찾을 방도를 모색하던 물건이 바로 가연의 손 위에 있었다.
“드디어 찾았어…!”
“이게 뭔지 아세요?”
가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도 잊어본 적이 없는 물건, 세르미네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보라색의 초승달 모양 보석.
다름 아닌 리슈아의 수호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