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세르미네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검을 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뱀을 닮은 남자는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는 자.
바로 리슈아를 죽인 마족이었다.
분명 세르미네 자신의 손으로 죽인지 오래였다. 그러나 저 모습을 앞에 두고 이성적인 판단은 불가능했다. 그는 검을 휘둘러 ‘듀믈레’라는 이름의 마족을 횡으로 베어버렸다.
“네가, 네가 왜!”
그러나 마족은 칼에 베이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졌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 모습에 그제야 세르미네의 이성이 차츰 돌아왔다.
‘뭐지?’
“세르미네 씨?”
갑자기 아래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르미네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가연이 막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거죠? 칼을 들고 계신 걸 보니….”
“이번에도 가위에 눌렸나?”
가연이 침대에 걸터앉자 세르미네는 검을 손에서 없앤 후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러자 가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도 몸이 아프더니 뱀 같은 남자가… 그래도 오늘은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요.”
“그렇군.”
세르미네는 방금 본 것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자 몸서리가 쳐질 만큼 끔찍한 기억이 다시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자 가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생각에 빠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일단 일어날게요.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 좀 낫겠지요.”
그러더니 가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세르미네는 가연이 일어난 사이 침대에 몸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후우, 하는 한숨과 함께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자니 가연이 귀여운 머그컵에 따뜻한 차를 담아 들어왔다.
세르미네는 컵을 받아들고 향을 맡아보았다. 꽃향기가 옅게 풍기는 차였다.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그가 향에 빠져있는 사이 가연이 방의 불을 켰다.
그리고 그 순간 가연의 방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를 세르미네는 놓치지 않았다. 가연이 메고 다니던 크로스백, 그곳으로 짙은 갈색의 그림자가 빨려 들어갔다.
‘저건…!’
그제야 모든 일의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세르미네는 벌떡 일어나 손에 검을 소환했다. 그리고는 채 가연이 말리기도 전에 가방을 향해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무, 무슨 짓이에요!”
가방이 찢겨나가자 가연이 비명을 지르며 세르미네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뒤이어 찢어진 가방에서 갈색 그림자가 스멀스멀 나오는 걸, 이번에는 가연 또한 보았다.
“정신계 마족, 이놈의 소행이었군!”
그림자는 뚜렷한 형태 없이 마치 기체가 뭉쳐진 것처럼 퍼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공중에 붕 떠서는 빙글빙글 도는 것이 썩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다.
“저게 뭐예요?”
가연이 물었지만 세르미네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하얀 번개 줄기가 나오더니 마족의 몸을 감전시켰다.
“세르미네 씨! 저, 싸우실 거면 밖에서 좀 싸워주세요!”
채 마족의 몸에 명중하지 못한 번개 줄기가 방 곳곳을 휘저으며 폭발하자 가연이 얼른 거실로 도망가며 세르미네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마도 호텔에서 본 환상 역시 이 마족의 영향을 받았던 게 틀림없었다. 가연이 가위에 눌린 것, 게다가 그의 앞에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모습이 나타난 것도 전부 이 녀석 탓이다. 세르미네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검에 박힌 수호석을 두 번 돌렸다. 그러자 무기에서 환한 빛이 나더니 꿈틀거리며 형상이 바뀌었다.
하얀빛에 뒤덮인 채 위아래로 늘어난 무기는 빛이 사라지자 멋들어진 활이 되어 있었다. 금으로 용이 조각된 하얀 활에 세르미네는 빛의 화살을 만들어 꽂았다.
“빛의 수호룡이여, 바위도 꿰뚫는 힘으로 적을 섬멸하라!”
외침과 동시에 화살을 쏘았다. 그러자 마족의 한복판에 빛의 화살이 날아가 꽂혔다.
바위조차 뚫는다는 화살은 정신 계열 마족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화살이 꽂힌 부분부터 금이 가듯 마족의 사방으로 하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판을 낼 심산으로 세르미네는 다시 수호석을 반대 반향으로 두 번 돌렸다. 검의 모습으로 바뀐 무기를 치켜들자 가연이 소리 높여 비명을 질렀다.
“세르미네 씨! 나가서, 나가서 싸워요!”
그러나 세르미네는 그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검풍이 사방에 일며 방 안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목적이었던 마족은 연기가 바람에 증발하듯 사방에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끝났군.”
“끝나긴 뭐가 끝나요!”
세르미네가 없앤 마족은 중급의 정신 계열 마족이었다. 그가 상대 못 할 마족은 아니었지만, 이전의 하급 마족과는 다르게 방심은 금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가연은 그저 무너진 집과 새벽에 일어난 소동에 마음이 초조했다.
*
난데없는 대피 소동이 일어나고, 가연은 늦은 새벽 영문도 모른 채 뛰쳐나온 이웃 주민들에게 사과하느라 바빴다. 정작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 세르미네는 이런 일에 서툴렀다.
결국 연락을 받고 온 마이데가 합세하면서 소동은 일단락되고, 떠오르는 해를 보며 그들은 근처의 패스트푸드 가게에 들어갔다.
“세르미네. 마족을 처리한 건 좋은데, 가연의 입장도 좀 생각해야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마이데가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눈치였다.
“내가 뭘 잘못이라도 했나? 마족을 없앴을 뿐이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고 치자.”
작게 한숨을 내쉰 마이데는 맞은편에서 작은 햄버거를 먹고 있는 가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옆의 세르미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신 계열 마족이면 폴라로이아를 부르는 게 나았을 텐데 말이야.”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사사로운 손실을 생각하면 어떤 마족도 퇴치할 수 없어. 그보다….”
“어떻게 중급 마족이, 그것도 정신 계열이 가연의 집까지 알고 들어왔는가, 이거지?”
마이데가 핵심을 정확하게 짚자, 세르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추측으로는 아마 우리가 가연을 처음 만났을 때 마족 무리에 함께 섞여 있던 것 같아.”
세르미네는 마족이 붙어 있던 크로스백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 가방은 세르미네와 가연이 처음 만난 날, 가연이 메고 있던 가방이었다.
“그때의 마족이며, 지금 이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마족 떼까지. 누군가 의도하고 있는 거로군.”
말을 내뱉으며 세르미네는 그 끔찍한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리슈아를 죽였던 그 마족도 의도를 가지고 그에게 접근했었다.
의지가 없는 하급 마족과, 희미한 의사만 있는 중급 마족과는 다르게 고위 마족은 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그런 마족들 중 아틀란티스의 기사 개개인에게 원한을 가지고 접근하는 마족들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그래. 그 말은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고, 가연의 집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거야.”
마이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해서 하는 말인데, 아예 우리가 같이 살면 어떨까? 그러면 가연을 지키기 더 수월할 거고.”
그리고 마이데는 말 대신 눈짓으로 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가연의 집은 무너지기도 했고, 이웃의 눈치 때문에 더는 살기 힘들 것이란 뜻이었다.
“그, 그래도 부모님이 얻어주신 집인데 멋대로 이사를 갈 수는 없어요.”
“그래. 가연은 내가 지켜주면 돼. 너까지 올 필요는 없어.”
두 사람 모두 딱 잘라 거절하자 마이데도 강하게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짧게 말을 남기는 걸로 대신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봐. 아틀란티스의 재정으로 집은 금세 구할 수 있으니까.”
세르미네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틀 뒤, 무너진 방을 막고 거실에서 지내던 가연을 또다시 마족이 습격해왔다. 이번에는 세르미네가 계속 옆에 있던 덕분에 금세 해치울 수는 있었지만, 거실마저 초토화되자 가연은 이제 묵을 곳이 없었다.
게다가 이웃들의 눈치와 집주인의 성화도 한몫했다. 결국 가연과 세르미네는 마이데의 말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거를 결정하자,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아틀란티스의 재정을 담당하기도 하는 무녀 루아는 얼마든지 좋은 집을 구해도 좋다고 허락했고, 인간들의 물정에 해박한 불의 기사 리레시아의 도움을 받아 그들은 번듯한 아파트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사 당일, 세르미네는 작은 손가방을 들고 아파트를 찾았다. 가연의 학교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고급 아파트. 이곳이 가연과 세르미네, 그리고 맘에는 들지 않지만 마이데의 새 보금자리였다.
“세르미네 씨, 이제 와요?”
어쩐지 그날 이후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조금 조심스러워진 가연이 인사를 건넸다. 그는 어차피 무너진 가구 덕분에 짐도 별로 없어 미리 자신의 물건을 보내놓고 빈손으로 오는 중이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잘 부탁해요.”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가연이 짧게 인사하자 세르미네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윽고 도착한 집 앞, 현관문을 열자 갑자기 폭죽 소리가 들렸다.
“세르미네 님, 어서 와요!”
소년의 목소리치고는 높은 톤의 낯선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그 주인공을 확인한 세르미네는 기겁하여 뒤로 주춤 물러섰다.
“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