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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약간의 소란과 들뜸을 동반한다지만, 대학가의 개강은 유독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파릇한 생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여기.
한국대학교 후문의 어느 카페에서 마주 앉은 체격 좋은 두 남자는 그 어수선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떨어져, 가능한 다른 누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헐. 주5를 듣는다고? 3학년 2학기에 주5? 고신재 너, 뭐 학점 모자라냐?”
“아니. 오히려 남아.”
“남는데 왜?”
김푸름은 제 질문에 대답 대신 등을 의자에 기대며 어깨를 으쓱이는 미남의 흐린 눈웃음을 보면서 아, 내가 또 괜한 질문을 했구나, 하고 진심으로 탄식했다.
고신재가 2학기째 자신의 시간표를 엉망진창 공강 대잔치로 박살 내는 이유야 어차피 한 가지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푸름은 굳이 탄복한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제 진심을 순수하게 고백하고 말았다.
“…정말 이렇게까지 부럽지 않은 찐사랑이 있기는 힘든데….”
“해 보면 생각보다 할 만해.”
“어휴우우, 나는 이제 주5는 절대 못 해, 이미 내 모든 세포는 주3에 맞춰졌어. 학교 코앞에서 살면서 2학기 연속 주5 어떻게 하는 거냐.”
“그래도 저번 학기보다는 한빈이가 교양을 잘 잡은 편이라. 뭐. 나쁘지 않아.”
푸름은 이제 하다 하다 엉망인 시간표에 순응하다 못해 만족하기까지 시작한 마조히스트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사실, 고신재 그가 저번 학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푸름과 가까워진 건,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나서 로비에서 있었던 대형 사고를 수습해 준 것이 다름 아닌 푸름이기 때문이었다.
김푸름은 근 몇 주를 거의 날개 없는 거대 요정처럼 부지런히 보냈다.
고신재가 백한빈 앞에서 뚝뚝 울면서 끌려간 그 날의 사고를, 개강 전까지 ‘애인한테 차여서 삽질하는 고신재를 위로하러 간 백한빈’으로 설득력 있게 왜곡하기 위해서였다.
푸름은 거의 왕명을 등에 짊어진 파발처럼 술자리면 술자리, 단톡이면 단톡 사방을 휩쓸며 그 잘난 고신재의 실연을 사방팔방 전파했다.
……어쨌거나 정말 헤어지긴 했으니,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고 말이다.
덕분에 고신재는 개강 첫날인 오늘 실기실 앞을 지날 때마다 동기는 물론이고 선배, 후배 모두의 측은한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보다시피 타격은 전혀 없었다.
푸름이 혀를 차거나 말거나 슬쩍 휴대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한 고신재는,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한빈이한테 늦어진다는 연락 없었지.”
“어? 어어. 그러고 보니 백, 얘는 뭐 이렇게 안 와. 야. 네 애인한테 전화 좀 해봐. -아, 아얏!”
아무 생각 없이 술술 입을 움직이던 김푸름의 말이 끊긴 건, 발소리도 없이 도착해서 널찍한 면적의 등짝을 후려갈긴 따끔한 통증 때문이었다.
푸름은 저를 때린 창백한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
“깜짝이야! 개놀랐네. 늦은 건 백한빈 너인데 왜 때려, 인마!”
“……나 얘랑 안 사귄다고 백번은 말했지.”
물론 그 갑작스러운 깜짝 폭행의 주인공은 오늘따라 유독 음산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백한빈이었다.
푸름은 백한빈이 잇새로 읊듯이 내놓은 문장에 우욱, 하고 과장된 소리를 내고는 김푸름 그 역시도 백번은 더 말한 문장을 또 말했다.
“누누이 말하는데, 기만자가 더 꼴 보기 싫은 거 알긴 해, 백한빈아?”
“조용히 해.”
“눈꼴 시려서 못 봐주겠네. 나도 올해 끝나기 전에 연애 시작한다, 진짜로.”
“해. 제발 좀 해. 내가 오늘부터 물 떠놓고 빈다. …신영이가 너 소개팅 잡아 준다는데 왜 안 하는데?”
“그, 그런 건 부끄러워서 싫다고!”
“어우…….”
사진과의 단짝 듀오는 만나자마자 여느 때처럼 시답잖은 장난을 치면서 본격적인 한 학기의 시작을 알렸다.
한편.
고신재는 김푸름 옆의 의자를 자연스럽게 빼 앉으면서 제 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무심한 남자를 지친 기색도 없이 눈에 담고 있었다.
테이블에 있던 진동벨이 지잉, 하고 길게 울린 것도 그때였다.
“-엇. 음료 나왔다. 내가 갔다 올게. 백, 네 거는 레모네이드 시켰다.”
김푸름이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저만치에 떨어진 카운터로 성큼성큼 떠나고 나자 네모난 4인용 테이블에 남은 건, 비스듬히 마주 보고 앉은 채로도 아직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고신재는 제 시선을 스윽 피해서 뾰족한 눈꼬리를 더욱 가늘게 뜬 채로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는 백한빈을 향해서 천천히 입을 뗐다.
“한빈아.”
“……뭐.”
생판 모르는 이가 들어도 세상 다정하게 부른 이름에 돌아온 대답은 영 시큰둥했다.
하지만 이제 고신재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늘 예쁘네. 옷도, 머리도 잘 어울리고.”
아니, 개의치 않기만 할까. 나긋나긋하게 건넨 문장에 대뜸 고개를 휙 치켜들더니 속삭이는 쉰 목소리가 돌아올 때면 기쁘기까지 하다.
“……고신재 너 진짜 계속 그러면 죽는댔지.”
“왜. 점수 따야 하잖아.”
“그럴수록 점수 더 깎이거든! 그것도 팍팍 깎이거든!”
“그래?”
“그래!”
…아닌 거 같은데.
고신재는 차마 꺼내지 못하는 대답을 꺼내는 것 대신 괜히 입가를 한 번 쓸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서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를 들켰다가는 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더욱 고집스레 뻣뻣해질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난을 걸면 걸수록 발갛게 물이 드는 저 하얀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흠. 이를 어쩌나.”
“…….”
“겨우 점수 좀 땄나 싶더니. 깎인 만큼 만회하려 더 노력해야겠는데….”
고신재는 백한빈이 좋아하는 눈웃음을 치고, 또 가장 좋아하는 톤의 목소리를 내면서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솔직히 그건 제 얼굴의 어떤 각도가 가장 근사해 보이는지 정확히 아는 남자의 약아빠진 행동이기도 했다.
아니나다를까 백한빈은 그 도발 아닌 도발에 순식간에 하얀 목까지 붉은 기운이 훅 올라왔다.
유혹의 순간이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장난을 쳐서 저 예쁜 색을 얼굴까지 끌어올리는 대신 제 정강이를 포기할지, …아니면 얌전히 김푸름이 들고 올 음료를 기다리며 다시 병풍으로 돌아갈지.
선택권은 온전히 고신재에게 있었다.
몇 초쯤 고민하던 고신재는, 계산 없이 마음 가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 끝나고 우리 집 올래? ……아야. 죄송합니다. 정말로 농담이었습니다.”
“농담? 농다암? 정신 못 차렸지, 고신재! 너 좀 더 맞아, 진짜! ”
“손만 매운 줄 알았더니 발로도 잘 차는구나. 대단하네.”
“시끄러워! …이제 슬슬 기어올라, 아주!”
“미안해. 안 기어오를게.”
그렇게 정신적 행복을 위해 육체적 고난을 기꺼이 감수한 고신재가 기분 좋은 얼얼함에서 해방된 건, 씩씩하게 음료를 받쳐 들고 온 김푸름에게 나란히 혼난 뒤였다.
“-인마들아! 제발 사랑싸움 좀 적당히 하라고, 개강 첫날부터!”
<힐, 힐, 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