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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이 바빠? 오전 11:03
가나
안녕
그냥 조금 컴퓨터 할 시간이 없네 오후 12:20
ㅋㅋㅋㅋㅋ
왠지 바쁜거 같더라 오후 12:20
가나
하마 너는? 오후 12:21
나도 슬슬 기말과제랑 시험 준비에 치이는중ㅠㅠ
점심 맛있게 먹어 오후 12:21
웬일로 고신재와도, 김푸름과도 시간이 맞지 않는 어느 점심시간.
백한빈은 학교 앞 한 식당 안 가장 구석에 앉아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혼자 부유하듯 떠서 제 카메라에 붙은 작은 틸트 액정 속의 반듯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백한빈의 카메라 메모리 안에는 참 이런저런 사진들이 가득하지만, 요즈음 찍은 사진 중 유독 자주 등장하는 건 살짝 눈꼬리가 처진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다.
“…….”
분명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교양 사진 과제를 위해 찍었던 얼굴이었다. 대단한 공을 들이지도 않았다.
제아무리 사진과 전공 교수가 진행하는 사진 강의라고는 하지만, 교양은 교양이다.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라는 대학과정의 소양을 위해 수박 겉핥기로 진행되는 입문수준도 아닌 즐거운 맛보기가 목적인 과제였으니, 교수가 내준 주제에 맞추는 데 충실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길고 늘씬한 남자는 백한빈에게 꽤…… 중요한 사람이 됐다.
처음엔 그저 막연한 짝사랑을 소곤거릴 수 있는 대나무숲이 생겨서 좋았다.
하지만 고신재가 제게서 큰 의미를 차지하게 된 건, 살며 누군가에게 알릴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했던 제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이어서만은 아니다.
고신재는 백한빈의 편이었다.
그가 애초에 동성을 좋아하는 쪽이라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고신재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온라인 속 남자를 좋아한다는 영문모를 소리에도 언제나 신중한 눈을 했다.
서툰 짝사랑에 절절매며 늦은 밤 전화를 걸어도 단 한 번 귀찮아하는 내색 없이 떨리는 속을 달래주었고, 엉망진창으로 꼬여가는 콤플렉스 가득한 대학 생활도 그 단단하고 늘씬한 남자가 뒤에 서 있으니 무섭지도, 막연하지도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해도 예쁘게만 봐 주는 ‘내 편’.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제 마른 몸을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다는 듯이 입 맞추고 말끝마다 예쁜데, 귀여운데, 좋은데, 셋 중 하나는 꼭 달고 다니는 사람.
자는 걸 깨우면 비몽사몽 한 와중에도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좋은 목소리를 누가 뭐라고 그래, 백한빈.” 하면서 잠기운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사람.
이건 가족이나 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백한빈은 제 카메라 액정 속에서 예쁜 눈웃음을 치는 남자의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가나도 달라진 거 하나도 없던데, 뭐….”
가나다라123은, 그러니까 저와 동갑내기 대학생인 ‘박종우’는 오랜만에 보낸 문자에도, 당장 어젯밤까지 서로 연락했던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답을 보냈다.
이제 3학년이고, 학점도 중요하니까.
할 일도 많을 테니까, 게임은 둘째 치고 아침저녁으로 주고받던 연락이 사라진 건 대단한 의미부여를 할 일이 아니다.
“세상에 우연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에 차고 넘치는 동명이인을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백한빈의 일상은 자꾸 삐걱삐걱 듣기 싫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장 같은 과 사람들만 봐도 ‘김지혜’가 둘인데, 그깟 게 뭐라고.
백한빈은 꼭 저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 잔뜩 힘을 준 혼잣말을 웅얼대면서 카메라 전원을 꺼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 한구석에서 자꾸 삐죽 머리를 드는 따끔따끔한 생각들까지 끝난 건 아니었다.
……예컨대, ‘시간표를 같이 짠 것도 아닌데 겹치지 않았던 과목이 모두 겹칠 수 있는 게, 가능한 일일까?’ 같은 자문 같은 것들 말이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숨을 간신히 삼키며 ‘고신재’와 ‘가나다라123’, 그 어느 쪽에게도 연락 없는 점심시간을 아슬아슬하게 견디고 있었다.
그때였다.
“학생. 여기 합석 좀 될까?”
“네? 네네.”
“여기 앉아요. 여기 제육 하나!”
점심시간, 정문 바로 옆인데다가 가격도 저렴해서 유독 인기 많은 식당에서 합석이란 2인용 테이블을 혼자 쓰는 나홀로 손님의 숙명 같은 일이었다.
한빈은 제 카메라를 가방에 얼른 넣으며 저도 모르게 한껏 굳은 채였던 얼굴을 괜히 손으로 쓸면서 제 맞은편에 앉게 된 마찬가지의 혼밥족을 그제야 흘끗 바라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백한빈의 맞은편에 가방을 걸고 앉은 남자는 교내 인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 백한빈이 안면을 튼 몇 안 되는 다른 과 사람이었다.
그것도, 내내 백한빈의 머리를 가득 채웠던 장본인과 같은 무용과의 사람 말이다.
한빈은 저와 눈이 마주치고 어, 하고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뜬 남자를 향해 먼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어, 그. 사진과… 이름이, 어떻게 되셨더라.”
“백한빈…이요.”
“맞다.”
김유민.
백한빈은 저와 마주 앉은 남자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저 동기랑 친해?” 하고 고신재에게 슬쩍 묻자 물은 것에 대한 대답 대신 “뭐. 우리 학번에 남은 남자가 나랑 김유민 둘 뿐이지.” 라는 의미심장한 선을 긋는 문장이 돌아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한빈은 저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턱을 긁적이는 남자와 최대한 잘 지내보고 싶었다.
그건 낯을 굉장히 가리는 백한빈에게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김유민은 백한빈이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과 모두 관련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그리 친하지는 않더라도 여초 학과에서 단둘뿐인 동성 친구는 고신재의 남은 대학 생활에서 적잖은 연결고리가 있을 게 뻔했고, 김푸름과 함께 찍는 교양 과제도 별다른 트러블 없이 화기애애하게 잘 굴러가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한빈은 작게 목을 가다듬고는 답지 않게 또다시 먼저 입을 뗐다.
“…푸름이랑 과제 사진은 다 찍으셨어요?”
“예? 아, 하하, 이따가 만나서 마지막 사진 찍으려고요. 저, 그런데 푸름이하고도 말 놨는데. 우리 말 놓을까요. XX년생 맞죠.”
다행히도 상대는 백한빈이 어색하게나마 쥐어짜 낸 친화력을 퍽 유들유들하게 잘 받아주었다.
백한빈은 괜히 힘이 들어간 어깨를 그제야 늘어트리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신재가 조금은 묘하게 웃으며 ‘친하다’의 영역에서 곧장 쳐 내길래 걱정했는데,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보니 괜한 걱정이다 싶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늘은 신재랑 같이 밥 안 먹어?”
“어, 어어?”
“요새 늘 붙어 다녔잖아. 아주 소문이 자자해. 고신재가 맨날 사진과 강의실 근처에서 산다고.”
……심지어 고신재와 제가 같이 다니는 것도 꽤 잘 알고 말이다.
백한빈은 그 순간 저와 김유민 사이의 테이블에 나란히 내려진 음식을 보면서 어색하게 턱을 긁적였다.
한빈이 고른 순두부찌개와 유민이 고른 제육볶음에서 먹음직스러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한빈은 분주한 손으로 반찬까지 올려둔 식당 직원이 발을 총총거리고 멀어진 뒤에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신재가 점심은 전공 교수님이랑 뭐 일이 있대서. 푸, 푸름이도 전공 과제 때문에 뭐 회의 있다고 하고.”
“……아아, 뭐. 공연 때문인가 보네.”
불행인지 다행인지 김유민은 나름대로 안전 쿠션처럼 덧붙인 김푸름의 근황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빈은 숟가락으로 얼큰한 붉은 국물의 순두부찌개를 한 입 떠먹으면서 ‘같은 과도 아닌 사람이랑 붙어 다니는 걸 다 알 정도로 무용과가 좁나?’ 하는 순진한 상상을 했다.
제 애인이 된 남자가 얼마나 눈에 띄고, 또 띌 수밖에 없는 사람인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그가 제 옆에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진 탓이었다.
마찬가지로 식사를 시작한 김유민의 은근한 질문이 연이어 이어진 건 그때였다.
“대체 신재랑은 언제부터 알던 사이야?”
“응?”
“고등학교 친구? 대학 친구라고 하기에는 신재 근처에서 전에는 못 본 거 같아서.”
사실, 이때 까지만 해도 백한빈은 고신재에게 “너희 과 김유민이라는 사람, 신재 너랑 되게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던데?” 하고 지금 이 순간을 웃으며 전할 수 있었을 거다.
굳이 몇 마디 덧붙이자면 “너 사진과 근처로 그만 와. 소문났대.” 정도의 장난기 어린 문장이 다였을 거고 말이다.
하지만.
“나도 이번 사진 교양 전까진 고신재 전혀 몰랐어.”
“뭐? -그럼 시간표는?”
제육볶음의 고기를 크게 한 입 넣어 삼키는 김유민의 입에서 자꾸 백한빈의 속을 내내 콕콕 따갑게 쑤시던 단어 하나가 삐죽 튀어나온 순간.
이 왁자지껄한 공간에서의 평범한 식사는. 고신재에게만큼은 말할 수 없는 첫 비밀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시간표?”
“푸름이가 그러던데. 고신재랑 너 교양 다 겹친다고. 와, 그 말 듣고 얼마나 기가 차던지. 내가 교양 하나 같이 듣자고 사정사정해도 그렇게 싫다고 튕겼던 새끼가, 너랑은 다 맞추네 싶어서.”
각자의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들로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찬 작은 식당 안은 적당한 익명성과 소란으로 평범을 가장한 목소리를 내기 딱 좋았다.
한빈은 제육덮밥을 크게 떠먹으며 말을 잇는 김유민을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맞추긴. 맞춘 거 아니야. 어쩌다…, 우연으로.”
“우연? 에이, 야. 사진 교양 그거 하나 고신재가 간신히 오케이 한 것도, 자기 주4 시간표 안 망치는 거라 해 준거였는데?”
“…….”
“갑자기 전선도 하나 빼고 교양 끼고 주5로 꽉 채워 간다길래, 난 뭐 어지간히 친한 녀석인가보다 했지. 조 정할 때도 2인 1조도 콕 집어 너랑 한다고 하고.”
자연스러우려면, 이상해 보이지 않으려면 나도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백한빈은 제가 몰랐던 저 반대편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 김유민 앞에서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계적으로 손이 움직이기는 했다.
여전히 까만 그릇의 가장자리가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조금 떠서 밥 위에 얹자 꽤 먹음직스러운 모양이 됐고, 그걸 이제 입안으로 밀어 넣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왠지 들끓는 듯한 속에서 먼저 툭 튀어나오고 만 건, 왠지 꽉 막힌듯한 듣기 싫은 저 자신의 목소리였다.
“신재가 그랬어?”
“어. 안경 낀 쪽이랑은 자기가 한다고. -왜, 진짜 아는 사이 아니야?”
“…….”
“고등학교 친구 아니면 중학교나, 초등학교나…. 아니 뭐.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인 게 더 신기하네. 하하.”
김유민이 뭐라고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가 귓가를 빙빙 맴돌았다.
대답 대신 제가 숟가락 위에 예쁘게 올린 음식을 한 입 넣어 씹어 삼키는 걸 택한 백한빈은 가까스로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백한빈은 그럴 수 있는 저 자신이 놀라웠다.
OT주에 고신재와 겹쳤던 과목은 단 하나였다.
<사진으로 바라보기>.
그건 지금 맞은 편에 앉은 김유민은 물론이고, 백한빈의 카메라 메모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 고신재라는 무용과 남자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백한빈은 그 날 고신재의 이름 석 자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했고 또 어떤 목소리를 냈었는지는 꽤 선명히 기억한다.
저절로 시선이 따라 올라갈 정도로 큰 키에 살짝 처진 눈꼬리로 상냥하게 웃던 얼굴. 거기에 왠지 옆에 나란히 서는 것조차 피하고 싶은 훤칠한 체격까지.
고신재는 어디에선가 본 다음 잊기에는, 너무나 존재감이 뚜렷한 남자였다.
낯선 무용과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목소리 앞에서 얼마나 놀랐었는지도 어제같이 기억난다.
덕분에 그 앞에서 한참을 바보같이 얼어서 뻣뻣하게 굴었다.
아니, 그걸로도 모자라서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전력 질주로 도망도 쳤다. 너무 놀라 눈앞이 핑핑 돌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무서웠을 정도였는데도, 어떻게 저 목소리가 세상에 둘일 수 있나 싶어서 속이 벌렁거렸었다.
하지만 백한빈이 그 날을 선명히 기억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다.
5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제 이야기는 한 번 하지 않던 가나가, ‘하마. 너 어디 살아?’ 하고 갑자기 물어봤었으니까.
가나는 서울에 산다고 했다.
그래서, 그 답 앞에서 저는 살며 몇 번 가 보지도 않은 부산에 산다며 거짓말을 했었고. 또…….
백한빈은 입안에서 아무런 맛을 내지 않고 굴러다니는 밥알을 기계처럼 씹으면서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순간들의 조각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혹시 내가 시간표를 너 따라 바꿨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거야, 한빈아?」
「아침 9시에 하는 ‘러시아 문학의 이해’랑, 학교 주4 나올 수 있는 것도 포기하고 금요일 11시부터 1시까지 애매하게 들어서 오전도 오후도 다 버리는 ‘현대 건강 생활’같은 걸…… 한빈이 너랑 같이 교양 듣겠다고 바꿨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고신재는 꼭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이 말했었다.
백한빈 역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에 동의했고, 그래서 우연이겠거니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때는.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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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최대한 자주 찾아뵙고 싶은 요즘입니다.
갑자기 부쩍 추워진 날씨에 건강 상하시지 않도록 늘 유의하세요!
그럼 또 며칠 뒤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