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38화 (3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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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 받은 거야?”

“왜 왔어.”

“여름옷 좀 가지러 왔지.”

“가지고 빨리 가.”

“아, 왜.”

사실, 정말로 고진영이 제 옷이며 잔짐을 이곳에 남겨야 할 정도로 작은 집으로 이사 간 건 아니었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고신재가 지금 제가 사는 곳에 방문한다면 어이없어할 게 분명할 정도로 잘 갖춰진 곳에서 산다.

하지만 이곳의 방이 남아도는 것을 알던 진영은 회사 근처로 급하게 구한 집에 공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하면서 제가 찾아올 구석을 남겨뒀다.

이런 접점이라도 없으면 가족 행사를 제외하고 1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늘처럼, 뼈저리게 후회했던 스물네 살의 겨울 이후 절대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던 표정을 보고 이야기할 날도 왔다.

고진영은 그 역시도 언제 이렇게 마지막으로 웃어봤나 모를 미소를 건 채로 살살 꾀이듯 말을 이어갔다.

“응? 누가 준 건데 과자 먹지도 말래. 이런 거 욕심도 생전 없던 애가.”

“…옷 뭐 챙기러 왔는데. 얼른 가지고-.”

진영 역시 제 동생이 순순히 말해줄 거라는 기대는 안 했다.

그저 시답잖은 장난을 할 수 있었던 예전처럼 이야기하는 게 좋아서, 몇 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대신 짐을 싸서 저를 쫓아낼 것 같던 동생이 그 커다란 손 위에서는 종종 미니어처처럼 보일 정도로 상대적으로 작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순간, 하던 말까지 멈추고 그 작은 액정을 노려보는 것에 그 역시 입이 다물어졌다.

요 몇 년, 고진영에게 익숙한 고신재의 표정은 두 가지였다.

한 줌 감정이 짚어지지 않는 무심한 얼굴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속이 간지러울 만큼 살랑거리는 눈웃음을 건 예쁜 미소거나.

신재는 출력할 수 있는 게 딱 그 두 가지인 기계처럼 다른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전에 없이 다채로웠다.

휴대폰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짤막하게 몇 번 그 위를 두드린 신재는, 심지어 친했을 때마저 듣기 힘든 욕도 툭 내뱉었다.

“……씨발.”

그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진영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게 눈만 깜박였다.

그렇지만 아직 놀랄 건 더 남았다.

휴대폰을 노려보던 고신재가 갑자기 고개를 휙 쳐들고는 조금 전까지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던 제게 건넨 말이다.

“시간 있지.”

“어? 으응, 시간이야 있는데….”

새삼 시선이 높은 커다란 동생이 보기 힘든 흉흉한 눈으로 묻는 말에 왠지 등줄기로 쭈뼛 소름이 돋은 진영은 괜히 뻣뻣해진 혀를 굴려 얼른 대답했다.

같이 마주 앉아 식사하는 것조차 내켜 하지 않던 동생이 무려 먼저 시간이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하나다.

없던 시간이라도 있다. 무조건 있는 거다.

하지만, 고신재는 자신의 형이 그런 새삼스러운 감상에 빠질 시간을 오래 주지 않았다.

“창고에서 컴퓨터 꺼내. 빨리!”

* * *

“아들. 저녁 그것밖에 안 먹어?”

“점심을 많이 먹어서요.”

“아니, 그래도. 밥을 반 공기도 안 먹고.”

“진짜 소화가 안 되어서 그래. 저 위에 좀 올라가 있을게요.”

한빈은 제 부모님의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뒤통수에 꽂히는 걸 느끼면서도 괜히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현관을 나섰다.

단독주택인 한빈의 집은 1층에는 한빈네 가족이 살고 2층은 거의 10년째 중년 부부에게 세를 주고 있다.

하지만 2층으로 올라가는 큰 계단이 아닌 1층 마당 구석의 돌계단을 쭉 타고 올라가면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곧장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널찍한 옥상에는 식물을 좋아하는 한빈의 아버지가 오래 키운 크고 작은 화분들과 함께 작은 옥탑방이 하나 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부터 한빈의 차지가 된 장소인 이곳은 벌써 몇 년이나 꾸미고 가꿔서 꽤 볼만한 아지트가 됐다.

이전에 살다 나간 사람이 엉망으로 해 둔 이곳을 저만을 위한 공간으로 받는 대신, 한빈은 이 공간에 20대 초반의 어느 정도를 떼어다 썼다.

벽 한 면 칠할 때마다 일주일씩 앓아누우면서도 고집스럽게 마음에 드는 페인트 색을 직접 만들어가면서까지 직접 벽을 꾸몄고, 낑낑대면서 들고 올라와 인조 잔디도 깔고, 예쁜 테이블을 고르고 골라 가져다 뒀다.

한 칸짜리 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온갖 인테리어 서적을 다 뒤져가며 벽지도 바르고, 쓸고, 닦고. 몇 개월 이상을 치우고 뜯는 데만 썼다.

휴학하고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방 안을 다 채우는 데 또 반년은 더 걸렸을 거다.

덕분에 이곳은 이제 어딜 봐도 한빈의 손이 안 간 곳이 없는 썩 볼만한 루프탑 아지트가 됐다.

심지어 언제든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트인 하늘이며 주변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뷰까지 있으니 답답할 땐 이만한 곳이 또 없다.

“후우우….”

한빈은 탁 트인 옥상 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긴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나서야 내내 꾹꾹 삼켜야만 했던 긴 한숨을 터트렸다.

오늘 한빈의 머릿속을 꽉 채운 채 밥도 안 들어가게 한 건 바로 제 삶에 이렇게 얽히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두 명의 남자다.

“이정도면 무슨 스물다섯에 뭔가 있는 건가.”

백한빈은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없었다.

몸이 아프니 그런 것에 투자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반대로 저를 좋아했던 사람도 없었다.

최소한, 직접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 없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푸름에게 같은 남자와, 그것도 고신재와 키스하던 걸 들킨 건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것처럼 식겁할 일이었다.

진짜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은 게 용했다.

푸름이 제가 이제껏 5년간 알고 지냈던 것 이상으로 좋은 녀석이었다는 건, 집에 돌아오는 길에 괜히 울컥해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 덕에 된통 깨달은 것도 있다.

……좋아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그 사람과 목소리가 똑같은 친구와 키스하는 관계는, 정말 정말 정말 이상하고 또 잘못됐다는 거다.

하룻밤 실수로 경계가 흐려진 뒤로 정신도 못 차리게 밀려오는 파도 같은 매일매일에 더 이상 휩쓸려서는 안 된다.

“이건 안돼. 제대로 처신해야 돼, 백한빈. 정신 차려.”

얼굴을 크게 마른세수하며 다시 한 번 길게 심호흡한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빈은 제가 직접 칠한 톤다운 블루의 페인트가 발린 쇠문을 열고 옥탑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 한빈은 컴퓨터를 이곳으로 옮겼다.

마이크를 쓰기 시작하자 밤에 늦게까지 떠들고 게임 하는 게 슬슬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름대로 오래 모은 이런저런 빈티지 아이템까지 해서 살짝 혼종 기운이 감도는 감성 PC방 같은 느낌이 되긴 했지만, 고르고 고른 우드톤의 싱글 침대에 테이블까지 있어서 게임이나 과제를 하다 쉬기에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한빈이 먼저 메시지 창을 띄운 건 제 짝사랑 상대인 가나다라123이었다.

제가 부산까지 거쳐 보낸 선물을 오늘에서야 받았다는 남자는, 제가 고른 지갑이 참 마음에 든다고 했다.

‘진짜 지갑 잘 골랐다 아껴 쓸게’

.

한빈은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를 다시 읽으며 흐리게 웃었다.

지갑은 편하게 쓰는 거지 뭘 아껴 쓰냐고 대꾸했지만, 부산에서 산 거라고 둘러댄 거라 교환도 못 하고 취향에 안 맞을까 봐 엄청 걱정했는데 이렇게 말해주니 키만큼 쌓였던 걱정이 다 풀리는 기분이었더랬다.

백한빈은 가나를 향해 꾹꾹, 힘주어 메시지를 눌러 쳤다.

[가나야 혹시 이따가 접속할 거야?]

다행히도 상대는 곧장 읽고 답장이 왔다.

[응. 몇 시쯤 볼까]

[쫌 이따... 한시간 뒤?]

[그래]

몇 년간 그랬듯 가나와 만날 시간을 조율하는 건 참 당연하고 또 그만큼 쉬웠다.

오늘 온종일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하고 걱정했던 게 우스울 만큼 술술 답장을 보내고, 또 받았다.

하지만 진짜 고비는 따로 있다.

한빈은 제 메시지 즐겨찾기에 엄마, 아빠, 푸름, 그리고 가나 다음으로 있는 다섯 글자의 이름을 노려보았다.

‘무용 고신재’.

어영부영 제게 입술을 맞추고 손을 뻗는 고신재를 밀어내지 않고 쓸려 다니다가 이제 와 이러는 게 참 웃기고 잔인한 일이라는 걸 안다.

자르려면 처음부터 잘 자르지, 딱 잘라 너랑 나는 절대 친구이기만 하다고 끊어내지.

백한빈은 성까지 함께 붙어 우아한 느낌마저 드는 이름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처음엔 살며 한 첫 섹스가 친구와- 그것도 술에 취해 꿈속의 연인인 줄 알고 저지른 일이었다는 건 의외로 타격이 크지 않았던 한빈이다.

물론 정말 놀라기는 했다.

미친 꿈을 꿔댈 때부터 사고 칠 것 같더니 나 정말 제정신 아니구나, 하는 자조 섞인 한탄도 했다.

처음 하루 이틀은 고신재라는 친구와, 아니, 그 ‘남자’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민망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떨쳐내는 건 걱정보다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건 백한빈의 멘탈이 고신재보다 유독 단단하거나 섹스 한 번을 쉬이 여겨서는 아니다.

애초에 스물다섯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한 첫 경험을 그리 쉽게 여길 만큼 가벼운 성격도 못되고, 되레 예민하기 짝이 없어서 작은 스트레스에도 바짝바짝 말랐던 평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백한빈은 제가 고신재라는 남자와 입술을 겹치고 몸을 섞은 게 수많은 하루 중 고작 ‘몇 시간의 실수’였다는 것만큼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 섹스는 단 한 줌의 사적인 마음도 없이, 알코올과 켜켜이 쌓인 다른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만들어 낸 신기루 같은 순간이었다.

그건 그저 실수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는 크고 작은 실수 중, 몇 달은 자다가도 일어나 이불을 걷어찰 유독 큰 실수 중 하나였다.

그래서 대단한 타격 대신 비교적 얼른 떨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키스에는 실수라는 핑계를 덧붙일 수가 없다.

눈이 마주치면 손등을 살살 건드리는 마디마디가 확실하고 커다란 손가락 끝을 피하지 않는 것도, 다른 사람을 피해 몰래 키스하며 혀와 타액을 주고받는 것도, 서로의 숨을 훔치는 것도, 그 무엇도 실수가 아니다.

어느새 머릿속에는 제가 곧이어 할 나쁜 짓의 핑계가 하나둘 떠오른다.

나도 진짜 단호하게 밀어내야 했다는 걸 아는데. 정말 잘 알았지만, 그렇지만.

누군가 제게 먼저 그렇게 훅 가까이 다가와 정말 소중한 듯 입술을 떨어트리는 게 처음이라. 따뜻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끌어안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 모두 조용히 눈에 담는 게 느껴지는 게 처음이라.

……그래서.

“아 씨이….”

바보 같은 문장을 얼기설기 이어가다보니 괜히 눈가로 열이 오르고 입술로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살덩이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한빈은 작게 저 자신을 향한 욕을 중얼거렸다.

하루…… 실수는 했지만, 지금 멈춰야 그 착한 녀석도 상처를 덜 받는다.

해야 한다.

아마도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지금 사람 갖고 논 거냐면서 화를 낼 수도 있지만, 그걸 붙잡고 사과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제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잘라 내야 한다.

백한빈은 저 자신에게 다짐하듯 생각했다.

그러고는 조금 전처럼 힘주어,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야]

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던 평소와는 달리 메시지를 선택한 건 목소리를 들으면 휘둘릴 것 같아서였다. 웃기지만 그랬다.

한빈은 천천히 문장을 이어 썼다.

채팅창만 켜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어느새 가나에게 말했던 한 시간의 여유에서 절반을 날려 먹었지만, 급하게 쓰다가는 말실수를 할 것 같아서였다.

[너 한... 삼십분 뒤에 컴퓨터 켤 수 있어?]

고신재는 메시지를 바로 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도 않았다.

그래 봤자 몇 분쯤 뒤, 고신재에게 보냈던 메시지 뒤의 숫자 1이 사라졌다.

[왜?]

백한빈은 제 휴대폰 액정 위로 떠오른 한 글자 앞에서 왠지 가슴께가 뻐근해질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내뱉었다.

지금 이 순간 고신재가 어떤 표정으로 휴대폰을, 혹은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을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아서였다.

[걔 소개해줄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었다.

[작품후기]

++ ?<힐, 힐, 힐!>은 개인 사정으로 2-3일 정도 더 연재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ㅠ ㅠ

많이 선선해진 요즘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 항상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며칠 뒤에 뵙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하루 더 기다려 주셔서 감사힙니다!!!!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하고,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ㅠ ㅠ!!!!! 늘 비슷하게 매크로처럼 쓰는 후기 같지만...

너무 진심이라 늘 적고 있어요.

저는 가능한 이틀 뒤인 21일 자정에 돌아오겠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한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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