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37화 (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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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 화랑의 강서진 대표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한다.

밝은 갈색의 웨이브 진 머리를 한 그 여자.

그 누구보다 화려하지만, 또 그 누구보다 세련된 그 여자.

중년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있지만 정작 나이를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그 여자.

TV에서 오래전 미인대회 출신의 누구라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있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고전적인 얼굴로 콧잔등에 주름이 질 정도로 환히 웃지만 정작 속을 알 수는 없는, 그 여자.

강서진 대표가 긴 해외 출장에서 귀국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내가 없는 사이 특별히 보고할 사항은?”

“재우 그룹 쪽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자산 정리 관련해서 대표님과 상의할 게 있다고요.”

“저번 주에 손녀를 낳았다던가.”

“예.”

그녀는 제 사무실로 올라가는 발걸음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채로 뚜벅뚜벅 걸으면서 우아한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녀에게 이런 일은 아주 흔하다.

이제 내로라하는 기업이 궤도에 오르고 나면 아토를 먼저 찾는 건 당연한 수순 중 하나가 됐다.

이유는 많다.

미술관 하나쯤 운영하는 게 보기 좋기도 하고, 재산 목록에 조용히 몇 줄 더 추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손꼽는 화백들 중 아토를 통해서만 작품을 발표하는 이들도 많고, 희귀한 소장품들을 옥션에 내기 전 조용히 연락할 때도 적잖다.

딱히 작품을 위해서만 연락하는 것도 아니다.

아토를 통해 평소에는 접점이 없던 유력가의 사람들이 만나는 것 역시 꽤 중요한 존재 이유 중 하나다.

그때만큼은 그 어떤 대단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저 좋은 핑곗거리에 불과해진다.

흔한 정략혼부터 온갖 브로커와 로비스트를 안전하게, 또 고상하게 만날 수 있는 자리.

그 자리가 중요할 뿐이다.

강서진 대표는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다.

원래 후계자로 점쳐지던 그녀의 이복 오빠가 하루아침에 자금 세탁으로 잡혀 들어가고, 남은 조카 하나까지 마약으로 엮어서 부녀가 나란히 감옥에 들어갔던 희대의 사건 이후, 아토는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사실, 사람들은 그때 하나같이 수군거렸었다.

‘강서진이 자기 오빠랑 조카를 완전히 밟아 버렸을걸? 아무리 배가 달라도 말이야, 그래도 자기 오빠인데. 독해, 정말.’하고 말이다.

물론 지금은 그 날에 대해 떠드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과거사에 연연하기에는 지금의 아토를 만든 건 강서진 대표, 그녀이기에.

“저, 그리고. 대표님. 작은 도련님에 대해 보고드릴 것도 있습니다.”

자신의 집무실 코앞까지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발을 옮기던 강서진 대표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춘 건 그때였다.

“신재?”

“예.”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그린 듯한 그녀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강서진 대표는 대답 대신 멈췄던 제 구두를 다시 또각또각 옮기기 시작했다.

누드톤에 가까운 분홍색의 립스틱이 부드럽게 발린 입술이 다시 열린 건, 누구의 귀도 엿들을 수 없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간 후였다.

그녀는 제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곧장 물었다.

“무슨 일이죠?”

“얼마 전, 작은 도련님이 제게 대신 수령 해 주었으면 하는 물건이 있다며 제 주소를 확인했습니다.”

“주소를? 박 비서의 주소를 가져갔다, 이건가?”

“예. 회사 이름이면 안 된다면서 꼭 집 주소여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

비서는 어떤 질문이 따라올지 이미 다 예상한 사람처럼 한 손에 들고 있던 얇은 타블렛 피씨를 곧장 내밀었다.

강서진 대표의 시선이 꼼꼼하게 정리된 액정 속 사진들로 고정됐다.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걸 확인한 비서의 말이 얼른 이어졌다.

“대체로 초콜릿 쿠키와 젤리였습니다. 보시다시피 포장된 작은 선물도 하나 있었는데, 20만원 가량의 중저가 브랜드의 지갑으로 확인됐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꼼꼼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강서진 대표는 그 대답에 전혀 만족하지 않은 듯 섬세한 눈썹을 살짝 찡그린 그대로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한동안 무언가를 가늠하듯 타블렛 액정 위에만 시선이 꽂혔던 여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평범한 거, 확실해요?”

사실 비서는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정도쯤’ 되는 집안에서 20대 자녀를 둔 이들이 가장 흔히 걱정하는 것만큼 뻔한 것도 또 없었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평범한 것의 반대.

돈 많은 집안의 철도, 겁도 없는 멍청이들이 시작하는 온갖 별명의 중독성 심한 것들.

짤막한 문장 뒤의 진의를 그걸 깨달은 비서는, 아, 하고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전보다 훨씬 힘을 주어 말을 받았다.

“-확실합니다. 전량 개봉하여 하나하나 검수했습니다. 모두 평범한 간식들이었습니다.”

드물게도 눈에 띄게 굳었던 여자의 눈매가 언제 그랬다는 듯 느슨하게 풀렸다.

비서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확인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강서진 대표는 곧이어 빈틈이라고는 없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민한 아이인데. 먼저 열어본 흔적은 없게 했겠죠.”

“개봉 시 영상을 촬영해서 수령한 그대로 다시 재배치했습니다.”

“보낸 사람 누군지 알아봐요.”

“예. 이미 확인 중입니다.”

“재우 그룹 쪽도 연락해서 자리 만들고. 가능한 오늘 바로.”

“알겠습니다.”

대표의 얼굴에서는 타지에서의 긴 일정이 주는 피로 따위는 그 고운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서는 그런 자신의 상사를 보며 허리를 꾸벅 숙인 다음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침묵만이 남은 집무실 안.

뭔가를 생각하듯 한동안 타블렛 피씨 속의 애들 장난 같은 과자 꾸러미를 눈에 담던 강서진은, 이내 타블렛 PC를 끄고 제 책상 한쪽으로 놓았다.

* * *

택배 잘 도착했어

무슨 상자가 이렇게 커 오후 6:52

하마

도착했어???????

선물 마음에 안들면 어떡하지ㅠ 오후 7:10

바보 오후 7:10

강의가 끝나고 돌아오자 서울에서 부산, 또 부산에서 서울로 향한 선물상자가 도착해 있었다.

고신재는 제가 옆에서 함께 고르고 또 그걸로도 모자라 부산에 사는 김푸름의 동생에게 제게 직접 보낸 다음, 비서까지 거치는 긴 여행길 끝에 드디어 제게 도착한 상자를 처음에는 한동안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보기만 했다.

제가 정말로 백한빈을 아는 고신재가 아닌, ‘가나다라123’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서였다.

“…….”

그 날, 술집에서 백한빈이 취해 떠드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저 가나다라123이었다면.

그랬다면, 백한빈은 ‘박종우’가 아닌 고신재에게 이걸 보냈을까?

고신재는 왠지 보내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신중하고 생각 많은 성격이라면 이름과 주소를 듣는 순간 교양 강의에서 만난 무용과 사람이라는 걸 곧장 알았을 테니까.

애초에, 그때도 여전히 마이크는 사용하지 않았을 백한빈을 제가 먼저 알아볼 방법은 없다.

현실의 고신재가 사실 짝사랑 상대인 가나다라123과 목소리만 비슷한 게 아니라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백한빈은 어떤 생각을 할지 가정조차 하기 싫었다.

몇 달간 좋아했던 그 콩깍지가 벗겨지다 못해 정신이 확 드는 순간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목 뒤가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한빈이가 먼저 알았으면, 지금 나랑 걔는 친구이긴 했을까?

고신재는 저 자신에게 물었다.

물론 그건 괜한 짓이었다.

지금처럼 일부러 잘 지내도 ‘고신재’는 연애대상이 아니라 그저 친구라고 하는 백한빈에게 가나다라123이자 고신재인 남자는 친구조차 아닐 것 같다는 기분 나쁜 확신을 굳이 자진해서 겪을 이유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낯선 부산 주소로 온 백한빈의 이름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고신재는, 긴 한숨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천천히 상자를 칼로 개봉했다.

어떻게 고르고 또 어떻게 산 것들인지 무엇 하나 모르는 거 하나 없는데도 왠지 하나하나 눈앞에서 다시 두고 살피니 속에서 무언가 들끓는 것도 같았다.

내심 백화점에서 같이 고를 땐 백한빈이 준 지갑은 어떻게 몰래 쓰나 고민했는데, 손에 쥐고 보니 다 괜한 거였다.

쓰기는커녕 아까워서 죽어도 못 쓰겠다.

고신재는 제가 원래 쓰던 지갑에서 딱 9배 더 저렴한 반지갑의 까만 가죽을 손가락 끝으로만 살살 그리면서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냐며 쩔쩔매던 백한빈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때였다.

-띵동!

흔한 노래 하나 틀어놓지 않은 조용한 집 안에서 유독 크게 들리는 현관 벨소리에 고신재는 순간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서 발밑으로 떨어졌다.

지금 이 시간 백한빈이 제가 사는 곳으로 올 리 없다는 사실은 고작 10분 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은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도 저절로 숨소리가 작아졌다.

아니 어쩌면, 잠시간은 숨을 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차마 일어나 인기척을 내서 전자 패드를 확인할 엄두조차 안 나던 낯선 방문객은, 몇 번 더 현관 벨을 누르더니 머잖아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쳤다.

……그건, 몇 년이나 같이 살아 이 순간 울컥 얄미울 만큼 익숙한 속도였다.

순간 긴장이 쭉 풀리기까지 한 고신재는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면서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있었네.”

느지막한 저녁의 방문객은 요즘 뜸했던 형, 고진영이었다.

고신재는 그렇지 않아도 진한 쌍꺼풀이 진 눈을 커다랗게 뜬 자신의 형을 향해 평소보다 유독 뾰족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비밀번호치고 들어오지. 벨은 왜 눌러.”

“어…, 그래도 이제 너 혼자 지내는 집이니까 그런 건데. 왜. 뭐 방해했어?”

“……됐어.”

안 하던 과민반응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잠시나마 얼마나 놀랐는지 여전히 심장이 귀에 가서 붙은 듯 뛰는 게 제대로 된 대화는 어려울 성 싶었다.

고신재는 저를 졸졸 따라오는 것만 같은 형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테이블 위에 있던 지갑을 챙겨서는 얼른 제 방으로 도망치듯 발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형인 고진영이 머쓱하게 턱을 긁적이며 거실로 들어와 제가 조금 전까지 부엌의 큰 테이블 위에서 한껏 벌려뒀던 짐들을 보기 전까지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형!”

“어, 어어? 응?”

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던 신재는, 진영의 시선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온갖 종류의 다디단 간식거리에 머무는 때와 거의 동시에 이전보다 더 급한 목소리를 냈다.

솔직히 그건 고신재 그가 생각하고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날카롭고 다급해서, 사실 그 외침에 멈춰선 고진영보다 입 밖으로 형이라는 단어를 꺼낸 당사자가 더 놀랐다.

덕분에 괜히 덩달아 덜컥 놀란 건 진영이었다.

요 몇 년은 본 적도 없는 목소리며 표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떨떨한데 갑자기 저를 허겁지겁 부르기까지 하니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싶은 그였다.

“왜, 신재야.”

진영은 저를 얼른 붙잡은 것과는 달리 정작 눈이 마주치자 입을 꾹 다물고 속 모를 표정을 걸고 있는 제 동생을 향해서 달래듯 말했다.

얼마 만에 내는 형으로서의 목소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고신재가 머뭇머뭇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과자 먹으면 안 돼.”

“…….”

“젤리도 안 돼.”

뭐랄까.

솔직히 그건, 고신재 저 역시도 너무너무 유치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낼까 말까, 한참 고민한 듯한 문장이었다.

“여기 있는 거?”

“어.”

“이렇게 많은데?”

“…그래도 안 돼!”

“…….”

고진영이 괜히 콕 집어 질문을 이어간 건 정말 이 단 것 일색인 간식이 먹고 싶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애초에 뭘 먹어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어렸을 때부터 청소년기를 통틀어서 쭉 군것질하는 버릇과는 멀었던 진영은 지금도 단 걸 잘 못 먹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굳이 고진영만의 일도 아니었다.

지금 날 선 목소리로 급히 붙잡은 고신재야말로 2kg만 붙어도 몸이 무겁다고 난리, 2kg가 빠지면 힘이 부족하다고 난리일 정도로 예민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군것질과는 거리가 멀었던 당사자다.

답지도 않게 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동생을 두고 고진영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기 시작했다.

진영은 너무 은근하게 웃는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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