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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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영은 성인이 된 이후로 누군가에게 혼나본 적이 없다.
애초에 정석만을 밟아온 삶이기도 했고, 하다못해 직장에 들어가서도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실수하는 일 하나 없던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주말치고는 사람이 그리 없는 한산한 카페 안.
고진영 그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해골 병사 군단의 군단장쯤 되어 보이는 동생의 남자친구에게 한껏 혼나는 중이다.
“아니, 그러니까. 진짜 어이가 없어서…. 무슨 형제 사기단이에요? 예에?”
“면목 없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럼 그 ‘청담동 왕자님’이 형님분 계정인 거죠.”
“네, 네에.”
“하여간 그 브론즈 새끼. PC방에서는 엄청 못하던 게, 갑자기 잘할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더라니. -대체, 고신재한테 계정은 왜 빌려주신 거래요? 장장 5년을 브론즈였던 애한테, 예?”
“……죄송합니다.”
사실 계정을 빌려줬다기보다는 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고 있던 동생에게 강탈당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고진영은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 대신 곧장 사과하는 쪽을 택했다.
덕분에 한빈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한숨 대신 고진영이 주문해 준 레모네이드를 물처럼 쭉 들이켰다.
이성은 이제 여기서 그만하자고 말리기는 했다.
아무리 열 받아도 고신재 형한테 더 뭐라고 해서 어쩌려고, 하고 되묻는 목소리가 머리 어딘가에서 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한 번 입이 열리기 시작하자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백한빈 역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울화처럼 치밀어 오는 감정들을 지금 이 순간까지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던 탓이다.
“아! 그럼, 그때, 저한테 엄청 까칠하게 말한 건 둘 중 누구였어요?”
“네?”
“말하고 있는데 툭 자르면서 자긴 원래 게임 잘한다고 채팅 친 사람이요.”
“아…….”
특히 이렇게 지나간 억울한 순간들의 이면에 제가 모르는 진실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연락을 끊은 고신재에게 하지 못했던 질문세례를 쏟아내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
한편, 진영은 제 동생이 펄쩍 뛰며 기겁했던 순간의 등장에 왠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그건, 저였습니다. 죄송합니다.”
“…….”
“…그게…, 동생 말투를 따라 해보려다가 그만.”
머뭇머뭇 죄를 이어 고하자 파리했던 백한빈의 얼굴에 옅게나마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고진영은 그 혈색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닐 것을 묻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그건 퍽 정확한 짐작이었다.
한빈은 다른 날은 몰라도, 그 날만큼은 아주 세세한 것까지 분명히 기억했다.
그 날은 구상호에게 처음으로 한 방 먹인 날이면서, 고신재가 제게 담담한 고백을 이은 날이기도 했고, 또…… ‘가나’가 아닌 현실의 ‘고신재’와 첫 섹스를 한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백한빈은 제가 ‘가나’를 소개하려 만든 자리에 고신재가 기분이 상해 연락을 끊은 줄 알고 물과 비타민 젤리만 먹으며 이틀을 끙끙 앓았었다.
……그런데 그게 다 제 형이랑 짜고 친 판이었다니.
왠지 코끝이 찡할 정도로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 같아 입술을 세게 앙다문 한빈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요.”
“예, 예에.”
“저 왜 찾아오신 거예요, 정말로. 동생이랑 같이 사기 쳤다고 말하러 오신 것만은 아닐 거 아니에요? …고신재한테 무슨 일 있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이제 백한빈의 목소리에서는 처음의 냉랭한 독기보다는 끔찍한 자기혐오가 더욱 짙게 배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저를 철저히 속인 인간이 아직도 뭐가 그리 좋다고 그의 형이 연락하자마자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곧장 달려온 저 스스로가 한심해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고진영은 그 자포자기의 기운을 분명히 읽어냈다.
또, 백한빈이 무심코 꺼낸 문장 속 아주 약간의 가능성 역시 놓치지 않았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제 연락을 쳐내지 않고 곧장 수락한 한빈의 반응을 꽤 의외라고 생각했던 진영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혹시 제 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자, 다시 한 번 제 동생의 선택에 한숨이 나기도 했다.
……신재 녀석 혼자만 좋아 죽었던 건 아니었네, 다행히.
고진영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 달 전에, 신재한테 정말로 오랜만에 문자를 받았어요.”
“…….”
“친구랑 같이 PC방에 왔다며, 제 게임 아이디를 좀 쓰겠다고 하더라고요.”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뾰족한 눈매에는 점점 울컥함이 뚝뚝 묻어났다. 진영은 커다란 뿔테안경 너머의 그 까만 눈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빈 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때 그게 마냥 좋았어요. 동생이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먼저 해 준 문자라서요.”
백한빈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고진영이 말을 이을 기회를 빼앗지는 않았다.
진영은 그 물러 터진 배려에 감사하며 작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신재가 무작정 저를 붙잡고 자기인 양 게임 해 달라고 했을 때도 이걸 왜 해야 하는 거냐고 따지지도 않았어요.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고신재 그 새끼가 해 달라고 한 건데. 형님 분이 왜요.”
“제가, 형이니까요.”
사실 한빈은 형제간의 우애라든가 하는 감정이 꽤 먼 이야기다.
애초에 살며 단 한 번도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형이 옷을 대신 입었다든가 동생이 뭘 가져다 팔았다든가 하는 인터넷 일화만 봐도 피곤한 게, 외동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은 몇 번 했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고신재가 몇 달 만에 먼저 메시지를 해 줘서 좋았다든지, 형이라서 대신 사과한다든지 하는 문장도 전혀 와 닿지 않았다.
그저 형제 사기단의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진영은 그 불신 가득한 눈에 담긴 생각이 뻔히 읽혀서, 어디까지 솔직히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백한빈은 모를 동생의 모습을 조금 더 말하기로 했다.
“한빈 씨가 쓰러진 날……. 동생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목소리로 울면서 전화했어요.”
“…….”
“간신히 달래고 달래서 집에 데리고 온 다음에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한빈 씨 화를 풀 수 있냐고, 자길 다시 안 봐주면 어떡하느냐고 눈이 퉁퉁 붓게 또 울었고요. …솔직히 그땐, 이게 정말 내 동생 맞나 싶었습니다.”
그 순간 백한빈은 고진영을 똑바로 바라보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어딜 봐도 고신재를 비호하기 위한 문장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걔 근황 관심 없는데요.” 하고 무뚝뚝하게 말하지도 못했다.
사실 백한빈은 제가 까무룩 기절했던 날의 기억이 조금 뒤죽박죽이었다.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분명히 기억하지만 기절하고 난 이후로는 벽에 머리를 쾅 부딪치기라도 한 사람처럼 오락가락했다.
……고신재가, 울었던가.
백한빈은 병실에서 저를 보던 고신재의 얼굴이 어땠었는지, 뒤늦게 기억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치던 그땐, 백한빈 역시 자꾸 시야가 뿌옇게 변해서 고신재의 눈가가, 뺨이 어땠었는지 찬찬히 볼 여유가 없었다.
한빈이 그렇게 애써 당혹을 삼키고 있을 때, 처음으로 조금 웃음기까지 섞인 고진영의 폭로 역시 쉼 없이 이어졌다.
“아. 물론, 너 남자랑 사귀는 거냐고 놀라 물은 말에 자기 게이 된 지 오래니까 하나 마나인 소리 말고 건설적인 조언을 하라고 짜증 내는 거 보고, 고신재 맞구나 싶었지만요.”
“아, 하여간 고신재 걔는 진짜…!”
“그렇게 큰소리칠 거면 진작에 잘하지. 그렇죠? 잘못은 다 해놓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들여다볼 거였으면요.”
빙빙 돌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백한빈은 매일 밤 꼬박 하나씩 오는 메시지로는 알 수 없었던 남자의 근황 앞에서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미안합니다. 백한빈 씨.”
“…….”
“볼 면목이 없는 거 알면서도…. 저, 딱 다시 한 번만 만나서 이야기해 주면 안 되냐고 부탁하러 왔어요. 사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했었는데, 오히려 갈수록 이대로 두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래서….”
퍽 매끄럽게 말을 잘 이어가던 고진영은, 결국 끝내는 작게 문장 끝을 흐리며 그 역시도 시선을 떨구었다.
고진영 역시 백한빈이 병원에서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소리치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절망감을 잘 알아서, 지금 제가 하는 부탁이 얼마나 제 동생만을 생각한 것인지 모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고신재만큼이나 누군가에게 숙이고 살 일 없었던 그가 동생의 연인에게 모든 걸 내려둔 채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한편, 그런 고진영을 바라보는 백한빈의 표정은 전과는 다르게 조금 묘해졌다.
내내 말을 거는 걸 망설이는 게 고진영이었다면, 이제는 백한빈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기 시작한 거다.
그렇게 한동안 말을 고르듯 침묵하던 한빈은, 이내 긴장한 얼굴의 남자에게 제 고민의 결과를 꺼내 보였다.
“……저기요. 그럼, 저 뭐 하나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예? 예에! …뭐든지요!”
“그렇게까지 동생을 챙기시는 분이 왜 고신재랑 사이가 안 좋으시죠.”
물론, 그건 고진영 그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어퍼컷이었다.
시종일관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고진영은 처음으로 크게 휘청하며 멍하게 되물었다.
“……예?”
“물론 곤란하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툭 덧붙인 문장은 그 예민한 이목구비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조심성 없게 들리지는 않았다.
“사실 고신재 걔, 형님분 얘기 나오면 맨날 말 피하고 그랬거든요.”
“…….”
“-솔직히 저는 고신재 가족이라고 하면…, 죄송한데 좀, 신뢰가 안 가기도 해서. ……막말로, 지금도 저한테 친한 척 와서는 고신재 트집 잡으려고 떠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요.”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백한빈의 이 불신 가득한 문장을 들으며 제 진정성을 의심하는 거냐며 불쾌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고진영이 뒤통수가 뻐근해질 정도로 선명히 깨달은 건, 자신의 동생이 눈앞의 남자에게 감히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의존하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높다란 담장 안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외부에 말해서는 안 된다는 세뇌에 가까운 학습을 받은 건 고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진영은 처음으로 잠시 침묵했다.
“…….”
“…….”
이제 ‘뭐 얼마나 알고 있는 거냐’는 말은, 이제 고진영 그가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은 문장이 됐다.
진영은 제 불안을 토로하는 것 대신 작게 심호흡하듯 긴 한숨을 삼켰다. 이 순간 잠시나마 적당한 말을 둘러대고 싶다는 회피 욕구가 치밀어 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만큼은 몇 년 만에 저를 먼저 찾았던 동생을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것 하나만.
“……한빈 씨는, 신재가 왜 무용 시작했는지 들었나요?”
백한빈은 난데없는 질문 앞에서 그 이면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닌지 잠시 고민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고작 짤막한 대답 하나에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뇨.”
“저 때문이었어요. 신재가 일곱 살이고, 제가 열한 살이었죠.”
고진영은 그런 백한빈의 망설임을 다 읽었다는 듯, 서글서글한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사실 백한빈은 그 순간 문득 저렇게 눈웃음치는 것조차 고신재랑은 참 다르네, 하는 생각을 했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꽉 들어찬 섬세한 인상인 고신재와는 달리 고진영은 유독 쌍꺼풀도 짙고, 선이 진했다.
고신재와는 사뭇 다른 맑은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그때, 동생은 딱히 무용에 관심 있던 애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때 무용을 했던 건 제가 좋아하던 여자애였죠. -그러다 화이트 데이였나. 부모님 몰래 그 친구한테 줄 사탕을 샀어요.”
“…….”
“가정교사들한테는 신재한테 간식 사주고 싶다고 둘러대고는 신재랑 같이 나가서 사탕을 골랐었죠. ……형이 좋아하는 애한테 줄 건데, 그 애는 무용하는 애야, 하고 비밀도 말해주면서.”
고진영은 189cm의 건장한 남자로 자란 고신재의 어린 시절을 멍하게 상상하는 백한빈을 보며 “신재는 화이트데이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같이 열심히 사탕을 골라줬고요.” 하고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어린 날의 동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그렇게 고른 사탕을 준 날로 제 짝사랑은 끝났죠.”
“…왜…요?”
“제게 사탕을 받은 친구가, ‘다리 병신한테 사탕 받았다’는 놀림을 받고, 교문 앞에서 펑펑 울면서 그걸 제 얼굴에 던졌거든요.”
“…….”
“지금은 계속 재활도 하고, 수술도 받으면서 괜찮아졌지만…. 그땐, 아주 어렸을 때 당한 사고 후유증 때문에 커서도 다리를 절 수 있다는 말을 늘 들었어요. ……뭐, 그땐 키도 작고, 몸도 약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