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39화 (3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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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백한빈은 고신재가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룻밤같이 한 다음에 자연스럽게 입 맞추기 시작한 친구가 제게 가진 마음이 어느 정도로 진지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녀석이었으니까.

제 얼굴만 쏙 뽑아다 이런저런 망상을 했다던 낯선 남자와의 만남을 기꺼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고신재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거절도, 가타부타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런저런 걱정이나 고민을 가득하며 망설였던 게 머쓱해질 정도로 ‘그래, 그럼’ 하고 짧은 단답만 돌아왔을 뿐이다.

-가나다라123 님이 접속했습니다

-청담동왕자님 님이 접속했습니다

게다가, 제가 반한 남자와 제게 반했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란히 접속하는 건 생각보다 꽤 장관이었다.

“…새삼 둘 다 닉네임 한 번….”

한 명은 세상 성의 없고 무심한 닉네임이고, 또 다른 한 명은 확신에 찬 자의식이라.

하여간 둘 다 캐릭터 하나는 확실하다.

한빈은 발랄한 닉네임 앞에서 스멀스멀 머리를 드는 긴장감을 떨쳐내려고 노력하며 기합을 넣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었다.

역시 첫 파티 초대는 가나다라123였다.

언제나 같이 게임을 하는 게 당연한 남자는 초대를 금방 받았다.

한빈은 제가 부디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가나님 안녕.

-…어. 안녕.

서로 나눈 인사가 왠지 평소보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분명 제가 너무 긴장한 탓일 거다.

한빈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평소보다 딱딱하고 쉰 목소리가 튀어나온 스스로의 성대를 탓했다.

하지만, 아직 본론은 들어가지도 않았다. 여기서 벌써 움츠러들 순 없다.

한빈은 평소보다 괜히 더 밝은 목소리를 쥐어짜 내려고 애쓰며 말을 이어갔다.

-가나야. 근데, 어…, 혹시 오늘 내 친구 한 명 초대해도 돼?

-친구?

-내 학교 친구. 티어는 다이아이긴 한데…, 암만 봐도 자기 실력 아닌 녀석 하나 있어. 하핫.

-…….

-초, 초대해도… 될까?

최대한 매끄럽게 말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그런 한빈을 더더욱 초조하게 하는 건 평소에는 나직한 목소리로 곧장 대답해주던 가나가 오늘따라 대답이 더디다는 거였다.

사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고작 몇 초의 일이었겠지만 잔뜩 신경이 곤두선 백한빈은 그 찰나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짝사랑 상대는 대답을 머잖아 내주었다.

-그래. 초대해.

한빈은 이미 일찍이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답을 받고도 괜히 속을 쓸어내리면서 제 친구 창에서 가장 부끄러운 이름을 클릭했다.

근 5년간 단 둘뿐이었던 파티가 셋으로 늘어나는 순간의 어색함과 긴장감은 무슨 단어로도 표현이 어려웠다.

그것도 한 명은 제가 짝사랑하는 남자고, 다른 한 명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빼닮은 저와 하룻밤 보낸 친구라면 더욱 그렇다.

한빈은 속으로 정신 차리자, 하고 중얼거리면서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가나야. 저 미친 부끄러운 닉넴이 내 친구야. …야, 왕자. 너도 인사해.

백한빈의 소개말은 두 사람 모두와 ‘정말 친구였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어쨌거나 몇 년이나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른 게임 친구 앞에서 무작정 고신재라는 실명을 말하는 것 대신 마찬가지로 닉네임을 꺼내 든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백한빈이 모르던 문제는 모니터 너머에서 그 말을 듣는 ‘청담동왕자님’의 계정주가 제 친구 고신재가 아닌 그의 형 고진영이었다는 점이었다.

동생과의 관계 회복을 늘 바라 마지않았기는 했지만, 난데없이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컴퓨터를 꺼내 나란히 앉아 게임에 로그인하는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진영은, 제가 방금 헤드셋 너머로 들은 문장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진영은 그렇지 않아도 진하고 뚜렷한 쌍꺼풀이 있는 눈을 소처럼 느리게 끔벅거리면서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미친 부끄러운 닉넴’이 내 계정 보고 한 소리야?”

물론, 그 순도 백 퍼센트의 순수한 물음은 그렇지 않아도 초조함에 자꾸 낮게 꺼지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 내고 있던 고신재의 속을 뒤집는 데 일조했다.

고신재는 언제 이렇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나란히 앉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형이 천진난만하게 묻는 소리에 질색하며 외쳤다.

“그럼 뭐겠어!”

“내 닉네임이 뭐.”

“…나도 저번부터 말하려고 했어. 대체 ‘청담동왕자님’이 뭐야? 무슨 생각으로 이딴 걸 걸고 게임을 해.”

“친구들이랑 맞춘 건데. 나는 청담동왕자님, 너 성일이 알지. 걔는 도곡동왕자님, 종규는-”

“……됐고. 빨리 쳐. ‘안녕하세요’라고.”

문제의식 없는 왕자님이 한 명도 아니고 셋이라니 더 들을 것도 없이 끔찍했다.

하지만, 청담동왕자님은 그 충만한 자의식뿐만 아니라 호기심 역시 가득한 듯했다.

“지금 이거 뭐 하는 건데?”

“빨리!”

여름옷을 챙기러 왔다가 전에 안 하던 귀여운 짓을 하는 동생을 살살 놀리며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것까지는 좋았는데….

고진영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영 파악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멋쩍게 뺨을 긁적이다가 이내 제 동생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본체가 다르다 보니 문제가 없진 않았다.

[청담동왕자님 : 안녕하세요^-^*]

-헐…….

“미치겠네! 이모티콘 넣지 말라고!”

“아,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턴 안 넣을게.”

헤드셋 저편에서 들리는 하마, 즉 백한빈의 작은 경악과 고신재의 질색은 정확히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고신재는 믿음직스러움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제 형의 대답을 그 흔한 웃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음산하게 지켜보며 그 역시도 ‘네. 안녕하세요’하고 낮게 대답했다.

한편, 덕분에 고진영은 스스로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더더욱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왜 제가 갑자기 잡혀서 창고에서 잠들어있던 고신재의 오래된 컴퓨터 앞에 앉은 것인지도, 저를 ‘미친 부끄러운 닉넴을 쓰는 친구’라고 부르는 낯선 사람은 또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장 의아한 건 나란히 파티가 된 가나다라123, 즉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동생이 잠시 마이크를 켜고 제게 마주 인사했다는 거다.

대체 제가 지금 뭘 위해 이곳에 잡혀 앉아 있는지 도통 모르겠는 진영이다.

하지만 그 궁금함은 머잖아 제 닉네임을 비난한 쉰 목소리 덕분에 해결됐다.

-야. 고신재 너 집이야? 마이크 없어?

고진영은 제가 들은 물음을 멍하게 되짚느라 그 순간 바로 옆의 널찍한 어깨가 작게 움찔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얼떨떨함이 감춰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야, 얘가 지금 나보고 고신재라고 하는 거 같은데. 맞아?”

“……‘응’이라고 쳐.”

“너는 이거잖아. 가나다라123. 그런데 왜 내가 고신재야?”

“이모티콘 절대 넣지 말고, 집이라 마이크 없다고도 써. 얼른.”

“…….”

고신재가 아무리 뻔뻔하기 그지없는 성격이라고 한들 이런 상황에서까지 태연한 거짓말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신재는 순수한 질문을 거듭 이어가는 제 형 쪽으로 시선을 주지도 못하고 애써 평소 같은 목소리를 냈다.

반면에 그런 고신재의 얼굴을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던 진영은, 어쨌거나 요청대로 제 손을 움직이기는 했다.

[청담동왕자님 : 응. 집이라 마이크 없어]

-…아…, 뭐. 그래. 알았어. 큐 돌릴게.

헤드셋 너머의 하마, 아니 백한빈의 목소리에는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던 묘한 긴장과 어색함이 느껴졌다.

솔직히 고신재는 이 와중에도 그런 걸 짚어내고 또 그게 신경 쓰이는 저 자신이 좀 어이없기도 했다.

무작정 형을 붙잡아 앉혀서 제 대리로 쓰는 지금, 최소한 저는 현실의 고신재가 아니라 가상의 ‘가나다라123’이어야 했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잘 안다.

알지만, 생각대로 될 거였다면 지금 같은 상황도 안 왔을 거다.

……진작에 ‘하마’가 ‘가나다라123’에게 고백하도록 꾀어낸 다음 그걸 찼겠지.

고신재는 막 게임이 잡혔다고 뜨는 모니터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고진영은 그 작은 한숨을 똑똑히 들었다.

그때 헤드셋 너머로 하마라고 지칭해야 할지, 백한빈이라고 지칭해야 할지 모를 카랑카랑한 쉰 목소리가 이어졌다.

-게임 잡혔다. 아, 그런데 어떡하지. 탱은 내가 서는데…. 너희 둘 다 힐러 해야하나.

백한빈에게 청담동왕자님 고신재는 코앞까지 온 적들을 족족 살려 보내는 비폭력딜러 그 자체다.

하지만 지금은 파일럿이 달라졌다.

그걸 모르는 건 한빈뿐이다.

“이거 나도 힐러 하라는 소린가. 딜러 하면 안 돼? 나 힐러 못하는데. 얘는 티어가 어디길래…, 허, 전 시즌 랭커야? 와. 이전 시즌도 다 최소 그마네.”

“…형은 딜러 하든가.”

“신재 너는 브론즈인데 어쩌다 이런 애랑 같이 게임 하게 된 거야. 우선 딜러 한다고 한다.”

“…….”

고신재는 제 모니터 화면 위로 떠오른 ‘청담동왕자님 : 나는 딜러 할게’라는 짤막한 문장을 노려보면서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고신재 그는 하마와의 PC게임에 재미를 붙인 이후 게임 실력의 지지부진한 발전과는 별개로 기계 욕심만 생겨서 근 5년간 컴퓨터를 세 차례나 상위 기기로 교체하면서 다른 것들은 다 버리거나 다른 사람을 주거나 했다.

하지만 지금 진영이 붙잡고 있는 이 첫 컴퓨터만은 버리지 못하고 창고에 남겨두었었다.

물론, 다시 쓸 생각에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답지 않은 미련이 남아서 쥐고 있었을 뿐이다.

당연히 이 오래된 컴퓨터를 꺼내 형과 함께 나란히 앉아 하마와 함께 게임을 하는 어색한 광경이 자진해서 만들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탱딜힐이 모두 한 명씩 있는 황금 조합이 된 3인 파티로의 게임이 그렇게 시작됐다.

솔직히 백한빈은 그때까지 딜러로 자원한 청담동왕자님을 영 못 미더워했었더랬다.

하지만 다이아 티어 대리 의혹에 시달렸던 왕자님의 굴욕은 최소한 오늘만큼은 문제없었다.

게임 한두 판이 끝나고 나서 툭 튀어나온 백한빈의 순수한 감탄이 그걸 증명했다.

-뭐야. 신재…, 아니, 왕자. 너 왜 이렇게 게임 잘해?

이제 당혹을 숨기고 원래의 뻔뻔한 철면피를 어느 정도 되찾은 고신재는, 슬쩍 제게로 향한 형 진영의 시선을 마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 원래 잘한다고 해.”

“…신재 너 이거 끝나고 나랑 할 말 많은 거 알지.”

고신재는 저를 대신해 게임 속 ‘고신재’가 된 형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최소한 한 번에 하나씩 상대하고 싶어서였다.

솔직히 지금은 게임 속의 백한빈을 상대하면서 혹시라도 제가 툭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조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하지만, 이 순간 고신재가 몰랐던 건 말실수는 저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청담동왕자님 : 나 원래 잘해]

-에이. 내가 푸랑 같이 너랑 몇 시간을 했는데. 그땐 진짜 안 이랬잖아. 에임부터가….

[청담동왕자님 : 원래 잘했다고]

-…….

간신히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처음으로 농담에 가깝게 말하던 한빈의 말을 무뚝뚝하게 툭 자르는 빌어먹을 청담동왕자님, 즉 이 순간 저 자신일 남자의 말을 보는 순간.

고신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싹 식는다는 게 뭔지 기꺼이 체험했다.

“형!”

“어어?”

차라리 소름 돋는 이모티콘이 나았다.

하다못해 그거였으면 백한빈이 언젠가 한 번은 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고신재는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끔벅이며 바라보는 제 형을 보며 순간 턱 막히려는 말문을 간신히 열었다.

“왜 말을……, 좋게 말해도 되잖아! 평소엔 잘만 그러더니 갑자기 왜 그래?”

“신재 너…, 말투처럼 말한 건데. 그냥 원래 잘한다고 한 번만 써야 했어?”

확실히 귀여운 이모티콘보다 조금 전의 딱딱한 문장이야말로 평소의 고신재의 텍스트 화법 그 자체였다. 말마따나 평소 말투와 다를 것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과민반응이라고 생각할 거다.

사실 지금 이 순간 고진영 역시도 ‘이게 저렇게까지 놀랄 정도의 말이었나?’하고 내심 생각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3인 파티의 조합의 진실을 안다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심지어 상대가 처음 만난 이래로 이렇게나 무뚝뚝한 말투의 고신재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백한빈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아도 쓸데없는 말을 할까 봐 채팅을 못 치게 했던 것도 어떻게 비춰질 지 뻔하다.

그걸 증명하듯 간신히 웃으며 농담하던 한빈은 말이 끊긴 다음에는 숨소리조차 없이 쭉 침묵 중이었다.

고신재는 급히 꺼뒀던 마이크를 켰다.

-하마야. 우리 다른 게임 할까.

-…….

-저쪽 친구…분도 다른 게임 뭐 하시나. 하나만 하면 재미없잖아. 다른 것도 하자. 랭겜은 못 돌려도 같이 하면 재밌으니까. 응?

고신재는 이제 형이 놀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든 말든 그런 건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아니, 지금 이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를 내는 게 고신재의 이름이 아니라 가나다라123이 점수를 따는 일이라는 걸 자각했어도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지금 고신재 그가 잔뜩 신경 쓰이는 건, 어떻게든 현실의 고신재와 친구 관계를 유지해보겠다며 전에 없던 용기를 냈을 백한빈이 움츠러든 채로 침묵하고 있는 거다.

애초에 한빈이 갑자기 예상하지도 못했던 제안을 한 이유야 뻔했다.

김푸름에게 들키고 난 뒤 며칠. 백한빈은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얼굴 가득 뚝뚝 떨어지는 고민을 숨기지 못했다.

은근슬쩍 입을 맞추고 품에 안으며 어르고 달래며 거리를 좁혀간 건 제 쪽인데, 도리어 죄책감을 느끼기까지 시작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걔’를 소개해준다는 말을 듣는 순간 곧장 깨달았다.

난 이제 정신 차리고 하룻밤 실수하기 전으로 돌아가야겠다, 백한빈이 그렇게 말하려는 것임을 모를 만큼 눈치 없지도 않았다.

오늘 이 자리를 피할 수 있었지만 형까지 붙잡아놓고 피하지 않은 건 현실의 고신재와 가상의 가나다라123이 그리 다를 거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있잖아. 둘 다 초대해놓고 미안. 나 부모님이 부르셔서 가봐야 할 것 같아.

-…….

-정말 미안한데…… 둘이 같이 게임 할래. 아니면 나중에 다시 시간 맞춰서 해도 되고….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가족 핑계를 대며 기가 확 죽은 백한빈의 중얼거림 같은 목소리만 들어도 뒷골이 땅긴다.

망했다, 정말.

순간 마이크가 켜진 상태인데도 긴 한숨을 토해낼 뻔한 고신재는, 간신히 그걸 삼킨 다음 여느 때와 다름없는 게임 친구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급할 텐데 들어가 봐. 다음에 또 하면 되는 거지.

하지만, 백한빈은 가나다라123의 말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몇 분처럼 느껴지는 몇 초간의 침묵 후에 작게 입을 열었을 뿐이다.

-……고신재. 너는?

웃고 떠들던 목소리가 이렇게나 기가 죽은 것만 들어도 속이 울렁이는데 어떻게 이 목소리로 고백을 받아 그걸 차겠다는 용감한 계획까지 했을까.

고신재는 이 순간 몇 달 전의 저 자신의 패기가 질릴 만큼 감탄스러웠다.

저 역시도 어찌나 긴장했는지 두피 위로 뜨끈뜨끈한 열이 올라올 정도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신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뽑힐 것처럼 피로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러자 옆에서 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워진 형, 고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떡할까. 뭐라고 해?”

“…인사해. 내일모레…, 보자고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며칠 뒤 얼굴을 보고 만나서 뭐라고 하고 풀지 막막한 신재다.

그렇지 않아도 가나다라123이 먼저인 한빈이 이 기회에 완전히 제게 마음 정리를 하게 될까 봐 걱정도 되고,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엉망진창이 되는 상황이 끔찍할 만큼 한심하기도 했다.

한편, 고진영은 이번에는 제 동생의 말을 곧이곧대로 더하지도 뺴지도 않고 옮겨 적었다.

[청담동왕자님 : 그래 잘 가. 내일모레 봐]

-…….

확실히 채팅은 불리하다.

어떤 목소리로,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말투로 하는 말인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고신재’는 절대 가나다라123처럼 마이크를 켜서 백한빈이 그리도 좋아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이건 애초에 고신재가 가나다라123에게 지는 게임이었다. 고신재는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한빈은 잠시 몇 초쯤 접속 종료를 망설이다가 게임에서 나갔다.

고신재는 제 얼굴을 감싼 손가락 너머로 모니터 위에 떠오른 ‘물먹는하마 님이 접속을 종료하셨습니다’라는 건조한 문장을 읽으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연애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건 아예 상상도 안 한다.

그냥, 다른 건 바라지도 않고… 온라인 속 제 위치와 현실의 저를 바꾸는 것. 딱 그것 하나를 바랄 뿐이다.

백한빈이 같은 남자라는 것도,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도 우선은 그다음에 고민하려고 했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저를 상상하며 목소리를 떨고 발을 동동 구르던 창백한 얼굴의 홍조가 저를 향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께가 빠듯해서 다른 걸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확실히 백한빈에게 옮았다.

가나다라123이 아닌 현실의 저를 좋아하는 백한빈과의 매일을 침대에 누워 멍하게 상상하는 날이 늘어난 건, 한빈의 탓이다.

고신재는 그 큰 몸을 구부려 얼굴을 감싼 채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푹 떨구고는 하찮은 책임 전가를 했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하지만 끈질긴 시선을 이어가던 남자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건 이 순간 가장 해명하기 싫은 화제였다.

“고신재. 저 친구. 네가 이…, ‘가나다라123’, 이 계정이랑 같은 사람이라는 거 몰라?”

“…….”

“저번에 내 계정 가져다가 같이 PC방에서 게임 했다는 친구가 저 친구야?”

“…나 씻을 거니까 집에 가든가. 형 마음대로 해.”

“야. 그래도-.”

고신재는 뭐라 말을 이으려는 고진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곧장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갔다.

그건 귀 끝까지 벌겋게 변한 제 모습을 들키기 싫은 마지막 한 줌 자존심 때문이었지만, 진영은 오늘따라 전혀 평소답지 않은 동생을 어느 때보다 주의 깊게 눈에 담은 지 오래였다.

난데없이 먼지가 앉은 컴퓨터를 붙잡고 대리 게임을 하게 된 것으로도 모자라 동생인 척하기까지 한 고진영은, 순식간에 혼자 남은 방 안에서 그 역시도 심란해진 채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혀를 차다가 그 역시 거실로 나왔다.

고신재는 곧장 욕실에 틀어박힌 건지 저쪽의 욕실에서는 벌써 물소리가 났다.

진영은 머릿속으로 영 정리되지 않는 제 동생의 기묘한 비밀 앞에서 차마 어디로도 발을 떼지 못했다.

진짜 이대로 가야 하나.

아니면 애가 씻고 나오면 싫어해도 붙잡고 물어봐야 하나. 보아하니 동갑 친구 같은데. 컴퓨터 게임을 곧장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대체 이 이상한 이중생활은 언제부터 한 건지.

아무래도 속이는 건 제 동생 같은데 설마하니 혹시 위험한 건 아닌지. 별별 생각이 다 드는 그였다.

그때였다.

저쪽, 거실의 널찍한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간식들 아래에 있는 커다란 택배 상자가 고진영 그의 눈에 들어왔다.

“…….”

별거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한가득 쌓인 낯선 간식들이야말로 오늘 이상행동의 시작이었다.

심지어 평소에 군것질도 안 하던 녀석이 언제나처럼 저를 피해 방으로 들어가다 멈춰서는 먹지 말라고 하는 어린애 투정 같은 걸 했다.

그건 정말 고신재의 25년을 통틀어서 처음 있는 일일 거다.

잠시 망설이던 고진영은 씻는 소리가 들리는 화장실 문을 한 번 흘끔 보고 택배 상자를 슬쩍 테이블 밑에서 잡아 꺼냈다.

박스 위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부산 금정구…, 백한빈….”

사실 웬만한 일이었다면 이정도에서 멈췄을 진영이다.

부산이면 중간고사 끝나고 같이 PC방에 가고, 또 내일모레 만나자고 한 사람치고는 너무 멀리 있으니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왠지 묘한 확신까지 품은 채로 제 휴대폰을 들고 머뭇대다가 그 박스 위에 있는 주소를 통째로 찰칵, 사진으로 남겼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너무 오랜만의 업데이트라 죄송스러워요. ㅠ ㅠ

요 며칠 병원도 다니고 잘 쉬면서 최대한 상태를 많이 회복하고 왔어요. 다음 편은 원래 제가 원하는 템포인 이틀 간격이... 딱 한 편 업로드라도 잘 지켜졌으면 좋겠네요. ㅠ ㅠ!!

항상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하나하나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완전히 가을이 온 거 같아요. 갑작스레 쌀쌀해진 날씨에 감기 걸리지 않도록 유의하시고, 항상 행복한 매일 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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