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사진과 둘과 무용과 하나.
어느새 이 조합은 그 당사자들 모두에게 당연하리만치 편한 조합이 되었다.
처음에는 흘끔흘끔 시선을 주던 사람들도 서로 다른 그림체의 세 사람이 함께 다니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기 시작했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 조합에는 ‘쟤들 참 친해’라는 얄팍한 가늠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비밀이 있다.
“많이 피곤해?”
“과제 하느라 밤 샜어….”
“잠은 자면서 해야지. 오늘은 집에 바로 가. 나 기다리지 말고.”
“어차피 학교에 있어야 돼. 사진 모델 서주기로 한 애들이 저녁에만 시간 된대서.”
세 조합의 구성원 중 하나이자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김푸름은, 교양동 휴게실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를 살살 녹여 먹으면서 아주 꿀이 떨어지는 두 남자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인싸 소리를 들으며 크고 작은 모임에 끼어본 푸름이지만 지금처럼 저 자신이 솔로로 죽어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느껴진 적이 또 없다.
그래도 네다섯 명은 되는 무리에서 커플 하나쯤 있는 거였지, 그 둘 옆에 붙어 다니는 건 처음이다.
푸름은 과자를 입에 하나 더 쏙 넣으며 제 친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를 스윽 눈에 담았다.
살면서 유명인을 본 경험이라고는 집 근처 주택가에서 무슨 드라마를 찍을 때 저만치서 본 게 다이지만, 김푸름은 저 단정하고 나른한 이목구비의 남자가 그 내로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떨어트려 놓아도 꿀릴 게 없는 사람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5년 지기 대학 친구에게 푹 빠진 남자는 적당히 훈훈하다 싶은 일반인의 영역에서 그 훌쩍 자란 키만큼이나 벗어나 있다.
보면 볼수록 저 녀석은 어떻게 이름까지 고신재일까 싶은 잘난 인간이라고나 할까. 너무 다른 세계에 있어서 흔한 자격지심조차도 안 든다.
한편, 답지 않게 옅은 초조까지 품은 얼굴로 백한빈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신재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입조차 다물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내 집에서 한숨 자.”
보통의 대학생들은 학교 근처에서 지낼 때 ‘집’이라는 단어보다는 ‘자취방’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그 묘한 위화감이 도는 단어 사용을 뭐라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고신재에게 집이라는 단어는 꽤 한정적으로 쓰인다. 게다가 그 제안을 받은 당사자는 그 표현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입술이 거의 허옇게 질리기까지 한 백한빈은 반쯤 감고 있던 눈꺼풀을 간신히 잡아 떴다.
아무리 친절한 제안이라고 해도 이 예민한 성격과 몸으로 타인의 낯선 집에서 잠이 올 리가 없는 한빈은 평소 같았으면 애초에 고민도 안 하고 거절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그 집에서 잠보다도 더한 것들을 했던, 어쨌거나 현재 절찬리에 연애 중인 애인이었고 오늘은 정말 뼈와 근육이 녹는 것 같이 피곤한 날이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던 한빈은 이내 작게 물었다.
“……그래도 돼?”
“당연하지. 출입 카드는 네가 가져가고, 현관 비밀번호는 톡으로 보내둘게.”
“카드 없으면 너는?”
“나는 경비가 얼굴 아니까.”
고신재와 백한빈은 둘이 사귄다는 걸 모르고 들으면 참 서로 다정다감한 친구지만, 그 내막을 알고 보면 정말 여느 연인과 다를 바 하나 없다.
좀 더 정확히는 고신재쪽이 눈도 못 떼고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저 친구 사이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처럼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쓸면서 쩔쩔매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백한빈도 아예 티가 안 나는 건 아닌 게, 고신재가 제 옆에 앉자마자 인사 대신 그의 어깨에 기대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으니 어쩌면 이쪽이 좀 더 자연스럽게 경계를 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신재는 카드키를 건네면서 조금 눌린 백한빈의 머리를 다시 예쁘게 띄워주었다.
“부엌 바로 옆에 있는 방 빼고는 편히 써. 거긴…… 형 방이라서.”
“네 방이랑 거실 말고 내가 들어갈 게 뭐 있어.”
“…그래. 나 이제 가 봐야겠다. B동에서 전공 있어서.”
“응, 고마워. 이따 봐.”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던 고신재는, 백한빈이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나마 이따 보자고 꼬박 덧붙여 인사하는 문장에 순식간에 화사한 눈웃음을 걸었다.
그건 이제 백한빈은 꽤 익숙해진 예쁜 미소다.
하지만 실시간 스트리밍 로맨스 영화를 보듯 옆에서 관전하던 김푸름에게는 퍽 달랐다.
푸름은 내심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휴게실 안의 사람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소머즈가 와도 못 엿들을 만큼 주변의 사람이 적어졌을 때, 크게 기지개를 켜며 느릿느릿 짐을 챙기는 한빈에게 작게 속삭였다.
“백, 그런데 말이다.”
“어.”
“대체 어떻게 해야 저렇게 끔벅 죽냐?”
“어?”
“아니, 내가 가만히 보니까 생각보다 다를 게 없다 싶어서 말이지. 여친 사귀는 거랑 원리는 같지 않을까 싶길래. 저 인성까지 쥐락펴락하는 방법 좀 배워볼까 싶어서.”
“갑자기 뭔 소리래.”
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피곤해서 머리가 재깍 안 돌아가서라고 하기에는 이어지는 문장마다 곧장 이해되는 게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간 표정이 답답하기라도 한지 김푸름은 주변을 한번 휘익 둘러본 다음 조금 전까지 고신재가 앉았던 백한빈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바짝 붙이곤 곰이라는 별명이 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작게 말을 이었다.
“고신재가 너 훨씬 많이 좋아하잖아. 어쩌다 걔가 너한테 끔벅 죽냐고.”
“……그래 보여?”
“완-전! 완전 백한빈 네가 갑인데.”
의심 하나 없는 확신에 찬 김푸름의 대답에 피로와 다크서클이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뾰족한 눈매가 느리게 깜박였다.
푸름은 그 떨떠름한 반응이 마뜩잖다는 듯 제 친구를 몇 번 채근했다.
하지만 5년 우정이 무색하게 백한빈은 그 노하우- 아니 하다못해 흔한 비하인드조차도 털어놓지 않았다.
사실, 좀 더 정확히는 못 했다는 게 맞긴 하지만 말이다.
덕분에 백한빈은 제 뒤통수에 대고 장난스러운 야유를 보내는 친구의 등짝을 한 대 후려치고 고신재가 사는 학교 근처 주상복합으로 발을 옮기면서 천근만근 무겁게 쏟아지는 피로보다 묘한 몽롱함이 앞섰다.
……남이 보기에 고신재가 날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을까?
한빈은 두 번 와 본 높다란 건물의 앞에서 어색하게 카드키를 가져다 대고 높다란 27층 건물까지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그 달짝지근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괜히 멍하게 휴대폰을 한 번 확인하자 고신재에게서 온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 : 753951*]
[집에서 편히 입고 있을 옷은 드레스룸 왼쪽 제일 안쪽 옷장 안에 있어]
[푹 자고 있어 전공 끝나고 가서 깨워줄게]
한빈은 고작 6인치의 휴대폰 속 활자들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속이 몽글몽글해질 수 있다는 걸 요즘 부쩍 깨닫고 있다.
고신재의 첫인상을 떠올려보자면 솔직히 그 웃는 낯으로 사람에게 무안을 주던 높다란 키의 잘난 인간이 이렇게까지 다정할 수 있을지 몰랐다는 게 솔직한 감상일 거다.
심지어는 그런 남자와 친구를 넘어 이런 관계가 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같은 학교라는 걸 빼면 학교생활을 하며 스쳐본 기억조차 없는 남자가 이렇게나 완벽한 애인이 되어 2순위라도 제게 달라며 매달리는 상황이라니.
사실 따지고 보면 온라인에서 5년간 알고 지낸 친구보다 애인이 되기에는 더 희박한 확률이 아닌가 싶다.
한빈은 휴대폰 액정 위를 한 번 손가락 끝으로 쓸어서 화면을 민 다음, 수많은 메시지들 사이에서 최상단 고정이 되어 있는 채팅방 하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
5일.
누구는 덩달아 같이 좋아해도 되니까 자기랑도 사귀어 달라며 이렇게 끔찍하게 구는데, 명색이 1순위를 차지한 짝사랑 상대는 닷새간 서로 그 흔한 인사 하나 나누지 않았다.
이틀까지는 “씨이, 먼저 말 안 걸었다고 뭐하냐고 물어보지도 않네. 언제 먼저 말 거나 봐.” 하고 입을 삐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사흘이 되고, 나흘이 되자 게임 접속도, ‘뭐해,’, 그 흔한 말 한마디도 먼저 안 거는 가나에게 꽤 서운해졌던 한빈이다.
평소에도 10번중 9번은 내가 먼저 말 걸었지, 하고 못난 가늠도 했다.
하지만 오늘로 닷새. 5일째가 되자 또 다른 생각이 삐죽 머리를 들기도 한다.
원래 친구라는 건 이런 거 아닌가.
며칠, 아니면 한참 연락하지 않다가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은 거. 당장 어제 떠들었던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거.
솔직히 가나는 지금 내가 당장 연락해서 ‘뭐해?’ 하면 어색한 거 하나 없이 대답해 줄 애라는 걸 모르지도 않으면서.
백한빈은 시시콜콜한 대화가 빼곡하게 차 있는 가나다라123과의 일상을 훑어보며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피로 속에서도 둥둥 떠다니던 생각의 타래는 이내 마음 한구석을 따끔따끔하게 하는 쪽으로도 가지를 뻗었다.
……그럼, 고신재는 뭘까?
“-아. 씨…. 뭐하냐.”
고신재의 주상복합 아파트 현관문 앞에 도착한 한빈은 2701호의 명패를 건 철문 뒤로 집주인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멍하게 벨을 누른 다음에야 작게 혀를 찼다.
무슨 수를 써도 엿볼 수 없었던 짝사랑 상대와는 달리, 우유부단한 제게 곧장 직진하며 순수하게 마음속을 내어주는 고신재는 왠지 되새기기만 해도 속을 울컥하게 했다.
여전히 이게 좋아하는 감정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백한빈은 작게 한숨을 푹 쉬면서 고신재가 보낸 메시지 창으로 다시 돌아갔다.
무슨 고민이든, 우선 얼른 들어가서 세수도 하고 잠깐 자고 나서 생각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한빈은 고신재가 보내준 일곱 자리의 비밀번호 중 세 번째 숫자를 누르기도 전에 그 무거운 쇠문을 열 수 있었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그 거대한 문은 저절로 안에서부터 열렸다.
“…….”
“…….”
정말 딱 기절해도 좋을 만큼 졸리고 피곤하다고 생각했는데, 절대 안에 누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서 말쑥한 수트 차림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걸 보자니 그렇게나 흐리멍덩했던 뇌가 얼음물 안으로 풍덩 빠진 듯 온 신경이 곤두섰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손에 쥔 휴대폰에 꽉 힘을 준 채로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상대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무뚝뚝한 시선으로 백한빈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건 길어봤자 5초 정도였을 거다.
하지만 한빈은 그 순간 정말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경찰? 아니면 차라리 엘리베이터로 도로 뛰는 게 더 빠를까?
눈앞의 남자가 도둑치고는 꽤 정중한 차림새라는 생각까지 얼른 미치지 못했던 건, 고신재의 공간에서 튀어나온 저 낯선 사람이 너무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빤히 바라보며 침묵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도 백한빈은 살며 하는 첫 112 신고도, 난데없는 엘리베이터를 향한 짧은 달리기도 할 필요 없었다.
“신재 님 친구분 되십니까.”
“……네?”
“저는 신재 님 어머님이신 강서진 대표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신재 님은 안 계시는데, 무슨 일이신지요.”
버석버석한 표정만큼 감정 한 줌 없는 건조한 문장의 연속에 백한빈은 두 번 놀랐다.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놀란 게 첫 번째. 그리고 중성적인 이름 앞에서 정신이 든 게 두 번째였다.
강서진 대표.
백한빈은 고신재가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은 그 이름을 정말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부터 휴대폰을 붙들고 기사를 찾아가며 이 여자가 그 미친 모친 되시냐며 부글대는 속으로 한참이나 욕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그런 제 과거를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 뛰면서 저 역시도 와르르 자기소개를 쏟아냈다.
“-아! 네, 네네. 안녕하세요. 전 신재 친군데요. 네, 신재 없는 거 아는데, 신재가 여기 카드키랑 비밀번호를 줘서요.”
“…….”
“그, 그게, 제가 오늘 해야 할 과제가 있는데 저녁까지 시간이 붕 떠서… 신재가 여기 와서 쉬고 있으라고 해서요. 그래서….”
횡설수설 그 자체인 문장의 연속이었지만 비서는 그 두서없는 말들을 모두 잘 추려 들은 듯, 반쯤 열린 문을 꼭 군인처럼 깍듯한 움직임으로 밀어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저는 생필품을 점검하러 온 거라, 이제 나갈 예정입니다. 편히 계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사실 이 순간 고신재가 같이 있었다면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깍듯한 백한빈을 보며 조금 웃었을 거다.
문 열어주는 게 뭐라고 감사하다며 고개까지 꾸벅 숙이냐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고신재는 백한빈의 곁에 없고,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바짝 기합이 들어가 얼어있는 백한빈의 앞에는 절대 그 어떤 것도 실수하지 않는 비서만 있을 뿐이다.
비서는 슬리퍼를 신고 저를 주춤주춤 뒤따르는 백한빈을 슬쩍 곁눈질하며 거실 한편에 둔 자신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앞서 주어야 할 것을 깜박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지갑을 꺼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아. 감사합니…….”
감사할 일이 가득한 창백한 밀랍 인형처럼 꾸벅 인사하던 한빈은, 제가 받아든 작은 종잇조각으로 시선을 떨어트림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말의 끝맺음을 잠시 잊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한빈은 순간 막힌 듯한 목소리를 작게 헛기침한 다음 입 밖으로 제대로 된 문장을 기어코 끄집어냈다.
그것에 맞춰 비서의 시선 역시 순간 멍하게 변했던 하얀 얼굴 위에서 곧장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네, 가…, 감사합니다.”
“편히 쉬십시오.”
비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뻔히 아는 인사를 건네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이번 챕터의 마지막 화네요.
빨리 오려고 했는데 요 몇 주 못했던 일들을 정리하느라 조금 바빠서 늦어졌습니다! 다음주 부터는 그래도 자주 올 수 있을 거 같아요. ^ ^
항상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즐겁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 날씨가 부쩍 추워졌는데요.
오늘도 따뜻하고 포근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