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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맞다. 백, 너는 오늘로 기말 다 끝난 거지? 이번 학기 끝?”
“어.”
“좋-겠다. 난 내일까지인데에에. ”
“교양 하나라며.”
“그래도.”
고신재는 제 옆에 앉은 백한빈과 김푸름을 슬쩍 곁눈질하며 그들의 일상적인 대화를 엿들었다.
백한빈과의 첫 접점이었던 이 <사진으로 바라보기> 강의에서 사진과 두 사람과 무용과 두 사람이 앉는 순서는 어느새 고신재, 백한빈, 김푸름 그리고 김유민으로 서로 말을 맞춘 듯 일정해졌다.
이건 모두의 평화를 위한 자리 배치였다.
애초에 같이 시간표를 맞춰 들어왔던 것이 무색하게 대화는커녕 눈인사조차 하지 않게 된 무용과 두 명의 어색함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거리이기도 했고, 달짝지근한 연애에 빠져 1분 1초가 아쉬운 연인에게도 만족스러운 위치 선정이었다.
……물론, 그 사이좋은 연인의 사이에 묘한 서먹함이 감돌기 전까지는 말이다.
백한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고신재는 제 휴대폰 액정이 깜박이는 걸 보고 흘끗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한 칸 건너 앉은 김푸름이었다.
[야야]
[너네 둘 설마 싸웠냐?ㅠ]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치가 좋은 애인의 베스트 프렌드는 언제나 버겁다.
고신재는 의자 뒤편으로 시선을 던지는 김푸름을 모르는 척하고 막 문을 열고 들어온 교수 쪽으로만 고개를 고정했다.
고신재 그가 막연히 품던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이제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확신이 됐다.
이건 과민반응도 죄책감에 제 발 저린 것도 아니다.
게임에서 잘못된 루트를 타면 만나는 NPC마다 음울한 말을 툭툭 던지고 배경 곳곳이 불길해지는 것처럼, 살면서 처음으로 해피엔딩이길 바랐던 현실 여기저기서 최악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분명하다.
확실히 한빈은 뭔가를 알게 됐다.
하지만 그게 뭔지,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이틀 전 백한빈이 그렇게 사람 마음을 무너지게 할 정도로 꾹꾹 참는 울음을 터트리고 난 뒤, 부쩍 ‘평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걸 볼수록 미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안녕하세요. 자. 마지막 날이네요. 한 학기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 것 같은데…. 하하, 이건 나만 그런가. 오늘은 뭐 별것 안 할거에요. 아직 시험 남아있는 친구들도 있을 거고-.”
별것 안 한다는 교수치고 정말 별것 안 하는 교수를 본 적 없는 학생들의 얼굴에 옅은 긴장이 감돌았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은 정말 할 게 없는 날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지난 주말까지 제출한 한 학기 간의 사진을 교수가 직접 무작위로 보여주기로 한 날이라, 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할 일이 없었다.
교수는 사람 좋게 웃고는 USB를 컴퓨터에 꽂으며 조용하던 강의실 안에 폭탄을 휙 내던졌다.
“학기 초에도 말했다시피, 오늘은 지난 주말까지 여러분들이 낸 기말과제 중에서 몇 과제를 함께 보는 시간을 가질 거에요. -아! 물론 오늘 보여주는 것만 A+이다, 이런 말은 절대 아니에요? 시간관계상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이 순간 학생들이 술렁이며 앓는 소리를 내는 이유는 불특정 다수의 앞에서 한 학기를 같이한 상대가 찍은 제 사진을 함께 보는 민망함 때문이건만, 그걸 모르는 척 눙치는 교수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매끄럽기만 했다.
물론 빔 프로젝트에 연결된 컴퓨터 화면 위로 움직이는 마우스의 움직임이 부담스러운 건 교수를 몇 년째 보아온 사진과 전공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푸름은 턱을 긁적이면서 제 옆에 있는 또 다른 사진과 동지, 백한빈에게 슬쩍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와, 씨. 설마 사진과라고 또 굳이 집어 보여주는 거 아니겠지. 완전 부담스러운데. 공개처형 아냐, 공개처형.”
“…….”
“백, 너는 고신재가 예쁘게 찍어주든?”
“…뭐….”
백한빈은 작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꽤 자신만만해 보였을 거다.
애초에 백한빈과 고신재는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오는 것과는 달리 미동조차 없는 유일한 조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실 같은 조이자 연인인 두 사람의 침묵은 단단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결과물을 못 봤다.
학기 내내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의 사진을 찍는 동안 처음에는 서로 서먹한 사이라서 교수의 말대로 각자의 사진을 확인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 다 찍고 확인하자며 내기하듯 안 봤다.
그러다 정작 기말과제를 제출하는 최종 기한이었던 저번 주말에는, 교양 과제로 네가 찍은 사진 내 사진이 궁금하다며 웃고 장난칠 기분이 아니라 말을 꺼낼 생각조차 못 했었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대체 고신재는 날 몇 달간 어떻게 찍었을까.
뒤늦게 삐죽 머리를 든 호기심에 슬쩍 시선만 굴리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 한빈은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을지 모를 나른한 눈매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
“…….”
눈만 마주쳐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가까스로 감춰야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부러 미소를 걸어야 하는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그 순간의 심란함이란.
고신재는 쥐고 있던 펜으로 노트 귀퉁이를 괜히 끄적끄적 까맣게 물들였고, 백한빈은 볼 안쪽의 살을 조금은 얼얼해질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교수의 목소리는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하하.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 전부의 사진을 다 같이 보고 싶은데, 시간관계상 그건 좀 힘들고. …자, 그럼 어디…. 경영 ??? 학생이랑, 신소재공학 ??? 학생이 제출한 서로의 사진부터 봐볼까요.”
“-아!”
호명된 사람들일 것이 분명한 외마디 탄식이 강의실 저편에서 터져나왔다.
교양 사진 강의의 재미는, 역시 전공에서는 자주 볼 수 없던 작정한 개그 컨셉의 사진이나 다른 전공의 강점을 살린 독특한 작업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만 아니면 되는 한 쌍 한 쌍의 사진이 공개될 때마다 여기저기서 웃음과 작은 탄성이 번갈아서 났다.
덕분에 처음에는 부담감에 조금 얼어있던 백한빈도 시간이 흐를수록 슬슬 긴장이 풀려서 강의실의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뻣뻣하게 굳었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걸고 화면을 볼 수 있었다.
슬쩍 시계를 보니 늘 강의를 빨리 끝내주는 교수의 성향상 슬슬 한 학기 수고했다며 마칠 시간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어째 오늘은 안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진과 백한빈 학생이랑, 무용과 고신재 학생.”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끔찍한 호명에 ‘그래. 역시 사진과 교수가 사진 교양에서 사진과 사람을 효수하지는 않겠지.’ 하고 내심 안심하며 필통에 볼펜을 집어넣고는 슬금슬금 소심하게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던 백한빈의 고개가 휙 올라갔다.
물론, 그와 동시에 왼쪽 옆에 앉은 김푸름에게서는 ‘크흠’과 ‘푸흡’의 중간 소리가 쥐어짜 내듯 나기도 했고, 어디선가 ‘오. 사진과.’ 하는 부담스러운 중얼거림이 들리기도 했다.
이렇게 깔 거면 왜 하필 마지막인데, 진짜 왜!
한빈은 차마 한숨조차 쉬지 못하고 테이블 밑의 다리만 배배 꼬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의 한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호호, 우리 사진과 친구가 배신당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왜, 그만큼 두 사람 사진이 재밌게 나왔다고 생각해요.”
“…….”
내년 졸업 과제 때 지도교수를 저분으로 하고 싶다 생각하기까지 할 정도로 평소에 좋아하고 따르던 교수의 배신 아닌 배신은 퍽 쓰라렸다.
쟤인가 봐, 하며 주변에서 슥 쳐다보는 시선에 한빈은 얼른 시선을 책상 위로 내리깔았다.
그렇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 먼저 이 조의 1주차 사진을 봐볼까요. 1주차는 ‘첫인상’을 주제로 아웃포커싱을 이용한 인물사진, 이었죠.”
……쪽팔린 건 쪽팔린 거고, 솔직히 궁금하기는 해서였다.
괜히 열 오른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한빈은 이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슬금슬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첫 사진을 찍던 날.
사실 그 날은 백한빈에게는 무난하게 굴러갔을 대학 생활을 뒤집은 전환점이 된 날이었다.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과 남자에게 들키고, 그가 자신 역시 게이라고 말했던, 돌이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이어졌던 날이다.
……그때,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 대신 고신재를 밀어내면 어떻게 됐을까.
한빈은 이제 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우와아!”
“허어….”
먼저 빔 프로젝트의 영사 화면을 가득 채운 건 백한빈의 사진이었다.
한빈은 여기저기서 탄성에 가까운 반응이 일렁이는 걸 들으며 제발 자신의 얼굴이 벌겋게 익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과제를 띄워두고 다 같이 합평하는 건 전공 강의 때도 수없이 했던 거고, 심지어는 학기 말마다 교내 과제 전시까지 늘 해왔었는데도 왠지 오늘만큼은 양 볼이 간지러웠다.
“‘첫인상’. 피사체가 훤칠한 건 제쳐놓고…, 꽤 복잡한 사진이죠?”
백한빈은 툭 질문을 던지는 교수의 시선이 슬쩍 지긋이 제게 닿는 걸 모르는 척하며 작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첫인상.
백한빈은 그 순간의 혼란을 슬쩍 사진에 담았었다.
이 강의실의 모두가 한 번쯤은 지나쳤을 예술대 건물 근처 익숙한 공간에서 고신재라는 피사체를 완전히 분리하고, 그림자로 사진을 찍는 저와의 선을 그었다.
빛을 받는 쪽의 얼굴과 그늘진 얼굴의 경계를 일부러 뚜렷하게 드리우게 하자, 고신재는 동그랗게 소용돌이치는 배경 속에서 혼자 투명하게 뜬 채로 반짝였다.
짝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
대하기 어렵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저 그린듯한 얼굴과 몸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처럼 웃으며 꿈속에 나와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
백한빈의 첫 사진에는 그 순간의 떨림과 고민이 너무 선명하게 담겨있었다.
한빈은 그런 제 생각을 교수가 훤히 읽은 것 같아 손바닥에 식은땀까지 났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 제 옆에 앉은 사진의 당사자가 어떤 표정으로 화면을 보고 있을까 싶어 속이 콩닥콩닥 뛰기도 했다.
그때 교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 그럼 같은 날 찍은 우리 무용과 학생의 첫인상을 한 번 볼까요.”
솔직히 화면이 넘어가기 직전의 찰나에 조금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쨌거나 몇 달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고신재가 찍어준 제 모습이니 말이다.
하지만 화면이 바뀌는 순간, 강의실을 채운 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헛웃음을 넘어 약간의 당혹마저 느껴지는 애매한 반응이었다.
“…어어….”
“아…….”
“…….”
고신재가 꽤 괜찮은 중급기에 오, 하고 혀를 내두를 비싼 단렌즈를 들고서 ‘이거 왜 줌이 안 되는지 알아?’ 라고 물어봤을 때부터 이 사태를 예견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생각해보면 꽤 심술궂게 웃기만 했던 그때도 ‘지금 네가 쓰는 렌즈는 줌 안 되는 렌즈인데.’ 라고 말해주자 뭐 이런 구린 게 다 있냐는 눈을 감추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백한빈은 아웃포커싱을 하라니까 초점을 이파리에 맞춰 피사체인 저를 뿌옇게 날려버린 처참한 사진을 보면서 잠시 할 말을 잃고 앞만 보다가, 이내 고신재가 펼쳐둔 그의 노트 귀퉁이에 펜을 휘갈겨 썼다.
[야 진심 저게 베스트였음??]
그러자 어울리지도 않게 멍하게 앉아 있던 고신재는, 한 박자 늦게 평소엔 그렇게도 여유만만하던 얼굴에 선명한 당혹을 가득 띄운 채로 구구절절한 변명을 또박또박 힘주어 적기 시작했다.
[미안 카메라로 볼 땐 괜찮은 거 같았는데 집에서 컴퓨터로 보니까 다 저래서...]
무슨 상황인지는 잘 알겠다.
카메라 액정으로 확대해보지도 않고 대충 봤을 때는 최소한 초점은 맞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다.
처음 카메라를 잡는 입문자들의 흔하디흔한 실수고, 그걸 이해 못 할 만큼 속이 좁지도 않다.
하지만 백한빈이 답지 않게 울컥한 속을 감출 수 없는 건, 저 사진의 테마가 ‘첫인상’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배경에 묻힐 정도로 뿌옇고, 그렇지 않아도 고신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로세로 길이가 유독 더 왜소하고, 짤막해 보이는 허여멀건 한 말라깽이.
백한빈은 아주 예전, 고신재가 제 첫인상을 지나가듯 ‘조금 무뚝뚝했던 것만 빼면 굉장히 인상 깊었다’ 라고 말했던 것을 괜히 상기하며 작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저런 의미로 인상 깊었다고 한 거라면 더 알고 싶지도 않다.
그 우울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