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마음을 다잡은 세르미네는 고개를 한 번 세차게 저은 후 다시 욕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그저 하얀 타일이 깔린 평범한 호텔 욕실이었다. 대리석 재질의 욕조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휴우, 하고 세르미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다시 한번 구석구석 시선을 옮겨가며 살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샤워라도 해야겠단 마음은 싹 날아간 뒤였다. 그는 푹신한 2인용 침대에 몸을 뉘었다.
방금 본 환상은 긴 시간 동안 세르미네의 마음을 괴롭혔던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리슈아가 죽던 날. 그날 본 것을 세르미네는 마음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영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세르미네는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다행히 그 참상은 꿈에 나오지 않았다.
*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지만, 가연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일대를 마치 포위하는 듯 마족이 산발적으로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강하지는 않았지만 수가 많았고, 해치웠다 싶으면 다른 곳에서 또 나타나니 전투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뭔가 이상한데.’
며칠 동안 그런 일이 반복되자 세르미네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연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었다. 다른 조사를 할 여유는 없었다.
그나마 밤마다 가연의 자취방을 멀리서 지켜보는 게 세르미네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연이 살고 있는 건물 아래에는 마침 가로등과 벤치가 있었다. 세르미네는 전투가 끝나고 해가 지면 늘 그곳에서 가연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피로에 젖은 세르미네였지만, 밤마다 이렇게라도 가연과, 아니 리슈아와 함께 있고 싶었다.
‘과제가 많다고 했었지.’
그걸 떠올린 세르미네는 늘 근처 편의점에서 리슈아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사곤 했다. 봉투에 담아 가연의 집 현관문 손잡이에 걸고 나오며 그가 좋아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벤치에 앉아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세르미네는 가연의 집을 지키고 있었다. 불이 켜지고, 익숙한 형태의 그림자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가연이 몸을 내밀고 세르미네에게 손을 흔들었다.
쪽지도 없이 먹을 것만 걸어두고 왔지만, 가연도 다 아는 모양이었다. 세르미네는 저도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이내 몸을 일으켜 호텔로 돌아갔다. 그걸로 만족이었다.
마족의 출현이 간신히 잦아들자 세르미네는 여유를 가지고 낮에 가연을 찾으러 갔다. 오늘은 시간이 있으니 가연을 직접 만나 대화라도 해 볼 작정이었다.
“어, 왔어? 역시 올 줄 알았어.”
그러나 빌라 입구에서 마주친 사람은 가연이 아니라 다름 아닌 마이데였다. 어찌 알고 온 건지 마이데는 마치 세르미네를 기다린 것 같은 인사를 했다.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거야 나도 리슈아가 보고 싶으니까. 당연하지 않겠어?”
마이데의 말에 세르미네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마이데와 언성을 높이기 싫어 세르미네는 그를 무시하고 빌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불쑥 찾아가려고?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마이데는 익숙하게 휴대전화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하기 시작했다.
“어, 가연아? 나 마이데인데. 딸기타르트가 맛있는 가게를 찾았어. 나오지 않을래?”
세르미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이데는 이내 전화를 끊고 씨익 웃어 보였다.
“5분 이내로 나온대. 기다리자.”
여전히 딸기타르트를 좋아하는군, 그리 생각하던 세르미네는 문득 이상한 점에 생각이 미쳤다.
“근데 네가 어떻게 가연의 번호를 알아?”
“다 아는 수가 있지.”
마이데의 말속에는 가연과 따로 접점이 있다는 암시가 들어있었다. 세르미네는 그 점을 추궁하고 싶었지만, 가연이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내 단념했다.
가연은 나타나자마자 대뜸 딸기타르트는 어디 있냐고 물었고, 세르미네는 속으로 ‘정말 그런 가게를 알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마이데는 능숙하게 길을 찾더니 큰 길가에 있는 한 카페로 들어갔다.
각자 주문한 케이크와 음료가 나오기가 무섭게 가연은 포크를 들고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어딘가 모르게 며칠 굶은 사람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지만, 워낙 딸기타르트를 좋아했던 리슈아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세르미네는 넘어갔다.
“잘 지냈어?”
마이데의 물음에 가연은 포크를 탁, 내려놓더니 이번에는 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 그럼요. 일단 과제는 다 끝냈어요.”
“그래? ‘일단’이라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거야?”
마이데가 다소 예리하게 묻자 세르미네도 곁눈질로 가연을 바라보았다. 가연은 허둥대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가연은 그리 말하다가 저도 어색했는지 손을 내리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뜨거운 커피잔을 입에 가져가던 세르미네가 잔을 받침에 내려놓고는 무심하게 내뱉었다.
“무슨 일이 있군.”
“그러게.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닐 정도면 일이 없진 않은 것 같은데?”
마이데가 익살스럽게 말하자 가연은 다시 얼른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
“아니, 이건… 그냥 졸다가 전봇대에 부딪힌 것이에요.”
“걸으면서 잠이 든 거야?”
“아니에요. 그냥… 과제가 많아서….”
“말하기 싫다는데 묻지 마.”
세르미네가 딱 잘라 내뱉자 마이데가 이번에는 세르미네를 보더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너무 매정하게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 감이 안 좋아서 그래.”
“흥. 그런 미신이나 믿기는.”
세르미네는 고개를 돌렸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마이데는 다시 은은하게 웃으며 가연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말해봐. 혹시 우리가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게….”
우물쭈물하던 가연은 작은 소리로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
“자꾸 가위에 눌려서 그래요.”
가연의 말이 황당했던 세르미네는 하, 하고 한숨 섞인 웃음을 짧게 뱉었다. 하지만 가연의 이어진 말은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리슈아라고 했죠, 여러분이 부르던 그 이름. 리슈아를 부르는 소리가 자꾸 들리고 몸이 아파요. 그래서 눈을 떠보면 뱀 같은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고….”
세르미네는 며칠 전 호텔에서 보았던 환상이 떠올랐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마이데를 보니 그도 이상함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없진 않은데. 오늘 밤에 네 집을 지키고 있어도 될까?”
그래도 동의를 구하겠답시고 마이데가 제안을 했지만, 가연은 얼른 도리질을 쳤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 있겠어요. 시험 기간이 코앞이라 피곤한 거겠지요.”
“내가 지키고 있도록 하지. 마이데 넌 오지 않아도 돼.”
세르미네가 딱 잘라 말했다. 마이데는 썩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혼자서는 좀 힘들 것 같은데.”
“날 무시하는 건가?”
마이데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가만히 눈치를 보던 가연은 이러다가 싸우겠다 싶어 얼른 나섰다.
“괘, 괜찮아요. 정말로.”
그때 마이데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잠시 실례.’라고 짧게 말을 남기고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떴다.
세르미네는 특별히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깨작거리며 타르트를 먹는 가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조금 떨어진 곳에 마족이 나타난 모양이야. 리레시아가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어.”
그러면서 마이데는 의자에 걸친 웃옷을 허리에 두르고, 일어서려는 세르미네를 말렸다.
“너는 리슈아를 잘 봐줘. 상황을 보아하니 나 혼자 가도 괜찮을 것 같으니까.”
말을 남기고 마이데가 사라지자 세르미네는 가연을 흘긋 보았다. 파이 끄트머리를 조금씩 잘라 먹는 모습은 언뜻 보기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딘가 행동이 느리고, 손끝이 떨리고 있는 걸 세르미네는 놓치지 않았다.
결국 세르미네는 가연에게 일어날 것을 권했다.
“얼른 들어가. 집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호의에 기댄 가연은 자취방으로 세르미네와 함께 돌아왔다. 두 번째 들어오는 집이 세르미네는 슬슬 익숙해지려 했다.
하지만 아직 해가 떠 있어 가연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남은 과제를 끝내고, 세르미네에게 또다시 김치찌개를 차려주고 나니 이내 해가 저물었다. 거실에 이불을 내준 가연은 그제야 만족하고 침대에 누웠다.
“뭐 이런 걸 또….”
이불에 누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세르미네는 그 옆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눈을 감고 있자니 바로 옆방에서 가연이 누워 잠들었다는 사실이 생생히 떠올랐다.
‘리슈아….’
그러고 보니 집 안에서 은은한 꽃 향이 났다. 리슈아가 좋아하던 꽃향기, 루드베키아의 향이었다.
[세르미네!]
해맑게 웃는 리슈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가 좋아하는 금색의 꽃을 한 아름 들고 웃던, 천진난만한 소년.
[세르미네, 세르미네!]
“세르… 미네… 씨!”
아득히 들리는가 싶던 리슈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악문 이 사이로 겨우 내뱉는 음성이었다.
세르미네는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황급히 가연이 잠들어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세르미네도 익히 아는 얼굴이 있었다.
“너 이 녀석… 듀믈레, 어떻게 나타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