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60화 (60/65)

60

* * *

한편.

얄궂게도 고신재는 그 시간,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여자에게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고신재는 백미러 너머로 차를 운전하고 있는 남자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

공연 첫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찾아왔던 형 고진영을 제외하고 고신재를 찾아온 첫 번째 손님은, 다름 아닌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서 있는 비서였다.

무미건조한 표정의 남자가 어찌나 말쑥한 차림을 하고 서 있던지, 덕분에 함께 무대에 올랐던 사람들이나 스태프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꽂히기는 했지만 별걱정은 없었다.

고신재는 수고했다는 인사 대신 ‘강서진 대표님께서 찾으십니다’라고 깍듯하게 말한 비서의 문장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스물다섯의 고신재는 어머니가 찾는다는 말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집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잘 안다.

“박 비서님.”

“네.”

“저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지독한 교통체증에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차를 탄 지 30여 분째.

고신재는 특유의 나긋나긋한 말투로 별것 아닌 일을 입에 담는다는 양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저 없을 때 제 아파트에 온 적 있으세요?”

사실 고신재가 비서를 만나자마자 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 건 그 나름대로 이제까지의 신의를 생각한 거였다.

어쨌거나 백한빈과의 관계에 대신 이름을 끌어들여 곤욕을 겪게 한 건 저였으니,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먼저 꺼낼 시간을 주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몇 년간이나 저와 부모님 사이를 연결하며 온갖 끔찍한 순간을 원치 않게나마 엿봤을 남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미안함도 있었다.

비서는 잠시 대답을 고르듯 침묵했다.

눈치 빠른 그는 고신재의 의도를 분명하게 짚어낸 표정이었다. 잠시 뒤 단호한 입매에서는 유독 나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있습니다.”

“왜죠?”

“작은 도련님 생활 전반을 돌봐드리는 게 제 일입니다. 방해되시지 않는 선에서 제가 해야 할 일들을 하러….”

“-박 비서님.”

“…….”

“제가 지금 이거 여쭤보는 이유, 다 아시잖아요. ……엄마한테 말 안 해요. 절대. 그냥 솔직히 말해주세요.”

고신재는 그 순간 비서가 어릴 적 봤던 가정교사와 꼭 비슷한 얼굴을 걸고 있다고 생각했다.

TV라는 건, 원래 가족과 함께 앉아서 보는 거냐고 물었던 어린 날의 어떤 날처럼. 무심하게 저를 바라보는 가죽 너머로 연민이 비집고 나오는 게 보였다.

동정을 사는 건 익숙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게 사지로 끌려가는 중이라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고신재는 한동안 답을 망설이는 비서의 침묵을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음악조차 흐르지 않던 차 안으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친구분을……, 만났습니다.”

고신재는 대답 없이 백미러 너머로 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습니다. 대신, 제 명함을 하나 드렸습니다.”

“그 친구가 누군지 모르셨나요?”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는 그 친구분이, 지금 대표님께서 도련님을 호출하신 이유입니다.”

고신재가 처음으로 동요한 건 그때였다.

담백한 인정에 놀랄 새도 없이 이어진 말에 고신재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제가 들은 말을 곱씹었다.

고신재의 어머니, 강서진 대표는 1년의 절반은 더 넘게 해외에서 보낸다.

그런 그녀가 이틀 전 귀국했다는 소식은 형을 통해 넌지시 전해 들었었다.

때문에 오늘의 호출도 무언가 뻔하고 또 흔한 행사에 저를 불러들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던 고신재다.

그런데 벌써 다음 주면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그 좋아하는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짤막한 메시지 하나 돌려받지 못한 백한빈이 이유라니.

고신재는 흐트러진 표정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질문을 이어갔다.

“이름을 빌린 걸 말할 거라는 건 예상했어요. 그런데?”

“…….”

“그 택배. 받은 게 벌써 몇 달 전인데…. 내내 잠잠하다가 이러는 이유가 있지 않나요?”

“…카드 사용 내역에서 문제를 발견하신 것으로 압니다.”

“카드?”

“특정……, 업소에서 사용된 내역을 보고 동행인을 추적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일전에 선물을 보내주신 분과 같아서 통화기록까지… 모두 조회하셨고요.”

“…….”

퍽 당혹스러울 수 있는 사실을 전하면서도 뚜렷한 표정을 내걸지 않는 건 그걸 오랫동안 훈련한 남자다운 여유였다.

고신재는 비서의 말끔한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낮게 흘러나온 탄식 같은 헛웃음을 작게 흘렸다.

‘특정 업소’.

분명 그건, 몇 달 전 백한빈과 같이 갔던 게이 전용 바를 말하는 걸 거다.

그곳에서 사용한 내역까지 뒤져서 동행인과 택배 발신인의 이름을 이중으로 확인했다면, 이미 백한빈의 지난 25년에 대해 저보다도 달달 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고신재는 제 어머니가 그럴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무너트려 온 사람들을 질릴 만큼 수없이 봐왔었기 때문이다.

고신재는 차창 밖으로 어느덧 해가 완전히 진 여름의 밤거리를 눈으로 훑었다.

이 서늘한 차량 내부와는 달리, 보는 것만으로도 후텁지근한 공기가 느껴지는 저 밖을 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에 거품처럼 가득 찼던 엉킨 생각들이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 분주한 바깥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신재는 꼭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그런데요, 박 비서님.”

“네?”

“……그 택배가 선물이었다는 것까지 알고 계시네요.”

사실 그 순간은 고신재가 ‘박종우 비서’를 알고 지낸 적지 않은 지난해 동안, 그 무뚝뚝한 표정의 남자가 처음으로 눈에 띄는 표정의 동요를 보인 때였다.

하지만 고신재는 백미러만 봐도 알 수 있을 그 동요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됐습니다. 운전에 신경 쓰세요.” 무심히 말을 이었다.

“저, 도련님. 그건-.”

“뭐. 삼진 아웃이었겠어요.”

“…….”

“특정 업소’로 한 번, 선물로 한 번, 백한빈 병원 입원한 것까지 한 번. 그러다 119 신고까지 하고 나니까 더 지켜보면 위험하겠다 싶어 저를 부르는 것 같은데.”

때로 침묵은 어떤 문장보다 더한 긍정이 된다.

그 고요함 앞에서 고신재는 꼭 누군가를 달래듯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건 백한빈이 그리도 좋아하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되기 전에 백한빈에게 경고하신 거겠죠.”

“…….”

“덕분에 마음의 준비는 되겠네요.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고신재는 비서의 나지막한 대답을 들으며 차에 올라탄 뒤 단 한 번도 놓은 적 없는 휴대폰의 액정을 켜서 화면을 확인했다.

끔찍하리만치 한심한 메시지들 옆에는 여전히 숫자 1이 떠 있고, 부재중 전화도 여전히 없었다.

지독한 교통체증이 다행스러운 밤이었다.

* * *

주말 여름의 밤.

정문의 경비원을 제외하고는 직원 한 명 없이 모두 퇴근한 대리석 조의 화랑은 일종의 거대한 쇼 윈도 같은 모습이 된다.

고신재는 후텁지근한 바깥과는 달리 솜털이 쭈뼛 곤두설 정도로 서늘한 화랑의 어둠 속에서 조명 몇 개를 켜고 그림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리를 내지 않고 심호흡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에게 건네는 인사치고는 퍽 삭막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아끼는 소장품과 거의 몇 개월 만에 보는 아들 사이에서 무엇에 시선을 줄지 선택해야 한다면, 제 어머니의 선택은 언제나 전자일 것임을 잘 아는 고신재는 가장 정중하고 무난한 선택을 했다.

아니나다를까 여자의 고개가 움직인 건 그 인사를 듣고도 몇 초 뒤의 일이었다.

고신재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꼭 빼닮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확실히, 강서진 대표는 어느덧 50줄에 들어섰음에도 그 나이보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와 단정하고 우아한 이목구비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고상한 미녀였다.

“오랜만이구나.”

“그러게요. …저는 한국에 계신 줄 알았는데, 이틀 전에 귀국하셨다면서요.”

“신재 넌 공연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네. 지금도 저녁 공연 끝나고 왔는데요.”

살짝 고개를 까딱이는 여자는, 빈말로도 ‘보러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고신재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제 어머니의 담백함에 새삼 헛웃음을 지었다.

강서진 대표는 그런 제 아들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왜 불렀는지 짐작 가는 건 없니?”

확실히 답을 아는 질문을 받아 다행이었다.

고신재는 흠,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 다음,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꽤 무섭네요. 글쎄요,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별거 없는데.”

“없어?”

“네.”

“문제라고 생각조차 안 하는 걸까, 그럼.”

“또, 왜. 참 지치지도 않고 한결같으시네.”

사실 원래 성격대로였으면, “제가 삼촌처럼 돈세탁에 횡령을 한 것도 아니고, 사촌처럼 마약을 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데요?”라며 어머니가 가장 언급하기 싫어하는 순간을 예로 들며 살살 속을 긁었을 고신재다.

하지만 오늘 고신재가 선택한 건 몸을 낮춘 서글서글한 아들의 모습이었다.

상대가 언급할 것이 제가 가장 아끼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이임을 알게 된 이상, 고신재는 그 높다란 자존심을 얼마든지 꺾을 수 있었다.

강서진 대표는 그런 제 아들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신재와 마찬가지인 부드러운 흑갈색의 눈동자였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야겠구나. -고신재. 너, 남자 좋아하니?”

역시 시간 낭비 참 싫어하시지.

고신재는 속으로 쯧, 혀를 차면서 찌푸리듯 웃었다.

“어…, 글쎄요.”

“아니라고는 하지 않네.”

“그렇게 물어볼 정도면 이미 털어볼 만큼 털어본 다음에 말 꺼내는 거 같아서.”

“그래. 그렇다면?”

“물어보시는 의도가 뭔데요.”

하지만,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건 고신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신재는 어울리지도 않는 유도신문을 이어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사뭇 상냥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건 채로 그 역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게이인 건 대단한 엄마 자존심에 역시 좀 곤란한가요?”

나긋나긋하게 흘러나온 물음에 결 하나하나가 그린 듯이 가지런한 강서진 대표의 눈썹 하나가 살짝 꿈틀했다.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신재는, 제 어머니의 우아한 입에서 노래처럼 흘러나올 폭언을 상상하며 그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으리란 다짐을 했다.

사람의 마음이 하얀 도화지라 한다면, 이미 그 위는 수없이 칼로 그이고 또 그여서 물감이 스며들 구석도, 칼날이 끼어들 틈도 없으니, 상처받을 일도 더 이상 없으리라 감히 믿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강서진 대표는 고신재의 머리 위에 있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전까지 차 안에서 못해도 수십 개는 떠올린 반응 중 비슷하게라도 상상하지 못한 답을 내놓았으니 말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귀여운 소리를 하는구나.”

“…….”

“그까짓 것으로 곤란할 게 뭐가 있겠니. 차라리 잘된 일이지.”

“잘된…일이요?”

“나중에 네 형과 불필요한 싸움은 줄어들지 않겠니.”

“…….”

“누가 더 상속을 더 받네, 마네 하는 것들. 머릿수가 많아질수록 잡음도 많기 마련이라.”

한때, 고신재는 제가 자신의 환경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언젠가는 눈앞의 여자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고신재는 다행스럽게도 그녀와 저 사이의 선을 확실히 그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대륙의 전압 코드처럼, 세상엔 같은 피가 흘러도 절대 맞지 않을 것들이 있었다.

고신재는 왠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누르며 제 어머니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랑 외삼촌처럼?”

“……그래.”

애초에 콤플렉스라는 건 전염성이 강한 포자였다.

강서진 대표는 부족한 집안의 명예를 군 장성인 제 남편으로 채우고, 배다른 형제자매들을 온갖 방법으로 꺾어 지금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고 나니 새로 자라난 가시가 그녀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앞선 후계자였던 이복 오빠를 재기 불능으로 만들고 그 자식까지 짓밟아 화랑을 차지한 자신의 정당성과 정통성에 대한 물음이 새로운 콤플렉스로 자리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고신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 어머니가 상상과는 다른 말을 했을 때 아주 잠시나마 저도 모르게 달콤한 상상을 하고 만 스스로가 더더욱 끔찍이도 싫어졌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속은 들끓기 시작했건만 고집스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를 낸 건 그래서였다.

“그럼 그 다행인 일을… 뭐, 축하나 격려라도 해 주려고 불렀나.”

“신재 네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문제 될 게 없어. 하지만, 아무나 좋아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아무나’?”

“소란을 피웠더구나. 게다가, 안목이 나쁘지 않은 줄 알았는데…. 형편없어진 거니, 그게 아니라면 잠시 즐기다 마는 정도인 거니. 후자이길 바라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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