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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2화 (2/87)

2화

가연의 비명과 동시에 세르미네가 허리춤을 오른손으로 감싸 안았다.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휘청거리다 자세를 바로잡은 그의 손에 붉은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이, 이봐요. 저기… 괜찮아요?”

자기 때문에 세르미네가 다쳤다고 생각한 가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건넸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부상을 입은 허리의 아픔보다도, 낯설게 자신을 부르는 가연의 말이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방해하지 마.”

상처를 살피려는 가연의 손을 세르미네가 피 묻은 손으로 탁, 쳐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린 가연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세르미네. 어렵게 리슈아와 다시 만났는데, 그러면 안 되지.”

그 사이 후방을 얼추 정리한 마이데가 가연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으며 세르미네를 향해 말했다. 세르미네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려 자세를 바로 했다.

그의 몸에 둘려 있던 빛의 기운과 날개는 조금 전 공격의 실패로 인해 사라져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참에 잘됐다며 세르미네는 외투를 벗어 붕대처럼 허리의 상처를 감아 지혈했다.

“다시 수호석을 발동할 거지? 그럴 거면 차라리 광범위 공격으로 한 번에 끝내자.”

수호석이라는 말에 가연이 세르미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까는 잘 보이지 않던 검신이 또렷하게 보였다. 검의 손잡이에 하얀색의 동그란 보석이 금빛 조각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네 방어막을 믿으라는 건가? 저번에도 방어막을 뚫고 공격이 들어오는 바람에 부상을 입었잖아.”

세르미네가 마이데를 노려보며 동시에 수호석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렸다. 그러자 다시 몸에 빛이 둘리며 등에는 한 쌍의 날개가 돋아났다.

“그때야 넓은 범위를 지켜야 했던 만큼 어쩔 수 없었지. 나도 한계가 있다고. 그래도 리슈아 정도라면 충분히 지킬 수 있어.”

마이데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매몰차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녀석을 위험에 빠뜨렸나? 아까도 말했지만 방해하면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에 마이데는 대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후방의 적을 해치우는 데 전념한 나머지 가연을 소홀히 한 건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세르미네는 자신이 옳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는 다시 다가오는 마족을 향해 검을 들고 달려갔다. 마족의 수는 이제 처음의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부상 당한 몸으로는 아까처럼 빠른 움직임을 내기 힘들었다. 마족에게 부상을 더 입지 않고 해치우는 것만으로도 세르미네는 급급했다.

결국 마지막 한 마리를 남겨놓고 세르미네는 거의 모든 힘을 소진하고 말았다.

‘젠장, 여기서 무너질 순 없어. 일어나야 해.’

강박처럼 머릿속을 메운 그 생각을 동력으로 세르미네는 비틀거리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마족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세르미네를 지나쳐 네 다리로 가연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안 돼!’

세르미네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자신이 다가가기엔 너무 늦어있었다. 생각보다 한 발 더 빠르게 그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마이데, 리슈아를 보호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세르미네는 흠칫 놀랐지만, 그의 판단은 옳았다. 후방을 얼추 정리해둔 마이데는 얼른 들고 있던 자신의 무기, 은색 전투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물의 수호룡이여, 아군을 보호할 방어막을!”

그의 주문 같은 외침과 동시에 도끼의 중앙에 박혀있던 파란색의 물방울 모양 보석이 환히 빛났다. 이내 가연과 마이데 사이로 비눗방울 막과 닮은 형태의 반원형 방어막이 감싸졌고, 달려오던 마족은 그 막을 채 뚫지 못했다. 그저 밖에서 맹렬하게 발톱으로 방어막을 할퀼 뿐이었다.

“세르미네, 지금이야!”

“알고 있어!”

마이데의 말에 세르미네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이래라저래라 지시받는 것이 몹시 불쾌했지만 그 감정은 잠시 접어두었다. 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마이데의 옆에서 자신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가연이었다.

“빛의 수호룡이여!”

검을 쭉 앞으로 뻗으며 세르미네가 외치자 검신 위로 다시 한번 용의 형상이 일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금세 사라지지 않고 더욱 또렷해지며 꿈틀거렸다. 그러다 이내 적을 향해 위협적으로 주둥이를 쩍 벌렸다.

“섬광의 숨결로 적을 멸하라!”

뒤이은 세르미네의 주문 같은 외침과 동시에 하얀 용의 입에서 광선이 레이저처럼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등부터 몸을 꿰뚫린 마족은 이어 몸이 불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시체조차 남지 않았다.

“저, 저게 뭐예요…!”

너무 놀란 나머지 가연이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러자 마이데는 대답 대신 가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달래주었고, 세르미네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그들 앞에 성큼성큼 다가왔다.

“알았어, 세르미네. 놓으면 되잖아.”

세르미네의 얼굴을 본 마이데가 못이기는 척 가연에게 걸친 손을 풀었다. 가연은 마족만큼이나 세르미네 또한 무서웠다. 처음 보는,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힘을 쓰는 사람이 괴물을 처치한 다음 자신에게 성큼 다가오는데 겁먹지 않을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모으고 덜덜 떠는 가연에 세르미네는 복잡한 감정이 고조되었다. 자신이 아는 동글동글한 하늘색 눈동자는 결코 자신을 겁먹고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놓았다. 검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세르미네의 손에서 떨어지자마자 마치 기화한 것처럼 사라졌다. 하얀 수호석만이 날아가 그의 펜던트 안에 안착했다.

자유로운 두 손을 벌려 세르미네는 가연을 와락 안았다. 깜짝 놀란 가연이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자 그는 더욱 세게 가연을 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이야, 그림 좋은걸?”

옆에서 마이데가 휘파람을 불며 끼어들었지만, 이번만큼은 세르미네는 화내지 않았다.

“리슈아, 보고 싶었다. 이제는 보내지 않을 거야. 리슈아….”

“저, 저기요? 사람 잘못 보신….”

푹 파묻힌 세르미네의 가슴에서 은은한 포도향이 느껴지자 가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 아까부터 ‘리슈아’라는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가연은 온 힘을 다해 세르미네를 밀어냈다. 그 정도로 세르미네가 밀쳐져 넘어지진 않았지만, 행여나 숨이 막히는 건 아닌가 싶어 그는 순순히 가연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내심 아쉬운 표정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대체 이게 다 뭐에요? 영화 촬영인가요? 그, 저, 저는 그런 건… 죄송합니다!”

가연은 당황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영화 촬영장에 잘못 발을 들인 거라면 자리를 비켜줘야만 했다.

“영화라니. 이건 현실이야, 리슈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가연은 마이데를 올려다보았다. 자신 역시 이국적인 외모라는 소리를 제법 듣기는 했지만 이 남자는 좀처럼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건 세르미네 또한 마찬가지였다.

“현실이라니…. 여러분은 대체 누구세요? 영화가 아니면 뭐란 말이죠? 이 괴물 같은 것들은 대체 왜 저를….”

“리슈아.”

세르미네가 딱 잘라 말을 꺼냈다. 엄해 보이는 그 목소리에 가연은 허둥대며 아무렇게나 말을 담던 입을 뚝 멈췄다.

그러자 옆에서 보던 마이데가 안쓰러웠는지 세르미네를 제지하고 자신이 대신 설명을 이었다.

“리슈아… 미안, 여기서는 가연이지. 우리는 아틀란티스라는 곳에서 왔어. 지구를 마족의 손에서 지키는 기사이고, 너를 습격한 건 마족들이야.”

“네?”

가연은 입을 떡 벌리고 마이데를 올려다보았다. 생긴 건 멀쩡한데,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너도 아틀란티스의 기사, 리슈아의 환생이야. 그래서 우리가 데리러 왔어. 안 그러면 지금처럼 마족이 또 널 습격해 올 거야. 저들은 우리에게 원한이 깊거든.”

“대체 무슨… 제가 무슨 원한을 살만한 일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도 뭣하니, 앉아서 이야기할만한 곳 없을까?”

마이데가 애써 웃으며 제안했지만, 가연은 쉽게 승낙하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틀란티스에, 기사에, 리슈아는 또 누구인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들, 미친 게 분명해.’

그리 생각한 가연은 떨어진 가방을 주워 탁탁 털고는 다시 어깨에 걸쳤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제 이름은 주가연이에요. 지나가던 대학생이고, 마저 지나가겠습니다!”

마이데와 세르미네가 동시에 불러 세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가연은 제 자취방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가 버렸다.

“아, 가버렸네.”

마이데가 쓰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또한 들고 있던 도끼를 세르미네처럼 손에서 없애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여전히 발 하나는 빠르군.”

세르미네는 당장 잡으러 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가연의 자취방이 어디인지는 파악해놓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첫걸음은 뗀 셈이었다.

“그게 또 리슈아라는 증거 아니겠어?”

“내면을 보라고 루아가 그러지 않았나. 벌써 잊은 건가?”

“네네. 고명하신 무녀님의 말씀을 어찌 잊겠습니까.”

마이데가 짧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세르미네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가연이 사라진 방향을 쭉 주시했다.

“우리가 한 말 제대로 이해는 한 건지.”

난데없이 내뱉은 세르미네의 말에 마이데가 저도 모르게 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그런 걸 걱정해? 아마 리슈아도 알 테니 걱정하지 마. 그래도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다르니까 시간이 걸릴 거야.”

“….”

세르미네는 가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마이데는 루아에게 보고를 하겠다며 연기처럼 모습을 감췄고, 세르미네는 오히려 바라던 바였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

한편, 가연은 자취방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리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지금 같은 무서운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줄 곳은 여기 이곳뿐이었다.

‘뭐야? 조금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자취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전부 걸어 잠근 가연은 침대에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세상에, 그 괴물들은 다 뭐야! 아틀란티스는, 기사는 또 뭐야! 왜, 왜 갑자기 나를!’

가연은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런 무서운 일에 한 번 휘말린 것도 이렇게 심장이 뛰는데, 나를 아는 것 같은 사람들이 둘이나 나타나다니!

‘그 사람들… 아니, 사람은 맞는 거야?’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자 가연은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나와는 관계없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리슈아라니, 사람을 잘못 봤겠지. 그렇게 생각하려고 가연은 무딘 애를 썼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그만 창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허기가 무섭게 몰려왔다.

하지만 그가 저녁상을 차리고, 밥을 먹고, 산더미같이 쌓인 과제를 해치우는 동안에도 낮의 일은 쉽게 지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에이, 모르겠다! 내일이 되면 꿈처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가연은 포기하고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한참 뒤척이던 가연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물론 그는 몰랐다. 자취방의 문 옆에 서 있는 세르미네를. 그리고 창밖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들을.

깊게 잠든 가연은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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