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40화 (40/65)

40

이틀간 백한빈이 먹은 건 물과 비타민 젤리 세 알 뿐이다.

사실 그 전의 며칠도 체할 것처럼 속이 답답해서 부모님 있을 때만 눈치 보며 뭐라도 먹는 시늉을 했지만, 식사할 때도 무릎 위에 휴대폰을 올려두고 온 신경을 거기에 쏟느라 여념 없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며칠을 쫄쫄 굶은 것과 별다를 바 없다.

물론 이렇게까지 끼니를 거르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다.

예전에도 이러다가 길 한복판에서 그대로 기절한 다음 응급실에서 깨어나 20대 들어 처음으로 부모님이 우는 걸 봤다.

그 이후로 이렇게 곡기를 끊는 건 안 하려고 했는데, 먹고 토하더라도 먹는 게 나은지 아니면 뭘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 상황을 하루빨리 해결하는 게 나은지 모르겠다.

“…….”

한빈은 아직 같은 과 사람들도 몇 오지 않은 아침 9시의 전공 수업에 일찌감치 와 앉아서 잠잠한 휴대폰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이틀 전 밤.

백한빈은 고신재가 제 짝사랑 상대를 게임에서나마 직접 만나면, 그 잘난 무용과 다이아수저인 남자가 뜬금없이 제게 갖기 시작한 호감이 확 식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룻밤 같이한 게 정말 사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멋대로 얼굴을 빌려 이어간 상상 연애의 연장선이라는 걸 직접 깨닫는 방법으로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게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마, 그건 꽤 효과적이었다.

이틀 전 그날 밤 이후로 고신재는 확실히 달라졌으니.

요 이틀, 백한빈은 ‘걔’를 소개해주겠다 보낸 메시지를 흔쾌히 수락했던 대화창에서 쭉 멈춰있는 대화창을 요 백번은 더 족히 들여다봤다.

사실 고신재는 게임에 접속했을 때부터 평소와는 좀 분위기가 달랐다.

답지도 않게 장난치듯 인사할 때부터 왜 그러나 싶었는데 그다음부터는 게임 큐를 기다리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해도 채팅 한 번을 안 하고 게임만 했다. 얼마나 존재감이 없던지 가나와 둘이서 게임 할 때와 다를 거 하나 없게 느껴졌을 정도다.

…심지어는, 어떻게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보려 이전에 PC방에서와는 달리 킬로그에 훨씬 자주 올라오는 걸 칭찬했을 때의 반응이란.

“…그렇다고 톡 하나 안 보내….”

한빈은 제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낸 문장에 놀라서 순간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도 1교시 강의를 기다리는 동기들은 하나같이 잔뜩 치대어져 찢어지기 직전인 반죽 같은 모양새로 강의실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느라 백한빈의 작은 중얼거림 같은 건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알지 못했던 건 백한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을 뭐 그렇게 노려보고 있어.”

“-아 깜짝이야! 언제 왔어?”

“한 10분은 됐을걸.”

백한빈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제 대각선 앞에 앉아 있던 김푸름을 이제야 눈치채고 속으로 에이 씨, 망했다. 하고 혀를 찼다.

눈치 빠른 푸름이 오면 내색하지 않고 있으려 했는데 온 줄도 모르고 한숨이나 푹푹 내쉬고 있었으니 이건 뭐 완전히 텄다고밖에는 못 하겠다.

푸름은 그제야 뒤로 자리를 옮겨 앉으며 툭 말을 이어갔다.

“뭐가 그렇게 고민이라 아침부터 앓고 있는데.”

“그냥. 피곤해서.”

“쓰읍, 어디 형님 앞에서 거짓말을.”

“…….”

확실히 이제껏 김푸름에게 거짓말을 해서 잘 먹힌 일이 그리 없는 한빈은, 괜히 말을 더 덧붙이는 것 대신 우물쭈물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푸름은 그 침묵조차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백. 너 걔랑 뭔 일 있지. 그치.”

“……어어?!”

“세상 우울한 얼굴로 휴대폰만 내려다보면서 나 온 줄도 모르고 있는데. 집에 콕 박혀있는 거 좋아하는 히키코모리가 삽질할 만한 일이 걔뿐이지. …아냐? 왜. 뭔데.”

‘걔’.

요 몇 달, ‘걔’는 가나다라123의 통칭이었는데, 어느새 푸름에게는 ‘걔’가 고신재가 됐다.

그 묘한 변화가 괜히 머쓱해진 한빈은 괜히 멋쩍게 입술만 깨물면서 입을 일자로 꾹 걸어 잠갔다.

그때였다.

“……뭐냐. 구상호 지금 한빈이 너 쳐다보는 거 같은데.”

한빈이 여전히 흔한 알림 하나 없는 제 휴대폰을 흘끗 내려다보고 있을 때, 저만치서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다부진 체격의 남자를 먼저 눈치챈 김푸름이 영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구상호.

어쨌거나 그 이름 석자는 며칠 동안 현실 위를 부유하던 백한빈을 훅 끌어내리기에는 충분했다. 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휙 들고 제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우리 후배님들 좋은 아침?”

“……안녕하십니까.”

“어어, 그래. 그래.”

사람 좋게 웃은 구상호는 백한빈의 남은 옆자리에 앉았다.

김푸름, 백한빈, 그리고 그 옆에 구상호.

강의 시작을 5분 정도 앞두고 어느덧 도착할 사람은 다 도착한 전공 강의실 안에서 백한빈과 구상호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윗과 골리앗, 고양이 앞의 쥐, ‘선배님’과 ‘후배님’.

백한빈이 동기와 몇몇 복학한 선배들의 시선이 모르는 척 이쪽으로 꽂히는 걸 모를 만큼 무던했으면 오늘도 이렇게 빈속으로 학교에 오진 않았을 거다.

백한빈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제 의자가 슬쩍 왼쪽에 앉은 김푸름과 더 가까워지도록 했다.

그때, 오른편에 앉은 구상호의 입이 먼저 열렸다.

“아, 그런데. 백한빈아.”

“네.”

“내일 저널 과제는 어떻게, 잘 되어가나? 내가 워-낙 백한빈 네 작업을 좋아하잖냐. 주제도 뭐로 바꿨는지 궁금하네?”

구상호와 겹친 문제의 강의는 백한빈이 김푸름과 함께 듣지 않는 유일한 전공 수업이었다.

패션과 광고 사진을 지망하는 푸름은 저널 사진 강의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 부분에서는 한빈과 서로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무슨 말이냐는 듯 묻는 듯한 제 친구의 둥그런 시선을 마주 보며 아주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평소 같았다면 구상호의 억지를 미주알고주알 김푸름에게 호소하며 욕하며 속풀이를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꾹 다물고 속으로만 되새기고 있던 건 백한빈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백한빈은 속으로 요 며칠 계속 얼굴을 그렸던 남자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작게 숫자 셋을 셌다.

하나, 둘.

그러다 셋이 되는 순간. 백한빈은 그 뾰족한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대답했다.

“안 바꿨는데요.”

이제껏 ‘선배님’ 구상호와 ‘후배님’ 백한빈이 만났을 때의 구도는 늘 뻔했다.

구상호가 능글맞게 다가가 말을 걸며 백한빈에게 시비를 걸고,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고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백한빈은 그 말을 질릴 만큼 굳은 얼굴로 가만히 들으며 당하는. 그런 강자와 약자가 애초에 정해진 채 수없이 반복되는 도돌이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백한빈의 이 사근사근한 표정과 대답은 요 몇 년간 지루하게 반복되어온 뻔한 그림에서 탈피한 최초의 변주였다.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하는 구상호의 대답도 그걸 반증했다.

“뭐?”

“안 바꿨다고요.”

“…뭐…, 뭐. 왜?”

“전부터 한 번쯤 동물 사진 작업해보고 싶었기도 하고. 집 근처며 어머니 직장 근처에 길고양이들 돌보는 분도 계셔서 접근하기도 좋고, 뭐 여러모로 저한테 잘 맞는 거 같아서요.”

솔직히 그 감상은 김푸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심지어 김푸름은 제 친구의 예민한 이목구비에서 순간 닮은 거 하나 없는 무용과의 화사한 남자를 떠올리기까지 했다.

활짝 웃으며 왠지 모르게 사람 속을 뒤집는 말을 툭툭 던지는 건 정말이지 누가 봐도 딱, 고신재였다.

하지만 사실 이 순간 가장 당황한 건 구상호다.

그는 요 몇 년 제가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움츠러들고 긴장한 채로 질리던 저 얼굴을 누구보다 즐겼던 사람이었다.

아슬아슬한 학점 때문에 늘 교수에게 굽신거리기만도 바쁜 저와는 달리 나이 어린 동기나 후배들이 벌써 취직이 됐다느니, 어디에 작업이 올라왔다느니 하는 소리가 슬슬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고작 나이 따위로 큰소리칠 수도 없어지던 그에게 백한빈은 일종의 자존감 샌드백이었다.

팔을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걷어차면 걷어차는 대로 그 모양이 보여서, 나도 아직은 큰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지는 그런 거. 그게 ‘백 후배’였다.

그런데 어째 오늘은 이상했다.

늘 퉁명스러운 얼굴로 무뚝뚝하게 있던 그 백한빈이 투박한 뿔테안경 너머로 전에 없이 그 뾰족한 눈을 샐쭉 접어 웃는데, 샌드백에 주먹은커녕 손가락 끝도 닿지 않는 것 같다.

구상호는 괜히 목소리를 키워 말을 이어갔다.

“야, 백한빈. 넌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아, 안 바꿨다고?”

“전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죠.”

“내가 그 날 널 붙잡고 얼마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농담으로 들어? 어?”

“말도 안 되잖아요. 길 위의 사람이랑 길 위의 동물이랑 주제가 뭐가 비슷해요. 다루는 대상이 완전히 다른데.”

솔직히 구상호 그는 지금, 제 귀에 내리꽂히는 저 쨍하고 또 조금은 쉰듯한 목소리에 담긴 내용이 얼른 머리에 입력이 안 됐다.

좀 더 정확히는 듣고는 있는데, 평소에는 긴 문장 한 번 듣기도 어렵던 저 작은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문장들이 정말 제가 아는 ‘백후배’, 백한빈이 하는 말이 맞나 싶다.

말문이 턱 막힌 구상호는 두꺼운 입술을 괜히 몇 번 우물거린 다음에 어설프게 되물었다.

“…뭐. 뭐어? 야, 그래도 넌 선배가 말을 하면-.”

“어차피 선배나 저나 둘 다 엄청 흔한 주제잖아요. 저만 해도 인터넷에 길 위의 동물 치면 블로그 검색 결과만 3만2천 개 뜨던데요. 길 위의 사람은 몇 개더라. 35만인가.”

“…….”

“그 정도로 흔하고 편한 주제 선택했으면, 결국 차이는 얼마나 진득하게 붙잡고 시간 써서 좋은 순간 잡아내느냐 그건데….”

제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눈을 끔벅이는 구상호의 반응은 사실 놀라울 것도 아니다.

과제 중간발표 같은 걸 해도 정말 간결한 작업 의도만 말하고 끝내는 한빈은, 늘 붙어 다니는 푸름이나 덕분에 친해진 몇 명 정도가 아니면 학과 내에서 누구보다 조용한 사람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말하는 걸 듣기 힘든 축에 속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 없고 조용하던 백한빈이 전에 없이 눈을 휘면서 그렇게나 듣기 힘들던 목소리로 거의 1년 치 문장을 다 쏟아내고 있다.

아니, 심지어 그뿐일까.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는 문장의 현신이나 다름없던, 조교보다도 더 나이 많은 학과 내 최고 진상 구상호에게 창백하다 못해 서늘한 문장을 혼잣말처럼 내리꽂으며 마지막 쐐기까지 박았다.

“대충 학교 근처 뻔한 장소 찍고 끝낼 생각 아니었으면 그렇게 과민반응할 필요가 있나. 아…, 사람이랑 동물이랑 진짜 같다고 생각하는 거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문제이긴 한데.”

“……야!”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구상호가 삐끗하니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친 순간 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쉬움과 천만다행,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일이었다.

사진과의 사람들은 저마다 그제야 자세를 고쳐 앉으며 조금 전까지도 팽팽하게, 아니 사실은 어느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던 싸움 구경을 멈추고 저마다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구상호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곧장 저를 보는 교수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제 옆자리의 백한빈에게 작게 “너 이따가 끝나고 보자.” 하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따 보자는 독기어린 으름장은 예로부터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는 법이었고, 그건 구상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구상호가 그리도 벼르고 별렀던 ‘이따가’인 세 시간짜리 전공 강의가 끝난 후.

백한빈은 그 ‘이따가’가 되었는데도 구상호의 부담스러운 얼굴을 마주 보는 것 대신, 이렇게나 평화롭게 김푸름과 휴게실에 멍하게 앉아 있다.

전공이 끝나는 대로 탈탈 뒤집어 잡아먹을 듯이 굴던 구상호 쪽이 먼저 전공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자를 시끄럽게 박차고 제일 먼저 뛰어나갔기 때문이다.

잠시간의 얼떨떨한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푸름이었다.

“뭔 일이냐, 이게.”

“……나도 몰라.”

“야, 모르긴 뭘 몰라, 백한빈! 내일도 오늘 같으면 구상호 그 새끼 진짜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입도 벙긋 못 하고 살겠다, 진심. 와,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오네.”

오늘은 포트레이트 강의의 공통주제 과제 발표날이었다.

늘 출석 순대로 하던 발표였건만, 오늘따라 교수는 항상 출석대로 하면 좀 억울하지 않겠냐며, 하필 오늘만큼은 앉은 순서대로 발표하라고 했다.

다시 말해 김푸름, 백한빈, 구상호 순이었다는 거다.

푸름의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야. 구상호 내일 저널 발표 째는 거 아냐? 아니다, 그러면 진짜 이번 학기도 위험할 텐데. 구상호 아마 교양도 술 처먹고 안 들어가서 위험할걸.”

“……그래?”

“왜. 도영이가 구상호랑 교양 하나 겹치는데 저번 중간 때 자기도 공부해야 하는데 필기 복사한다고 가져가서 연락 안 된다고 욕 엄청 했거든. 아, 백, 너도 이제 진짜 구상호한테서 해방이지, 이정도면!”

오늘 포트레이트 과제 발표에서 가장 호평 일색이었던 건 단연 백한빈의 작업물이었다.

학원 원장인 어머니의 찬스를 써서 올망졸망한 중학교 1학년 수강생 한 명 한 명의 활짝 웃는 사진을 찍은 작업물은, 익숙한 동기나 선후배의 얼굴이나 가족이 대다수던 비슷한 결과물들 속에서 유독 청량하고 또 발랄하게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백한빈 역시 이번 과제는 제가 찍어놓고도 제법 자신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한빈도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제 작업물을 띄운 빔 프로젝터 앞에서는 피사체 표정이 너무 좋네, 빛이 좋네, 바라보는 시선이 좋네 어쩌네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말을 멈추지 않던 동기와 선후배들이 제 다음 차례의 발표가 끝난 다음에 일제히 침묵하던 순간의 고요다.

심지어 그 정적 와중에 여기저기서 조용히 주고받는 시선이란.

그때, 저도 모르게 강의실을 둘러봤던 한빈은 쭈뼛 소름까지 돋았을 정도였다.

“한빈이 너. 내일 저널 1차 발표 끝나고 나서 실황 꼭 나한테 전해주기다. 구상호 것 길 위에 어쩌고 시리즈, 꼭이다, 꼭!”

“…….”

사실 백한빈의 옆에 붙어있다는 이유만으로 적잖게 구상호에게 시달렸던 푸름은 내내 이런 흥분 상태였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푸름만 이런 것도 아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평소엔 데면데면한 전공 사람들과 인사 한 번씩은 다 한 것 같다. 이번 학기에 단 한 번 대화 나눠본 적 없는 복학생 선배가 “한빈아, 잘 가.” 하고 먼저 말을 걸기까지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사실 지금 백한빈은 저를 신입생 때부터 지독히도 괴롭혔던 사람에게 한 방 먹였다는 통쾌함 대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푸야.”

“어엉? 왜.”

“신재도 오늘 오전 강의였나?”

바로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메시지 한 통 없는 무용과의 남자다.

김푸름은 왜 그 이름이 안 나온다 했어, 하는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고는 여전히 조금 멍한 표정인 제 친구를 향해 툴툴대며 대답했다.

“내가 걔 시간표를 어떻게 알겠냐. 알아도 네가 알지, 참 내.”

“…아마, 신재도 오늘 123교시인데. 그래서 걔나 나나 오늘 중간에 공강 2시간인데.”

“아, 왜. 아직도 톡이 안 와? 무용과는 3시간 꽉 채워서 하지 않나. 우린 오늘 좀 빨리 끝난 편이고… 어련히 연락 오겠지. 요새 그 길쭉한 애가 맨날 우리 전공 강의실 근처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던데, 뭘.”

백한빈이 기다리던 게 고신재의 연락이라는 걸 이미 기정사실로 한 김푸름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하기 어려웠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더더욱 그랬다.

요즈음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고신재는 키가 큰 사진과 사람이었을 거다.

그 정도로 고신재는 계속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

전공 강의가 끝날 때쯤엔 항상 전공 강의실 앞 휴게실에서 앉아 있거나 비스듬히 벽에 기대고 있거나 했고, 오자마자 백한빈이 짊어지고 다니는 가방부터 빼앗아 들었다.

덕분에 한빈은 요새 아침저녁으로 전에는 몰랐던 제 가방의 무게를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게 되기도 했다.

“…….”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고신재를 먼저 찾아가 본 적은 없었다.

어느샌가 그게 참 당연했다. 무용과 전공 강의실이 몇 층에 있었더라. 한빈은 왠지 가물가물한 층수를 헤아리며 손에 쥔 휴대폰을 세게 쥐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지금은, 꼭 만나고 싶어서였다.

설령 고신재가 저를 그리 반기지 않더라도.

백한빈은 여전히 연락 없는 휴대폰을 괜히 한 번 더 봤다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곰 같은 친구에게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있잖아. 푸. 지인짜 미안한데. 나 오늘 점심은-.”

“얼른 가, 가. 아주 아침 내내 울상하고 있고. 옆에 두기가 싫어, 아주.”

“야. 내가 나중에 완전 맛있는 거 사줄게!”

“됐거든. 나도 바쁜 사람이야. 오늘 안 그래도 중도도 가야 하고 과사 들러서 서류 쓸 것도 있고 바빠.”

한빈은 괜히 툴툴대며 말하는 푸름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무작정 무용과 과 사무실이 있는 3층으로 잰 발걸음을 옮겼다.

***

한편, 무용과의 오전 전공 강의는 김푸름의 예상대로 세 시간을 꽉 채워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주에 봅시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시작하는 이 현대무용 실기 강의는 이른 시간부터 하기엔 몸이 삐걱거린다는 몇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 있는 시간강사 교수의 분반이라 수강신청부터 꽤 치열했었다.

좀 더 편한 시간대에 있는 다른 분반 대신 이 아침 시간으로 굳이 골라잡을 정도의 욕심이 있는 현대무용 전공자들이 모인 자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신재는 그 ‘욕심 있는’ 현대무용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남자였다.

하지만 오늘 그 눈에 띄는 남자는 그 어떤 때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소에는 눈만 마주쳐도 웃는 시늉이라도 하던 남자가 오늘따라 표정을 짓는 법을 까먹은 나무인형처럼 멀겋게 서 있고, 반응도 그답지 않게 느려서 그 손꼽히는 우등생이었던 남자가 오늘만 연신 몇 번을 지적받았다.

그건 이번 학기, 아니 고신재 그가 지나온 전 학기를 통틀어서 처음 있는 일일 거다.

그걸 잘 아는 고신재의 여자 동기들 몇 명은 강의가 끝나고 저만치에서 물을 마시며 땀을 닦고 있는 널찍한 뒷모습을 보며 작게 소곤댔다.

“야, 오늘 고또 왜 저러는지 알아?”

“몰라. 내버려 둬. 괜히 건드려서 뭐해.”

“아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닌가 하고. …왜. 고신재도 혼자 살지 않나?”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자취하며 최근 된통 앓았던 동기 중 하나는 며칠 전의 우울한 경험을 되새기며 슬쩍 운을 띄웠다.

그건 아예 설득력이 없는 말은 아니라 몇 명쯤 그런가,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고신재의 쪽을 슬쩍 눈으로 훑었다.

“하긴. 요즘 저쪽… 남자 무리에서 영 아는 척도 안 하는 눈치고. 어디 아파도 챙겨줄 사람 없긴 하겠네.”

“남자 무리? 아, 김유민?”

“어. 너 봤어? 후배 남자들 데리고 우르르 다니는 거. 뭐야, 대체. 골목대장이야?”

“맨날 편의점에서 만나면 ‘나연아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 하는 것도 추가.”

“으.”

사실 고신재는 악명에 비해 학과의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평이 나쁘지 않았다.

끝없이 화려한 악명을 제하고 보면, 여초 학과에서 몇 없는 남자랍시고 괜히 목에 힘이 들어가서 뭐라도 된 것처럼 폼을 잡지도 않고 다수의 예술대 남자들이 걸려 있는 자유로운 영혼 컨셉 병도 귀신같이 피해간 연습벌레일 뿐이어서다.

애초에 고신재가 또라이 소리를 듣게 된 것도 몇몇 고압적인 선배와 그 선배의 옆에서 알랑거리며 공동 업무에서 슬그머니 빠지는 인간들을 지치지도 않는 투우처럼 계속 들이받아서라는 걸 모르지도 않았고 말이다.

“……혹시 어디 아픈지 물어나 볼까?”

“그래. 뭐 자기가 아니라고 하면 그대로 두고 가면 되는 거고.”

“맞아. 어디 좀 아프다고 하면 약이라도 사다 주고.”

평범한 쪽과는 전혀 부딪힐 일이 없는 말수 없는 금수저 미남을 굳이 이유를 찾아가며 싫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고신재의 동기들은 평소보다 눈에 띄게 느릿느릿 걷는 남자의 뒤를 밟았다.

어디 가서 피지컬로는 빠지지 않는 무용과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189cm의 장신은 우르르 몰려나가는 학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뒤를 쫓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장 말을 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워낙에 평소에도 잡담을 걸기는 어려운 상대가 저 고신재, ‘고또’라, 남자 탈의실 방향으로 완전히 꺾어 들어가기 직전까지 총대 아닌 총대를 든 동기는 차마 말을 붙이지 못했다.

물론 같이 따라온 다른 몇 명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때였다.

“-고신재!”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꼭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튀어나온 것처럼 쨍한 목소리가 무용과 실기실 앞의 복도를 울렸다.

그건 확실히 전에 없이 귀에 꽂히는 목소리라, 고신재의 뒤를 슬쩍 뒤따르던 동기 몇 명의 시선은 물론이고 그다음 강의가 있어 탈의실로 발을 옮기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날 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덩달아 휙 움직였다.

고신재를 부른 건 얼마나 급하게 온 건지 크게 숨을 들썩이는 창백한 인상의 남자였다.

옆에 나란히 서는 게 좀 신경 쓰일 정도로 마른 남자는, 왠지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듯 크게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그는 간신히 벽을 짚고 서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급한 문장을 이어갔다.

“하아, 후우…. 아, 안 늦었지. 신재, 너 방금 끝난 거 맞지.”

“가까이 오지 마.”

하지만 그렇게 헐떡이는 문장에 돌아간 대답은 생판 남이어도 좀 안됐다 싶을 정도로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덕분에 고신재의 동기들은 덕분에 일찍 아는 척 안 하기를 잘했다 싶어지기까지 했더랬다.

아니나다를까 급하게 뛰어온 남자도 그 반응이 적잖게 억울한 듯했다.

“왜애!”

“백한빈. 진짜 더 오지 마. 거기 있어.”

“그러니까 왜.”

“거기서 스톱. 한 발자국도 더 오지 마.”

친구는 맞아?

눈에 띄는 저 조합의 대화를 엿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그래도 평소에 누가 말을 걸면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던 고신재였는데, 어째 오늘따라 저 마르고 예민한 인상의 남자에게는 유독 혹독하기만 했다.

“아직도… 화 많이 났어?”

“……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최악인 관계라고 하기에는 또 묘했다.

마른 남자가 목소리를 줄여도 곧장 귀에 들어오는 중얼거림처럼 묻자 고신재는 그 반듯한 눈썹을 재깍 찌푸리더니 머잖아 해명하듯 빠르게 말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내가 왜 화가 나.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왜 가까이 가면 안 되는데. 왜 오지 말래.”

잘은 모르지만 확실히 좀 이상한 대화이긴 했다.

대뜸 얼굴을 보자마자 무뚝뚝하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길래 싸운 건가 했는데 제가 왜 화가 나겠냐며 되묻는 고신재를 보아하니 또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얼른 거리를 좁히지도 않고.

심지어 고신재는 저와 마른 남자 쪽으로 꽂히는 같은 과 사람들의 시선을 깨닫지도 못한 것 같았다. 평소의 그 섬세와 예민 사이에 있는 사람답지 않게 말이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잠시 말을 고르듯 서 있던 고신재의 입이 그 키에 어울리지도 않게 작게 열렸다.

“……땀 냄새나니까.”

“…….”

“씻고 나올 테니까, 거기서 기다려. 백한빈.”

그리고 아마, 간신히 밝혀진 접근금지 사유는 숨을 헐떡이기까지 하며 찾아온 남자에게는 참 지독히도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했다. 고신재가 한참 만에 꺼낸 대답에 쾅쾅 발을 구르며 보란 듯이 거리를 좁혀들었으니 말이다.

“-야, 거기 있으라니까.”

“뭐 그딴 거로 사람을 놀라게 해! 냄새 안 나, 새끼야. 무슨 깔끔한 척을 그렇게 해.”

“여긴… 왜 왔어.”

“오면 안 되냐? 넌 맨날 우리 전공 강의실 앞에 있으면서.”

순식간에 코앞까지 온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가 와르르 쏟아내는 뾰족한 문장에 고신재는 좀 이상한 표정이 됐다.

여전히 제게서 나는 연습의 흔적이 조금은 민망한 것 같기는 한데, 제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무뚝뚝하게 말했을 때 같은 거리감은 또 없었다.

말라서인지 고신재의 옆에 있자 유독 더 체격이 가늘어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잘 안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 곧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는 일 없는 고신재가 저보다 훨씬 더 체격이 작은 남자에게 맞춰 몸을 숙이고 전보다도 훨씬 더 작게 이어지는 어떤 작은 소곤거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곤거림이 이어질수록 아주 천천히, 오늘 오전 내내 단 한 번도 풀리지 않던 얼음장 같던 수묵화 위에 간지러운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학과에서 손꼽히는 또라이와 그를 찾아온 낯선 사람의 만남을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떠나지도 않고 엿보던 무용과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딱 한 글자였다.

‘…와’.

“봐. 잘 될 거라고 했지. ……그래. 잘했어. 딱 지금처럼만 해.”

이제껏 ‘고또’가 웃는 거야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봤다.

하지만 고신재가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인간이었나 자문한다면 얼른 대답이 안 나온다.

솔직히 무용과 사람들은 제 동기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얼굴 근육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가끔은 꺼림칙하게, 또 가끔은 음산하게, 또 어떤 날은 쟤 이런 얘기 진짜 재미없어 하는구나 싶은, 얼핏 보면 상냥해 보이는 미소만이 그들이 아는 고또의 웃음이었다.

심지어 고신재는 그 커다란 손으로 마르고 볼품없는 체격의 남자의 뻣뻣한 빗자루 같은 까만 머리카락을 살살 건드리기까지 한다.

그건 저보다 아랫사람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와는 좀 결이 다르다. 뭔가 훨씬 더…, 간지럽고, 조심스럽다.

“내일이 그 강의 있는 날 아냐?”

“맞아! 나 내일 발표할 사진들 너도 같이 보고 몇 개 골라줄래. 대신 점심 내가 살게. 같이 먹자.”

“김푸름은?”

“푸는 과제 때문에 도서관 간대. 나 갑자기 완전 배고파.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좀 어지럽기도 하고.”

체중 조절이야 일도 아닌 이 학과에서 누가 식사를 허술하게 했다고 저렇게 표정을 굳히는 건 참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것도 고운 눈썹을 찌푸린 당사자가 동기가 학기 초 술에 취해 바닥에서 굴러다녀도 비싼 구둣굽 끝으로 톡톡 치면서 곤란한 척 웃던 인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왜 아무것도 안 먹어.”

“왜 그랬겠냐.”

“……얼른 씻고 나올게.”

심지어는 나긋나긋하게 묻는 목소리에서는 걱정이 뚝뚝 떨어지기까지 한다.

고신재가, 그 고신재가, 무려 그 고또 새끼가, 누가 식사를 걸렀다고 저렇게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걱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전공 시간 내내 평소답지 않게 구는 남자가 걱정되어 따라왔던 동기 몇은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직 놀라운 건 하나 더 남아있었다.

“한빈아. 열쇠 가지고 있지?”

탈의실로 들어가다 돌아서서 말한 암호 같은 문장에 고신재가 비쩍 마른 남자에게 짝, 하고 등을 얻어맞기까지 했다는 거다.

동기들은 그 순간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씩씩대는 창백한 남자도, 왠지 솜털이 곤두서는 눈웃음을 치고는 발을 옮긴 고신재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여자 탈의실로 성큼성큼 뒤돌아 걸어갔다.

“대체 뭐야아?! 이름 부르는 거 들었어? 뭐였지, 한빈? 한민?”

“와, 고또 쟤 완전 배신감 드네? 야. 같은 과 사람들한테 좀 저렇게 웃어보라고 해.”

“아프기는 무슨. 완전 멀쩡하잖아! 어우, 챙기긴 누굴 챙겨.”

햇수로만 꼬박 5년을 알고 지내면서 이제껏 단 한 번도 제대로 웃는 것 한 번 본 적 없었던 게 확실해진 남자에 대한 충격파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들이 이런저런 황당함을 쏟아내며 “미친놈이 그래도 저렇게 웃으니까 진짜 잘생기긴 잘생겼네.”로 결론을 내리는 와중에도 마지막에 덧붙인 열쇠에 대한 미스터리 역시 끝내 풀리지 않았고 말이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정말 정말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ㅠ ㅠ

나름 본격적인 연애 시작을 앞두고 빨리 빨리 쓰고 싶은데 너무 아쉬운 요즘이네요!!!!

조금 더 일찍 돌아오려고 했는데 며칠 안 남은 이번달 까지만!! 천천히 와 볼게요.

10월에는 9월보다 훨씬 더 자주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선한 한 주의 시작 되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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