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의 루드베키아-1화 (1/87)

1화

“믿을 수 없어…”

어두운 방 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가연이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늘 오후 일어났던 믿기지 않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직도 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낮의 사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괴물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사람들. 하마터면 목숨이 위험할 뻔한 상황.

그리고 낯선 남자의 포옹과 속삭임이 뒤이어 가연의 감각을 다시금 덮쳤다.

[리슈아, 보고 싶었다.]

그는 손을 내리고 옆에 두었던 베개를 끌어안았다. 아니야, 이건 꿈이야.

가연은 부드러운 인형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오후의 그 일들을 곱씹었다.

*

여느 때와 똑같이 끝난 강의. 산더미 같은 과제에 가연은 울상이었다.

“왜 그래? 과제 좀 도와줄까?”

바로 옆에서 강의를 듣던 한 학번 위의 선배가 가연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에이. 치킨이라도 하나 사줄게. 와서 먹고 가.”

“아니에요. 오늘은 밥이 먹고 싶어요.”

선배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포기하고는 이내 자신의 가방을 챙겨 사라졌다. 가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 또한 크로스백을 메고 강의실을 나섰다.

오늘의 운세에서 귀인을 만날 거라기에 잔뜩 기대했더니만, 귀인은커녕 꾸벅꾸벅 졸다가 귀신같은 교수한테 딱 걸려서는 된통 혼난 참이었다.

그나마 오늘의 수업이 모두 끝난 게 다행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자취방으로 가서 한숨 돌릴 생각이었다.

가연은 대학교 캠퍼스를 나와 길가로 접어들었다. 학교로부터 이십 분 걸어가면 나오는 자취방까지는 한산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야 했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 가연은 얇은 웃옷을 단단히 여몄다. 알록달록한 색의 낙엽이 무성한 골목길은 오늘도 역시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연은 머릿속으로 과제, 또 과제를 생각하며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의 모퉁이를 돌았다.

쾅!

갑자기 귀를 때리는 커다란 소리에 멍하니 걷던 가연은 화들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소리의 근원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가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가려 했다.

쾅!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가연의 옆, 공사장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뭐, 뭐지?’

가연의 마음속에 호기심과 공포가 뒤섞였다.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과 어서 도망가야 한다는 마음이 가연의 이성을 어지럽혔다. 결국 호기심이 이긴 탓에 가연은 고개만 살짝 내밀어 공사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기에 입구에서 무슨 일인가 살펴보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 생각해 보니 이곳은 여러 문제가 얽혀 공사를 멈춘 지 꽤 됐다고 들었다.

‘그런 곳에서 소리가 났다고?’

가연의 마음에 그런 의문이 피어난 순간, 다시 한번 큰 소리가 났다.

이제는 호기심보다 공포가 더 앞섰다. 소리의 정체가 무엇이든, 얽히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도망가자!’

가연은 조심조심 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달아나려는 순간, 그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 여러 개가 허공을 가르고 나타났다.

분명 공사장 안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러니 좀 전에 들렸던 소리의 원인은 아마도 이것들이리라. 가연은 돌연 눈앞에 나타난 많은 수의 괴물을 보며 덜덜 떨었다. 다리가 굳어 도저히 도망갈 수가 없었다.

어찌나 무섭게 생겼는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기도 전에 이미 공포가 마음을 지배했다. 언뜻 보면 늑대와 닮았지만, 새빨간 눈에서 나오는 안광,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큰 몸집과 날카로운 발톱. 괴물이라는 말이 딱 적절했다.

“어쩌지, 어떡하지…!”

가연이 당황하는 와중에도 괴물들은 그 빨간 눈으로 가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의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려는 순간,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리슈아!”

그 외침과 함께 나타난 것은 커다란 검을 든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 맞나? 가연은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서서 검을 괴물에게 겨누고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등에 돋아난 날개는 마치 박쥐의 그것과도 흡사했는데, 굉장히 크고 순백색에 광택이 흐르는 날개였다. 꽤 커다란 키를 가진 남자는 하얀색의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그와 같은 색의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몸과 검을 희미한 하얀 빛이 감싸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그 몸을 지켜주는 것 같은 신성한 빛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마냥 넋을 놓고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남자는 검을 가로로 들어 괴물을 향해 꽂아 들어갔고, 정확히 괴물의 입 안, 천장을 노린 검은 그것의 주둥이를 두 동강 냈다.

“리슈아, 넌 뒤로 물러서 있어!”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그와 동시에 가연의 팔을 뒤에서 부드럽게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리슈아는 내가 엄호할게. 세르미네 넌 마족을 상대해!”

가연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처음 나타나 전투 중인 저 사람보다 키가 훨씬 큰, 푸른 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회색 눈동자를 가진 눈을 가늘게 휘어 웃어 보였다.

“어, 어어?”

가연이 채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두 번째 남자는 가연의 몸을 끌어안더니 덮쳐오는 괴물을 뛰어올라 피했다. 한 발만 늦었어도 저 뾰족한 이빨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한 가연이었다.

“마이데, 너는 왜 온 거야? 방해만 되니까 아틀란티스로 돌아가! 어서!”

한창 검을 들고 전투를 벌이던 남자는 아주 잠깐 틈이 생기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명 가연의 뒤에 서 있는 다른 남자, 마이데를 향한 노성이었다.

“이야, 너무한걸. 세르미네.”

약간의 빈정거림을 섞은 마이데의 말에 상대인 세르미네는 코웃음만 치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역력한 표정이었다.

세르미네는 눈앞의 괴물, 그들의 말로 ‘마족’이라 부르는 것들을 노려보았다. 하급치고는 조금 강한 마족이었지만, 세르미네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문제는 그 숫자였다. 세르미네가 홀로 마족을 상대하는 것뿐이라면 상황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뒤에는 전투 능력이 전무한 가연이 있었다. 비록 마이데가 붙어 있긴 했지만 세르미네는 그를 믿지 않았다.

‘속히 마족을 처치해 위협을 제거해야겠군. 이 정도는 혼자서 처리할 수 있어.’

그리 마음먹은 세르미네는 다시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칼끝에 쓰러진 마족의 피가 새하얀 검신을 붉게 물들였다.

“우와….”

가연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예민한 세르미네의 귀에 어김없이 들렸다.

그는 우쭐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그리고는 더욱 몸을 낮춰 자세를 잡고 다시금 마족을 견제했다. 찰랑거리는 하얀 앞머리 사이, 가늘게 뜬 두 눈의 황금색 눈동자가 번뜩이며 마족을 노려보았다.

세르미네도, 눈앞의 마족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허튼 움직임을 보이면 당한다는 걸 양쪽 다 알고 있었다. 뒤에서 마이데가 마족을 해치우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세르미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왜 쓸데없는 짓을 했느냐고 추궁하면 그만이었다.

찰나의 침묵 끝에 세르미네와 마족이 동시에 움직였다. 1 대 다수. 그러나 세르미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몸은 마치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다. 검으로 적의 머리를 내려치고, 몸을 가르는가 싶으면 날개를 이용해 뛰어올라 뾰족한 검 끝을 적의 심장에 내리꽂았다. 실로 범인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세르미네의 검에 쓰러진 수십 구의 마족의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제 딴에는 가연을 배려한다고 허튼 상처 없이 급소만을 노려 시체의 처참함을 줄였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참상에 가연이 작게 비명 소리를 내자, 세르미네는 영 못마땅했다.

‘거참, 예나 지금이나 손이 많이 가는 건 변함이 없군.’

그런 생각을 이어가면서도 세르미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방의 마족 수는 상당히 줄어 있었다.

다소 여유가 생긴 그는 가을바람에 서늘하게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는 아직 남아있는 마족을 한 번에 해치우고자 검을 고쳐 쥐고 무기에 힘을 가득 실었다.

그러자 하얀 검신이 위에 더욱 새하얀 빛이 뒤덮였다. 반짝이는 빛무리가 검신을 소용돌이처럼 타고 올라갔고, 언뜻 그의 등에 펼쳐진 것과 똑같은 날개를 가진 용이 보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세르미네는 그가 가진 빛 속성의 힘을 최대한 이끌어 냈다. 이 필살기로 적을 단번에 없애버릴 작정이었다.

“우왓! 저리 가!”

이제 그 힘을 개방하기만 하면 되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과 외침이 들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누가 내지른 비명이든 신경조차 쓰지 않을 세르미네였다. 그러나 그 비명의 주인은 가연이었다. 그리고 귓가를 때린 목소리는 가장 소중한 사람의 울림이었다.

세르미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가연에게 마족 두 마리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하필 마이데는 후방의 적을 퇴치하느라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가연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가방을 휘젓는 것을 본 세르미네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내달렸다. 그 때문에 한창 집중하여 끌어모은 힘이 검에서 사라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리슈아!”

세르미네가 필사적으로 가연에게는 낯선 이름을 부르며 그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핏방울이 허공에 튀어 오름과 동시에 더욱 날카로운 가연의 비명이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