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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3화 (3/87)

3화

다음 날, 세르미네는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일어났나.”

“엄마야!”

늦은 아침, 양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나오던 가연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떨어뜨린 그는 빈손으로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이웃에 폐가 되지 않나.”

“누, 누구 때문인데요!”

행여나 자신의 비명에 누가 나오는 건 아닌지 싶어 가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빌라의 복도는 잠잠한 채 햇빛만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시름 놓은 가연은 이번엔 세르미네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죠? 그보다 대체 누구세요?”

가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여전히 벽에 기댄 채 고개만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모습이 거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가연에게 지금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자기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세르미네. 아틀란티스에서 왔다. 그리고 네가 사는 곳은 미리 조사해두었지.”

“뭐라고요? 아니, 잠시만요. 그보다 스토킹은 범죄라고요!”

세르미네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가연은 그나마 가장 마지막 말을 꼬투리 잡으며 화를 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오히려 그런 가연이 대견하다는 듯 드디어 팔짱을 풀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젠 제법 자기 몸도 사릴 줄 아는군. 예전엔 아무나 졸졸 따라다니더니.”

그러면서 세르미네는 작게 한숨을 쉬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다. 나도 남의 뒤를 밟는 취미는 없어. 다만 어제같이 마족이 습격해 오면 큰일이니까 보초를 선 것뿐이다.”

“마족? 어제 본 그 네 발 달린 괴물 말인가요? 그런 게 또 온단 말이에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세르미네는 약간 질린 기색을 내비쳤다.

“여기 서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네 집에 잠깐 들어가도 되나?”

말을 꺼내며 세르미네는 가연의 등 뒤로 보이는 그의 집을 훑어보았다. 아틀란티스의 성보다는 훨씬 좁고 누추했지만, 그런대로 가지런히 정리된 작은 집이었다.

“한 대륙의 후계자가 머물만한 곳은 아니지만, 각성 때까지 임시 거처로는 손색이 없군.”

세르미네가 다시 눈을 떼고 고개를 끄덕이며 가연을 바라보았다. 가연은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불신 섞인 가연의 눈초리를 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허튼짓은 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기사로서 지켜야 할 도리는 이미 몸에 익힌 지 오래니까.”

“흐음… 알았어요. 일단 이 쓰레기부터 버리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말을 마친 가연은 떨어뜨렸던 두 봉투를 손에 다시 쥐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역시 발 하나는 빠르다고, 다시 한번 세르미네는 감탄했다.

*

가연의 안내로 들어오자마자 세르미네는 그의 집 구조부터 살펴보았다. 작은 방이 하나, 그보다는 조금 넓은 거실과 화장실, 그리고 건조대와 세탁기가 놓인 베란다가 전부였다.

가연은 세르미네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차라도 내올까 하다가 퍼뜩 든 생각이 있었다.

“저기… 계속 집 앞에 서 있었던 거면 식사는 했어요?”

가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라고요?”

대수롭지 않게 세르미네는 대답했지만, 가연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둘러 상을 편 그는 그 위에 빠른 속도로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난 괜찮다. 신경 쓰지 않아도….”

“어떻게 밥을 안 먹을 수가 있어요! 그건 안 돼요!”

세르미네는 재차 거절하려 했지만 가연은 이런 곳에서 난데없이 단호했다. 문득 이 나라 사람들은 밥에 민감하다는 걸 상기한 세르미네는 순순히 호의를 받기로 했다.

“외국 분이시면 빵이 나았을까요?”

“상관없다.”

세르미네는 보란 듯 익숙하게 젓가락과 숟가락을 들었다. 빨간 김치찌개 국물을 한 숟갈 뜬 그는 젓가락으로 그 위에 꽁치 토막을 하나 얹고는 그대로 입에 가져갔다.

“괜찮군. 직접 만든 건가?”

“그럼요. 누가 해줄 리 없잖아요.”

세르미네가 이번에는 소시지볶음을 입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가연 또한 숟가락을 들었다.

“제법이야. 부엌을 쓰겠다며 나서다 성에 불을 낼 뻔한 게 엊그제 같은데.”

“무슨 소리에요. 그보다 당신, 세르미네 씨라고 했지요? 마치 절 아는 것처럼 어제부터 말씀하시는데요.”

가연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세르미네는 한창 움직이던 오른손을 뚝 멈췄다. 그의 젓가락이 반찬 위에서 멈췄지만 가연은 아직도 이상하게 흐르는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저에게 리슈아라고 그러시는데, 제 이름은 어제도 말했지만….”

“그만해.”

세르미네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젓가락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그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한번 누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루아가 네 기억이 없을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고통스러울 거라곤 생각도 못 했군.”

“루아? 그건 또 누구예요?”

연이은 가연의 질문에 세르미네는 옆에 놓인 찬물을 들이키고는 가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들어. 어제도 말했지만 네 본래 이름은 리슈아야. 너 또한 아틀란티스의 기사였지.”

“네?”

이번에는 가연의 젓가락이 반찬을 집다 말고 손에서 떨어졌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세르미네를 보던 가연은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젓가락을 주워 밥상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았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아틀란티스라니, 그건 전설의 대륙이잖아요.”

“네 기준에선 괴물 같은 마족도 존재하는데, 아틀란티스가 있다고 이상할 건 없지 않나?”

“그건….”

가연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세르미네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연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세르미네는 계속 입을 열었다.

“인간들은 어차피 보고 경험하지 않으면 부정하기 일쑤니,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지금 네가 아틀란티스에 갈 수는 없으니까.”

“왜죠? 방금 저보고 아틀란티스의 기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말에 세르미네는 다시 한번 가슴을 무거운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가장 아픈 기억을 애써 끄집어낸 세르미네는 컵의 물을 전부 들이켰다.

“리슈아는… 내 실책으로 마족의 손에 죽었었다. 지금 넌 환생한 리슈아야. 아직 완전하지 않으니 갈 수 없는 것이지. 아틀란티스는 바다 저편, 결계 속에 존재하는 대륙이다. 오로지 그곳의 기사들만이 출입할 수 있어.”

“그렇군요….”

무거운 분위기 탓에 가연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세르미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할 말을 묵묵히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네가 각성할 때까지 내가 지켜주지. 언제 또 마족이 습격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어제도 물었지만, 대체 왜 저를 노리는 거죠?”

가연이 고개를 들고 겁먹은 눈으로 세르미네를 바라보았다. 리슈아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눈동자로 저렇게 바라보니 세르미네의 마음도 그리 편치는 못했다.

“마족이 우리에게 원한을 가졌다는 것은 어제도 설명했지. 특히나 고위 마족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손에 한 번 멸망했었고, 그다음에는 리슈아를 잃었지.”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며 세르미네는 쓴 입맛을 다셨고, 가연은 조용히 컵 안에 찬 물을 채워 넣었다.

“죽은 기사가 환생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네가 다시 돌아올 거라 예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돌아온 게 현실이야.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게다가 더 이상은 마족들에게 소중한 걸 잃을 수 없다. 그리고….”

드물게 말을 길게 잇던 세르미네는 중간에서 자신의 말을 끊었다. 망설이는 듯한 그에게 가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건 나중에 말하도록 하지. 지금은 마족이라는 존재가 우주의 멸망을 위해 움직이고 있고, 우리는 그걸 막기 위해 싸운다는 것만 알아둬. 그리고 마족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을 거다. 혹시 모르니 내가 멀리서 널 지켜보고 있도록 하지.”

“저는 뭘 하면 되죠?”

“그냥 평소대로 지내.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방법은 내가 찾겠다.”

그러면서 세르미네는 품속에 넣어두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꽤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가연이 받아들고 펴 보니, 전화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내 번호다. 마족이 나타나거나 하면 전화해. 바로 오도록 하지.”

“아틀란티스 사람이라더니, 꽤 현대적이네요.”

가연의 말에 세르미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차도 마시고 가라는 가연의 제안을 세르미네는 거절했다. 아직은 기억을 잃은 리슈아에 익숙지 않은 세르미네였다. 가연의 옆에 있으면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눈빛을 보아하니 질문 공세를 퍼붓기라도 할 것처럼 호기심과 불안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전화번호를 주고 왔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지.’

빌라 현관을 나서며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위에서 가연이 베란다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

그 후로 근방에 나타난 마족들을 처리하고 나니 해가 저물었다. 겨울이 가까운 계절이라 그런지 금세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세르미네는 근처에서 며칠 묵기로 마음먹었다.

아틀란티스까지는 어차피 순간이동을 쓰기 때문에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유달리 가연이 살고 있는 곳, 서울에 마족이 많이 나타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그 녀석의 거처는 모를 거야. 내가 잘 감시하면 돼. 밤이고 낮이고 말이야.’

멋들어진 고급 호텔의 방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다시 만난 리슈아는 그의 기억 속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삐죽 뻗쳐있는 보라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가연은 하늘색의 둥근 눈동자마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다소 어려 보이는 외관, 세르미네의 가슴까지 오는 작은 키, 심지어 다소 눈치 없는 성격까지 똑같았다.

그런 가연이 세르미네를 못 알아보는 것은 그에게 큰 상처였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것조차 리슈아를 죽게 만든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했다. 마족의 손에 죽은 리슈아. 그 참상을 어찌 잊겠는가.

[세르미네.]

리슈아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으며 그 소리를 떨치려 애썼다.

‘그럴 리 없지. 내 기억이 만든 소리다.’

이틀 동안 많은 일이 있어서 감정이 흐트러졌다고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물이라도 몸에 끼얹으면 정신이 들겠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발걸음을 욕실로 옮겼다.

그러나 무심코 하얀 욕실 문을 열자 그 안에 보인 건 온통 붉게 물든 벽이었다. 그리고 넓은 욕조 안에서 꿈틀대는 것, 그것이 눈에 들어오자 세르미네는 낮게 비명 지르며 숨을 집어삼켰다.

“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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