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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도 강의실 안에서는 한껏 목청을 키운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내가 바꿔? 어?”
“…….”
“말해 봐, 백한빈. 내가 바꿔? 내가 바꾸냐고. 야. 너 어디서 선배한테 소리를 쳐? 어? 너 내가 요새 좀 예뻐했더니….”
한빈은 땅딸막한 남자 앞에서 작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저 예민한 이목구비가 참 보고 싶었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이 화가 나면 벌겋게 익는 것 대신 파리하게 질리는 쪽이라는 걸 알고 싶지는 않았다.
고신재는 백한빈을 삼킬 듯이 눈에 담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빈아.”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보다 더더욱 선명하게, 또 한 번에 꽂히는 여러 개의 눈이 느껴졌다. 그중에는 눈썹을 치켜뜬 채로 확 뒤를 돌아본 기분 나쁜 삼백안의 남자도 포함됐다.
하지만 고신재는 그 불쾌한 눈을 크게 뜨는 것에는 단 한 순간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저만치에서 저를 마주 보고 있는 백한빈을 향해 말을 이었다.
“오늘 강의는 다 끝났어?”
까만 뿔테 안경 너머의 까만 눈동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봤다는 것처럼 멍하게 얼어있었다.
고신재는 그 얼떨떨한 표정을 보며 오늘 처음으로 눈을 휘고,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오늘 온종일 웃을 기분을 싹 사라지게 했던 사람 앞에 서니 되레 어떤 때보다 상냥한 척 웃을 수 있다는 게 참 우습기도 했다.
“응? 다 끝난 거 맞아?”
“……어.”
간신히 대답을 토해낸 한빈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커다란 백팩만으로도 모자라서 언제나처럼 옆에 낀 가방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가득 차서 유독 두둑했다.
“이렇게 무겁게 들고 다니면 자세에도 안 좋댔지. …줘. 내가 들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왼쪽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을 빼앗아 들자 갈 곳 잃은 백한빈의 마른 손이 머뭇댔다.
사실 그는 지금 이 강의실에 끈질긴 시선들이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저 손을 마주 잡았을 거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용한 데로 갈까, 하고 고신재가 작게 묻자 백한빈이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캠퍼스의 가장 후미진 구석.
이곳은 고신재와 백한빈이 늘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입에 문 채로 짝사랑 상대에 대한 비밀을 소곤거렸던 곳이다.
하지만 알코올 때문이든, 착각과 오해 때문이든, 아니면 뒤늦게 자각한 욕심 때문이든 고신재가 제 여유와 자존심을 내려두고 난 뒤부터는 이 아지트같은 장소의 목적도 꽤 많이 바뀌었다.
“…진짜…, 짜증나. 구상호 그 새끼, 분명히 지필 망해서 그래.”
“이름이 구상호야?”
응, 하고 대답하는 백한빈의 말은 굳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질문을 던진 당사자인 고신재가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팔 하나에 다 들어오고도 남는 마른 허리를 욕심껏 끌어안고서는 파리하게 질렸던 작은 입술을 가볍게 깨문 다음 그 안으로 제 혀를 가볍게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따듯하고 미끌미끌한 점막은 같은 온도를 품은 살덩이를 밀어내지 않고 순순히 반겼다.
사실 이렇게 키스가 당연하게 된 건 요즈음 고신재 그의 노력의 산물이다.
처음으로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사실은 꿈에서 가나와 한 줄 알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사람 미치게 만드는 말을 하는 백한빈에게 쪽팔린 것도, 민망한 것도 모르는 척 들이댔다.
자존심 상해 죽겠는데도 허리가 이상해서 잘 못 걷겠다는 한빈을 온종일 안고 어르면서 중간중간 살살 입술을 부딪치는 것부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뭐 한 거냐며 펄쩍펄쩍 뛰기는 했지만, 어제는 같이 침대에서 뒹굴었는데 입술 가져다 댄 게 대수냐고 물으면 금세 조용해졌더랬다.
그래도 처음에는 입술만 부딪혔다.
그 간지러운 뽀뽀 앞에서 살짝 민망한 듯 미간을 좁힐 때쯤에나 창백하고 작은 입술을 살살 깨물고 빨았고, 지금처럼 그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이 키스를 허락받으려고 참 별짓을 다 했다.
심지어, 도저히 손에 힘이 안 들어간다는 한빈 대신 가나다라123에게 줄 선물상자를 들고 우체국에 갔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아, 씨이. 그렇지 않아도 재수강이면서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비교당할까 봐 혼자 예민해서는. 비슷한 것도 없는데!”
“딱 관상이 사람 여럿 피곤하게 할 상이야.”
“그치!”
입술을 부딪쳤다가 편히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떨어질 때마다 한빈은 혼자 꾹꾹 눌러 참았던 것을 투덜댔다.
어느새 제 품에 안겨 키스를 받는 게 익숙해진 마른 몸을 칭찬하듯, 고신재 역시 턱이며 목선에 쪽쪽 입술을 떨어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 선배라는 놈한테 뭐라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예전에 한 번 뭐라고 했어. 조별과제 하는데 대충 업혀 가려고 하는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해서 뭐라고 했다가, 그때부터 진짜….”
“방금 본 것도 좀 어지간히 역겨웠는데. 너한테 어떤데.”
“……내가 뭐만 해도 선후배 앞에서는 쪽 주는 건 기본에, 교수님 전시회 끝나고 다 같이 모이기로 한 뒤풀이 나한테만 안 전해줘서 혼자 집 말도 없이 집 가는 애 만들질 않나, 작업물 발표라도 하면 내 것만 못 깎아 내려서 안달이고. …몰라. 다 셀 수도 없어.”
“언제부터 그랬다고?”
“신입생 때…. 아, 이렇게 보니까 진짜 지긋지긋하네. 5년을 이러는 거잖아. 휴학하고 와도 변하는 게 없어. 아니, 갈수록 더해.”
어찌나 오래 쌓인 건지 물어보는 족족 쏟아지는 문장에는 억울함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고신재는 그 말을 무엇하나 빼먹지 않고 새겨들으면서도 제 고개를 한빈의 목과 쇄골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기댄 채로 여린 살의 감촉과 간질간질한 향을 들이켰다.
사실, 이제야 좀 그림이 그려진다.
종종 ‘하마’인 백한빈이 구상호인지 뭔지 하는 새끼에 대해 토로할 때마다 늘 위로하고 달래주면서도 늘 지독하게 괴롭힌다는 선배에게 뭐라 말 한마디 못하는 걸까 싶었는데 오늘 두 눈으로 상황을 보니 알겠다.
스무 살.
아직 고등학생티도 다 못 벗은 주제에 이제 나도 성인이라는 자신만 서투르게 붙은 그 시기가 얼마나 미숙하기 짝이 없는지, 그때 들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막연한 기대에 찬 미래를 얼마나 뒤흔들 수 있는지 고신재 역시 누구보다 잘 안다.
제아무리 씩씩한 성격이라고 해도 모든 것이 제 탓이 되는 환경 속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을까.
고신재는 제가 끌어안은 마른 몸을 손가락 끝으로 그리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새끼도 5년간 쭉 그랬다는 거네.”
“…어?”
“5년간 쓰레기짓 했겠지. 휴학하고도 툭하면 학과 일 돕는다느니 하면서 괜히 학교 왔다갔다 하고. 꼭 한 명씩 있는 술 좋아하는 교수 비위 맞추면서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목에 힘이 들어가서는 어지간히 사방에 역겹게 굴었을 것 같은데. 아니야?”
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침묵의 의미가 긍정이라는 사실쯤은 뻔했다.
“그 선배라는 인간을 아니꼽게 보는 게 너 하나일까. 아니면 더러워서 피한다며 하나같이 손 안 대고 있지만, 사실은 잔뜩 이 가는 사람이 5년간 사방에 쌓였을까.”
“…….”
“조금 전에 너한테 소리 지르는 거 지켜보던 사람들 표정, 너랑 그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실은 꽤 볼만했거든. 스무 살에 도와줄 사람 한 명 없던 백한빈과는 좀 상황이 다를 거 같은데.”
백한빈은 이정도만 말해도 충분히 그 뜻을 알 거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분함을 토로하던 입이 꾹 다물어지고,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진 게 그걸 증명한다.
그래. 우리 하마가 어떤 녀석인데. 채팅만으로도 별 등신새끼들 다 패고 다니는데, 실전에 약할까.
고신재는 왠지 피식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으며 한빈의 목덜미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현실의 저보다 가나다라123가 먼저인 백한빈을 두고 부글부글 들끓었던 속 같은 건 이제 기억도 안 난다.
다른 건 모두 온라인 속 짝사랑 상대보다 뒤처진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딱 하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을 품에 안았기 때문이었다.
게임 속 친구는 이렇게 혼자 서러움에 씩씩대던 백한빈을 곧장 데리고 나올 수도, 슬슬 푸릇한 여름 냄새가 섞이기 시작한 인적 드문 곳에서 입을 맞추며 달랠 수도 없다.
그 많고 많은 대학 중에서 어떻게 같은 학교일까.
생각할수록 말도 안 되는 운이다. 고신재는 길고 마른 목에 살짝 이를 세워 박았다.
그때였다.
“-잠깐. 잠까안. 고신재! 잠깐만!”
팟, 정신을 차린 쉰 목소리가 칼칼하게 높아진 채 튀어나왔다.
고신재는 그 다급한 목소리의 뜻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능청스럽고 느긋하게 예쁘게 눈을 휘어 웃으며 대답했다.
“응?”
“‘응’이 아니지! 야, 너 뭐해!”
……다시 씩씩해진 건 정말 참 좋은데, 보아하니 어영부영 단계가 높아지던 스킨십을 자각할 정도로 정신을 차려버렸다.
고신재는 작은 코끝 위에 다시 한 번 입술을 쪽, 떨어트리면서 도리어 물었다.
“여기서는 키스만 돼? 목은 하지 마?”
“…아잇! 야! 아니! 안 돼! 다 안 돼! 다아- 안 돼! 하지 마!”
“왜.”
“왜긴! 우, 우리 이런 사이 아니야!”
“섹스도 하고, 방금도 내내 키스했는데 이런 사이 아니야? 그럼 무슨 사이야, 우리.”
애초에 은근히 스킨십을 좋아해서 낯가림이 끝나고 친해질수록 몸이며 머리를 기대던 백한빈이다.
그걸 잘 아는 고신재는 ‘심지어 너, 지금 내가 안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잖아.’ 같은 말은 괜히 덧붙이지도 않았다.
키스도 못 하게 하는데 안고 있는 것도 못 하면 역시 좀 아쉬워서다.
한편, 조목조목 반박할 수 없는 문장 앞에서 입을 꾹 다물고 쩔쩔매던 백한빈은 한참 뒤에야 이미 처절하게 잘 알고 있던 사실을 콕 집어 외쳤다.
“야. 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알아. 내가 너 도저히 커다란 상자 들고 못 걷겠다고 해서 대신 우체국 들고 가서 부산 주소로 보내기까지 했는데, 그걸 모를까.”
“…….”
“난 상관없어. 네가 박종우인가 김종우인가 뭔가 하는 사람 좋아해도.”
어디까지,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오늘 또 하나 자각도 못 했던 걸 찾아 내려놓게 된다.
그런데도 백한빈이 품에서 얌전히 안겨서 당혹과 미안함이 뒤섞인 눈으로 올려다보는 걸 보고 있자면 메시지 하나에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했던 기분이 퍽 나아졌다.
…애초에, 직접 판 무덤이니 탓할 사람도 없다.
고신재는 뭐라 대답조차 못 하는 백한빈을 도리어 달래듯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너한테 완전히 낚이기는 했지만, 낚이고 나서 생각해보니 나야말로 너랑 더 이상 친구 못 하겠다 싶어졌다는데. 한빈이 너야말로 내 말의 뭐를 이해 못 하겠다는 거야.”
커다란 뿔테안경 너머로 백한빈은 참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이었다.
대체 내 뭐가 좋아, 하는 의심에 가까운 감정부터 익숙하지 않은 행위가 만든 순수한 들뜸, 이건 아닌데 싶은 막연한 불안까지.
평소에는 쉬이 속을 드러내지 않는 심드렁한 이목구비가 드물게도 선명하게 바닥을 보였다.
하지만 한빈이 그 많고 많은 의문 중 입 밖으로 꺼낸 건 좀 다른 내용이었다.
“-다, 다른 사람…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대체 어떻게 그래.”
“…….”
“대체 왜,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어?”
고신재는 창백한 뺨 위로 올라온 흐린 홍조를 내려다보며 제게 떨어진 질문을 충실하게 곱씹었다.
그저 계획했던 대로, 끝을 본 다음 이어나가기만 하면 됐을 친구 자리까지 허물면서 이 실체도 없는 내기를 시작한 이유가 뭘까.
왜, 뭐. 애인이라도 되고 싶은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단순한 단어를 원하는 건 아니다.
사회에서 흔히 연인의 완성형이라고들 말하는 부부가 되어도 남이 나을 지경인 남녀를 한평생 보고 자랐는데, 삐끗하면 남보다, 아니 원수보다 못할 사이로 추락하고 마는 위치는 싫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전한 친구에 만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번 입을 맞추고 저 팔이 끌어안는 순간을 배우고 나니 그 다정한 단어로는 모자라다. 그거로는 이제 만족이 안 된다.
친구도 싫다. 애인도 싫다.
나야말로 하마의, 아니 백한빈의 뭐가 되고 싶은 걸까.
고신재는 잠시 저 자신에게 질문했다가, 얼른 나오지 않는 답을 초조해하는 까만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완전한 답은 아닐지라도 뭐든 꺼내야만 한다.
잠시 말을 고르던 남자는 이윽고 제 마음 속에 있던 가장 솔직한 심정 하나를 꺼내 드는 쪽을 택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반할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나도 저렇게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
“뭐. 괜찮아. 백한빈 너는 평소처럼 그 사람 이야기해.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그렇게 이상한 게 세상에 어디 있어!”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듯한 볼멘소리가 귀여웠다.
고신재는 “난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하고 웃으며 다시 작은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쳐 키스했다. 작게 흘리는 한숨을 대신 삼켰을 때의 뿌듯함이 아랫배로 피를 몰리게 했다.
살짝씩 입술 안쪽과 치열만 건드리던 혀를 고개를 기울이며 깊게 집어넣자 품에 안긴 마른 허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백한빈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은 허벅지에 움찔거리는 쓸림이 전해지는 걸 보니, 아마 저 얇은 청바지를 벗기면 서로 피차일반인 상태일 게 분명했다.
고신재는 한참이나 목 깊은 곳에서 울리는 앓는 소리를 탐욕스레 대신 삼키다가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한숨처럼 물었다.
“우리 집 갈래?”
물론, 그 분명한 의도를 품은 물음의 답은 꽤 따끔했다.
품 안에서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기어이 한 줌 지조를 지키는 꼿꼿한 남자 덕분이었다. 고신재는 곧장 제 등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에 곧은 눈썹 하나를 휘었다.
“이제 슬슬 진심으로 때린다, 백한빈 너.”
“하아, 너, 너네 집 안 가!”
“그럼 영화관? 저녁 식사? 뭐 하고 싶어. 어디 가고 싶어? 응? 기분 전환하자.”
“난 우리 집 갈 거거든!”
“건전하기도 하셔라.”
“……그리고 뽀뽀 그만 좀 해!”
백한빈은 키스라는 단어를 쓰는 걸 좀 부끄러워한다.
서로 정신없이 혀가 오고 가고 서로의 타액을 한참이나 주고받아 놓고도 키스라는 말은 좀처럼 쓰지 않는다.
고신재는 그 숫된 단어 사용에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웃음을 감추지도 못했다.
“왜. 뽀뽀 정도는 좀 하게 해 주지?”
“싫어. …아, 씨. 귀여운 척하지 말고. 그 덩치로 하나도 안 귀엽거든!”
“백한빈 너, 옷 안 벗으면 가차 없네.”
“그만해. 하지 말라고!”
--달그락!
이곳은 이 넓디넓은 캠퍼스에서 새 학기가 시작하고 어느덧 중간고사까지 훌쩍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이 오는 것을 본 적 없던 외진 장소다.
있는 것이라고는 빼곡하게 심어진 나무와 벤치 두 개뿐.
교내의 어느 곳으로도 가기 불편한 덕분에 사람들의 발길이 향하지 않는 이곳을 우연히 찾아낸 백한빈은 신입생 때부터 줄곧 혼자만의 쉼터로 활용하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전에 없던 마찰음이 들렸다.
물론, 애들 장난 같은 대화를 이어가던 고신재와 백한빈은 역시 그 소리를 들었다.
순간 딱 마주친 채 얼어붙었던 두 사람의 시선은 이내 그 낯선 소리가 들린 곳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고개를 돌린 곳 저만치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것도 고신재와 백한빈 두 사람 모두가 알고, 또 절대 이곳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
“…….”
“…….”
“…….”
눈을 크게 뜨고 멍하게 서 있는 그는, 제가 떨어트리며 소리를 낸 텀블러 따위는 신경조차 안 쓰는 듯 잠시 고신재와 백한빈을 보며 그대로 굳어있다가 이내 두꺼운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너…. 너 지금, 뭐….”
사실 그 순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한빈은 알았어야 했다.
이 으슥한 곳을 찾아온 최초의 타인, 그러니까, 다시 말해 제 친구 김푸름이 바라보고 있던 건 ‘고신재와 백한빈’이 아니라 ‘백한빈을 안고 있는 고신재’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 김푸름은 그 웅장한 덩치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날쌨다.
“-너 이 새끼 우리 백한빈이한테 무슨 짓 하는 거야!”
“푸름아아! 아니야! 아니야아! 아니야악!”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거 아주 제대로 미쳐버린 거 아니야!”
또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순식간에 확 목청을 틔우며 달려와 저보다 시선이 높은 사내에게 곧장 커다란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은 실로 포효하는 불곰 그 자체였다.
“안 그래도 요새 좀 질질 끌려다니는 거 이상하다 싶었어! 백한빈 너 이 새끼한테 뭐 약점 잡혔어? 그래?! 야! 너 진짜 죽고 싶냐, 왕자? 어?!”
“안 돼! 야! 야아! 차지 마! 아, 사람을 왜 차!”
“걱정 마. 이 새끼 내가 죽인다. 백한빈! 야, 놔!”
고신재가 대뜸 예고도 없이 곧장 날아오는 주먹을 입가만 살짝 찢어질 정도로 스치며 피한 건 특유의 반사신경이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균형 감각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제 뒤로 보내면서 달려드는 사람까지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다.
덕분에 고신재는 언제 마지막으로 곧장 앉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흙바닥 위에 주저앉은 채로 저를 발로 차려는 건장한 불곰과 그것에 매달려 펄럭이는 잭 스켈링턴을 올려다볼 진귀한 기회를 얻었다.
“아니, 씨발! 백한빈 그보다 너 괜찮아? 어? 저 새끼가 뭔 짓 했어! 괜찮아. 다 말해!”
“…무, 무슨 짓을 한 게 아니라….”
“나 다 듣고 다 봤어! 하지 말라고 하는 거, 저 씹새끼가 무시하고 달려드는 거! 괜찮아. 다 저 새끼 잘못이야. 네 잘못 하나도 없어! 아오, 진짜 확!”
“아니! 아니야!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악! 때리면 안 된다고!”
솔직히, 고신재는 이 흥미로운 개판을 조금 더 구경할 수 있다면 김푸름의 저 우락부락한 손에 한 대쯤 더 맞아도 괜찮았을 거다.
죽이네 마네 하며 날뛰는 모습을 보아하니 선배는 잘못 만났어도 친구는 잘 둬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역시 저는 백한빈과 친구로는 다 만족할 수 없다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확신에 찬 되새김질까지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불곰에게 얻어맞아 죽기 전에 그 우락부락한 팔에 엉겨 붙은 파리한 얼굴의 백한빈이 먼저 졸도해 죽을지도 모르겠다.
고신재는 주먹에 짓이겨지며 살짝 찢어진 제 입술의 피를 살짝 손으로 훔치면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나긋나긋한 문장으로 사진과 두 사람의 험악한 대화에 봄바람처럼 스며들었다.
“한빈아. 너랑 사귀는 거 정말 쉬운 게 하나 없구나.”
“아, 씨! 하여간 고신재 도움이 안 돼, 진짜!”
돌아온 대답은 전에 없이 뾰족했지만 상관없었다.
백한빈이 무슨 수를 써도 제압되지 않던 거대한 불곰이 그 한 문장에 입을 떡 벌린 채로 박제됐으니 말이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새 챕터에 들어왔네요!!! ^ ^
모쪼록 이번 챕터도 잘 부탁드립니다.
또, 제가 작품 공지에도 적었지만... 당분간은 격일 연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ㅠ ㅠ
정말 정말 마음같아서는 최대한 매일 연재를 하고 싶은데, 제가 실은 최근에 발을 좀 크게 다쳐서... 손은 멀쩡해도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면 붓기 때문에 안정적인 작업이 잘 안 되어서 자꾸 계획대로 되지를 않더라고요. ㅠ ㅠ 흑흑.
아무리 자유연재라고 한들 계속 약속을 잘 못 지키느니, 규칙적인 업데이트를 위해 퐁당퐁당 업데이트를 해볼까 합니다. ㅠ ㅠ! 모쪼록 여유롭게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편은 수요일 자정에 가지고 돌아올게요. 항상 정말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