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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7화 (7/87)

7화

대책을 생각해내거나 작전을 짤 겨를은 없었다. 세르미네는 바로 몸을 날려 역 안을 까맣게 뒤덮은 마족의 결계로 들어갔다.

‘리슈아…!’

살려달라는 가연의 목소리가 귓가를 다시 한번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환상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결계 속으로 들어간 세르미네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그러자 공중에 붕 떠 있는다 싶던 발이 단단한 바닥을 탁, 하고 디뎠다. 그가 자세를 잡고 착지하자 보인 건 거대한 미로였다.

“이, 이게 뭐야?”

순간 세르미네는 당황한 마음을 소리로 내뱉었다. 하늘 높이 솟은 벽은 조금 전에 보았던 마족의 피부처럼 회색의 기분 나쁜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날개를 펴고 벽을 넘으려 해 보았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미로의 벽은 결계 끝까지 뻗어있어 뛰어넘을 수 없는 구조였다.

“젠장, 리슈아!”

그의 머릿속에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오래전, 이렇게 리슈아가 잡혀간 일이 있었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기억이었다. 리슈아 본인에게도 그렇지만, 세르미네에게도 그 기억은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마족에게 잡혀간 가연이 겹쳐 보이자 세르미네는 마음이 급해졌다. 작전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검기가 어린 자신의 대검을 벽을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쾅, 하고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무너진 것처럼 미로의 벽이 갈라져 작은 파편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곧 리슈아를 구할 수 있겠지.”

세르미네는 벽을 전부 부술 요량으로 검을 마구 휘둘렀다. 방향을 알 수 없으니 그로서는 최선이었다. 어차피 역을 결계의 매개로 삼고 있다면 그 크기는 그리 크지 않을 테니 힘이 부족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세르미네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검을 열심히 휘둘렀지만, 몇십 분이 지나도록 미로의 중심이나 출구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째서? 역을 매체로 삼았다면 이렇게 커다랄 리가… 설마!’

그제야 세르미네는 마족이 매체로 삼은 것은 하나의 역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마족은 지하철 선로와 그다음 역, 또 다음 역까지도 매체로 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작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직 힘은 충분했고, 가연을 구할 수만 있다면 무리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리 마음먹고 다시 검을 앞으로 세운 그때, 긴 하얀 재킷의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단음의 착신 소리가 미로 안을 요란하게 울렸지만, 세르미네는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가연을 구하는 일만이 최우선이었다. 사사로운 용건의 전화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착신 음은 끊기자마자 이내 다시 울렸고, 그 일이 세 번쯤 반복되자 세르미네도 결국 휴대폰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마이데였다.

“세르미네, 잘 있어? 별일 없지?”

“끊어.”

딱 두 음절의 말만 내뱉고 세르미네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가연이 납치되었는데 별일이 없냐는 그 물음도 화가 났지만, 마이데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세르미네의 바람이 무색하게 몇 분이 지나도록 가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만이 더해지는 와중에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뭐야!”

화가 솟구친 세르미네는 거칠게 휴대폰 너머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휴대폰 너머 마이데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진정해, 세르미네. 루아가 마족의 낌새를 느꼈다고 전해줬어. 미로 안이지?”

루아의 이름이 나오자 세르미네의 머릿속이 단번에 식었다. 그녀가 듣고 있는 앞에서는 함부로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세르미네는 잠자코 마이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벽을 한쪽 손으로 짚고 가다 보면 출구가 나올 거야. 하지만 가연이 꼭 출구에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 기척을 느껴봐. 내가 곧 갈게.”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며 세르미네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이 정도 일도 혼자 처리하지 못해서는 리슈아를 앞으로 지킬 수 없다, 오로지 그 마음뿐 이었다.

세르미네는 마이데의 조언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검을 휘둘러 벽을 부수고, 전진했다. 마족에게도 한계는 있고, 이 벽이 무한히 펼쳐져 있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상했다. 아무리 방향을 가늠할 수 없다지만 세르미네는 어쩐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벽을 재생한단 말인가?’

시험 삼아 그는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다시 나아갔다. 그리고 오 분가량 지났을 무렵, 바닥에 놓인 익숙한 손수건이 그의 눈에 보였다.

“젠장!”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마족은 생각보다 강했고, 벽을 재생하며 그를 더욱 견고한 미로 속에 가두고 있었다.

‘리슈아, 리슈아는….’

지금 무슨 험한 꼴을 당하고 있을지, 그 생각이 떠오르자 심장이 마치 비틀어 쥐어짜듯 조여왔다.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나아갈수록 힘만 빠질 뿐이었다.

이토록 무력한 자신을 또다시 마주하다니.

앞이 캄캄했지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셀 수도 없이 먼 옛날, 아직 정예 기사로 승격하기 전의 일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이다.’

세르미네를 가르쳤던 스승이 남긴 말이었다. 그 충고를 들었을 당시의 그는 너무 어려 말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발심과 합리화 속에 묻어두었던 그 말이 지금 되살아났다.

“하는 수 없나.”

세르미네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존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가연의 기척을 느껴보았다. 아직 힘이 깨어나지 않았을 뿐 리슈아가 가지고 있던 어둠의 힘은 가연의 안에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그것을 느껴보면 가연의 위치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마치 계시처럼, 한 줄기 빛이 그를 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살갗이 저리게 와 닿는 이 느낌은 틀림없었다. 익숙한 리슈아의 기척이었다.

생각보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세르미네는 리슈아의 기척을 이정표 삼아 달리고, 또 달렸다.

미로의 모양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제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에서 조여오던 가슴은 이제 깊은 곳에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세르미네는 모퉁이를 끊임없이 돌았다. 행여나 그의 길을 막고 있는 벽이 있다면 가차 없이 검으로 부숴버렸다. 가연이 있는 곳을 알아낸 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이윽고 다다른 곳, 미로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넓은 공터가 있었다. 사방을 마치 성벽처럼 회색 벽이 둘러싼 그 한 가운데에 가연이 갇힌 반투명한 하얀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세르미네 씨!”

그 안에서 가연이 상자의 벽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세르미네를 불렀다. 어찌나 그 벽을 두드려댔던 것인지 손 군데군데 빨갛게 부은 자국이 보였다.

“리슈아!”

세르미네는 큰 소리로 리슈아를 부르며 달려갔다. 저 정도의 벽은 자신의 검으로 단번에 부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이게 대체…!”

그러나 그는 상자까지 도달하지조차 못했다. 그가 발을 앞으로 내디딘 순간, 마치 물결이 번지듯 가연이 갇힌 상자에서부터 회색의 끈적이는 액체가 늪처럼 퍼져나갔다.

굉장히 기분 나쁜 액체였다. 색은 벽면을 이루는 마족의 몸체와 똑같았고, 재질은 끈적거리는 섬유가 촘촘히 얽힌 것 같이 보였다.

그나마 발을 디딜 땅이 늪 주변에 있어 세르미네는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액체 속으로 가연이 갇힌 상자가 천천히 잠기고 있었다. 저 액체 바닥까지 상자가 가라앉으면 가연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세르미네 씨! 여긴 위험하니 피해요!”

가연의 외침에 잠시 주춤하던 세르미네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지금 여기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검에 박힌 수호석에 자신의 힘을 실었다. 그러자 수호석이 하얗게 빛나더니 검 끝까지 빛이 일렁거렸다.

빛은 곧 날카로운 검기로 변했고, 세르미네는 검을 앞으로 향하게 하여 검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회색 액체가 두 쪽으로 갈라지며 사이로 길이 드러났다. 상자는 단단한 바닥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아래쪽 일부가 보이지 않았다.

“리슈아, 지금 구해주겠다!”

하지만 날개를 펴고 날아가던 세르미네를 막은 건 양쪽에서 뻗어 나온 회색의 손이었다. 무수한 손과 팔이 그를 잡으려 했고, 피하는 사이 갈라진 액체는 다시 길을 메우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그 후로 세 번을 더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심지어 이제는 수면 위로 팔들이 솟아났다 들어가기를 반복했고, 가연이 갇힌 상자는 벌써 삼분의 일이 바닥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세르미네 씨! 전 괜찮으니까, 피해요!”

상자가 자신의 허리 높이까지 잠기자 가연은 세르미네를 걱정하며 더욱 크게 외쳤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젠장!”

욕이 절로 나왔지만, 서둘러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도움은 기대하지 않았다. 스스로 할 수 있었다. 해내야만 했다.

그런 세르미네의 마음속에 가연의 한 마디가 비수처럼 꽂혔다.

“세르미네 씨, 그럼 차라리 마이데 씨를 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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