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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각 연애
“아들. 그런데 자고 왔다는 친구 집은 어디야?”
풀린 운동화 끈을 꼼꼼히 다시 묶던 한빈은 뒤에서 들리는 제 어머니의 질문에 대번에 심장이 툭 발밑까지 떨어졌다.
“…하, 학교 근처. 걔 자취해요.”
“어휴. 고생하네. 지방에서 올라온 친군가 봐?”
“그건 아닌데… 형이랑 같이 살다가 지금은 혼자 산대.”
백한빈은 이럴 때 절대 제 어머니를 마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학원 원장 경력만 18년인 어머니는, 속을 꿰뚫어보는 것으로는 이미 다른 경지에 있다. 한빈은 콩닥콩닥 존재감을 드러낸 제 심장 소리를 무시하며 최대한 평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푸름이 말고도 그렇게 친한 애가 또 있었어, 그래? 마침 복학도 딱 맞았나 보네. 잘 됐다.”
“같은 과 아닌데. 걔.”
“으응? 사진과 아니면 무슨 과인데?”
“……무용과요.”
솔직히 마지막 대답은 할 때는 고집스럽게 운동화 앞코만을 노려보던 시선을 저도 모르게 흘끗 뒤로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던 한빈이다.
하지만 그 욕구를 꾹 누른 건 참 잘한 일이었다.
대답이 끝나고 한 2초 뒤, 그렇지 않아도 꽤 높은 편인 제 어머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은 더 높아진 채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무용?! 백한빈. 너어, 엄마한테 솔직히 말해. 남자애 맞아?”
“나, 남자야!”
“진짜? 정말? 엄마 그렇게 촌스러운 사람 아니야.”
“아 엄마! 걔 남자야! 엄-청 커다래! 푸름이보다 훨씬 더 커. 한 190은 된다고요!”
안 되겠다. 진짜 안 되겠다. 빨리 나가자.
한빈은 예쁘게 모양을 잡아 묶던 운동화 끈을 막판에 대충 힘주어 꽉꽉 잡아당긴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체는 틀렸지만 핵심에는 정확히 도달한 이 화제를 더 듣고 있다간 기어이 얼굴이 벌겋게 물들 게 분명했다.
남자에, 엄청 커다란 그 남자와 촌스럽지 않은 것을 하느라 외박한 게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25년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일 없던 아들의 낯선 외박을 며칠 전부터 묻고 싶어 슬슬 기회만 봤던 어머니 쪽의 질문 역시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무용과 애랑 어쩌다 그렇게 친해져?”
“그냥 교양 같이 듣다가. …언제는 외박했다고 엄청 뭐라고 했으면서.”
“얘! 늦으면 늦는다, 밖에서 자면 밖에서 잔다, 당연히 먼저 전화해야지. 말도 없이 외박하는 건 나가 살 때나 해. 한 번만 더 그래 봐, 정말-”
“알았어요. 학교 갔다 올게요.”
한빈은 부리나케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서 집에서 5분쯤 떨어지고 나서야 후아아아, 하고 꾹꾹 참았던 한숨을 길게 터트렸다.
이렇게 살다간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이건 요즘 백한빈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문장 중 하나다.
물론 두 번째로 많이 생각하는 건 내가 또 술 마시면 정말 개다, 개! 하는 몇백 번은 곱씹은 자책이다.
사실 마음 한편에서는 아무리 꿈이라고 착각했다 한들 ‘그런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상태였다는 게 문제라는 자각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술 핑계라도 있어야 살겠다.
그때, 한빈이 잔뜩 힘주어 쥔 휴대폰 액정이 깜박 켜졌다.
‘무용 고신재’라는 건조한 이름으로 저장된 상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오늘 전공 4시에 끝나지. 510?]
얘는 이제 내 전공 시간표까지 다 외운거야, 뭐야.
백한빈은 사진과 전공 강의실마저 술술 나오는 남자의 아침 메시지 알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고신재와 유일하게 겹치는 교양이 없는 날이다.
다시 말해 안 볼 수 있었다면 정말 얼굴 안 보고 끝낼 수 있는 날이라는 건데, 어째 보아하니 오늘 내내 함께할 각이다.
한빈은 알림으로만 먼저 훑어본 고신재의 메시지를 읽지 않고 괜히 머뭇머뭇하다 고신재에게 대답하기 전 제 짝사랑 상대에게 먼저 아침 인사를 보내는 쪽을 선택했다.
…뭐랄까, 이건 한 줌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위나 다름없었다.
어쨌거나 이 모든 초조함은, 결국엔 제가 이 남자에게 반해 혼자 반년 넘게 무럭무럭 은밀한 망상을 키워오다 생긴 대형참사였으니 말이다.
[가나야~ 오늘 밤에 시간 돼??]
[저번에 말했던 생존겜 나왔더라ㅋㅋ]
가나는 메시지를 바로 읽었는지, 숫자가 곧장 사라졌다.
하지만 숫자가 바로 사라진 것과는 달리 답장은 좀 늦었다.
저 나름대로 심란한 속을 달래러 몰래 시도한 정리가 어떤 상황을 만들었을지 상상도 못 하는 한빈은, ‘바쁘면 오늘 안 해도 되고 주말도 있’까지 먼저 이어지는 말을 얼른 먼저 이어 치고 있었다.
[그래 밤에 보자]
[9시쯤]
한빈은 그 회신을 받고 나서야 ‘무용 고신재’의 물음에 답장했다.
* * *
[ㅇㅇ 510 맞음!!]
고신재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은 채로 휴대폰 위에 떠오른 짤막한 답장을 읽고 또 읽다가 뻣뻣하게 당기는 제 목 뒤를 주물렀다.
하지만 긴장한 근육을 아무리 달래도 입 밖으로 나오는 헛웃음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고신재 그는 지금 백한빈을 속인 대가를 아주 혹독하게 돌려받고 있다.
“…보낸 건 내가 먼저인데….”
차라리 몰랐으면 상관없을 일이었다.
제가 먼저 보낸 메시지를 안 읽고 씹은 다음에 가나다라123에게 오늘 밤에 만날 수 있냐고 연락했다는 거.
가나다라123이 대답하고 나서야 제가 보낸 것을 읽고 대답했다는 거, 그까짓 거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아. 진짜.”
고신재는 휴대폰을 소파 구석으로 던져두고 어느새 뜨끈하게 화끈하게 열이 오른 제 얼굴을 크게 몇 번 쓸었다.
어이없고 유치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한다.
심지어, 마음 한 편에서 전혀 익숙하지 않은 서운한 감정이 삐죽 머리를 드는 건 더더욱 염치없다는 걸 잘 안다.
가나다라123과 현실의 고신재를 철저히 분리하기로 마음먹고 또 그렇게 한 건 저 자신이다.
거기에 발등이 찍히다 못해 매일매일 자존심이 상하고, 상하고, 또 상하는 일이 생기는 건 죄다 제가 자처한 일이다.
머리로는 안다.
고신재는 정말 죽을 만큼 내키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어쨌거나 저도 전공 강의를 들으러 가기는 해야 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오늘은 전공 사람들까지 들끓는 속에 기름을 부었다.
정말 웃을 기분이 아닌 날에,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질문으로 말이다.
“흠흠. 신재야. 너 혹시 개 교수한테 뭐 언질 받은 거 있냐?”
학기 초.
같은 남자 동기가 없다고 주구장창 붙어 다니던 김유민은 3주차쯤 됐을 때부터 남자 후배들을 데리고 대장놀이 하는 데에 맛을 들였다.
이번 학기 따라 딱 둘 뿐인 윗 학번의 남자들이 퍽 개인주의 성향의 사람만 남자, 호랑이 없는 데 여우가 왕이라고 아직 머리도 다 기르지 않는 김유민이 아직 고등학생티도 못 벗은 신입생들이며 아래 학번 남자들을 데리고 목에 힘을 주기 시작한 거다.
실기 강의가 끝나고 수건으로 땀을 닦던 고신재는 저만치에서 이쪽으로 온 신경을 집중하는 같은 과 사람들을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
“무슨 언질.”
“왜. 그…, 예술센터 공연 올라가는 거 말야. 중간고사 끝났는데도 별말이 없잖아? 다른 애들도 몇 명 물어봤는데 다 별 얘기 못 들었대고.”
“…….”
“아, 물론 강의 듣는 사람한테 다 물어본 건 아닌데. 이게 또 단톡에 물어보기도 좀 그런 화제잖아. 다들 궁금하니까 한 명 한 명 붙잡고 슬쩍 떠보는 거지, 뭐. 하하.”
오늘은 정말이지, 고학번 선배의 대장 놀이에 동기인 제가 가장 큰 방해라는 걸 눈치채자마자 매일같이 친한 척하던 게 싹 사라진 동기 녀석의 비위를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캠퍼스 한복판에서 마주쳐도 절 못 본 척하며 뒤에 뒤따르던 후배들이 저를 보고 꾸벅 인사하는 것조차 거슬려 죽으려고 하던 시선을 모를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다.
지금도 보아하니 저와 눈인사만 할 정도로 데면데면한 여자 동기와 선배들에게 ‘그까짓 거 제가 물어보고 오죠. 제가 신재랑 친하잖아요.’ 하고 호탕한 척 다가온 게 분명했다.
그녀들의 시선을 등에 업고 요 몇 주 한 번도 부른 적 없던 제 이름을 살갑게 불러대는 게 어찌나 거슬리는지.
평소 같았으면 원래 이런 녀석이었는데 뭘 하고 심드렁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정말 오늘만큼은 그 흔한 눈웃음 한 번 쳐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되물었다.
“내 대답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있나?”
“어?”
“참 오랜만에 얘기하는 거 같은데, 김유민 네가 궁금한 것도 아닌 것 같아서.”
“…….”
“뭐. 그래. 오디션 보러 오라는 말은 하더라.”
후배들 앞에서 꽤나 잘난 척했을 텐데.
실상은 김정렬 교수가 올리는 공연의 오디션 제안조차 받지 못했다고 하면, 보통 울컥할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고신재는 늘 그랬듯이 빙글빙글 웃지도, 모르는 척 넘어가지도 않았다.
네가 지금 친한 척하는 게 참 우습다는 제 속내 역시 굳이 감추지 않았고 말이다.
김유민은 대답이 없었다.
고신재는 그런 제 동기를 내버려두고 먼저 성큼성큼 탈의실로 향했다.
등 뒤로 끈적끈적 달라붙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벌써 3시 20분이다.
대충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백한빈을 보러 가야 한다.
제가 생각해도 참 우스웠지만, 오전 내내 이렇게 저를 휘두르고 들끓게 했던 당사자의 얼굴을 보면 좀 나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보낸 메시지는 안 읽은 척 넘겨놓고 가나다라123을 챙긴 다음 그 답장을 받고 나서야 아는 척하는 게 아주 조금은, 아주아주 조금은 얄미워서 사실 오늘은 정말 안 보고 건너뛸까 싶었는데.
정작 백한빈을 마음껏 볼 수 있는 4시가 가까워지자 머릿속엔 창백하고 부루퉁한 얼굴뿐이다. 그 작은 입술뿐이었다.
하지만, 어째 오늘은 영 시작부터 평탄한 날이 아니었다.
사진과가 있는 5층은 늘 다소 어수선한 무용과는 달리 한층 건조한 느낌이다.
끼익, 끼익 하고 마룻바닥 마찰음이 나지도 않고, 우당탕하는 소음도 없다.
특히 지금처럼 한창 빽빽한 강의 시간이 지나간 오후는 느긋한 햇빛만이 늘어질 뿐이다. 고신재는 이 고요가 참 마음에 들었다.
또, 강의가 끝나면 그 기묘할 정도의 고요함이 와르르 깨지는 것도 좋았다.
백한빈 나오겠다.
고신재는 저쪽에서 들리는 의자 끄는 소리를 들으며 살짝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약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제야 신경 쓰였다.
거울 한 번 더 보고 올걸, 뒤늦은 생각을 해봐야 늦어도 한참 늦었다.
사진과 전공 강의실 바로 맞은편의 벽에 기대고 서 있자 삼삼오오 가장 먼저 나온 교수 다음으로 삼삼오오 몰려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고신재는 그들 너머로 새하얗고 창백한 얼굴을 찾아 훑었다.
그러나 당사자보다 먼저 찾은 건 어디서든 곧장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였다.
“-백한빈 후배님?”
“……네?”
저마다 떠들며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고작 단 어절의 대답이 곧장 귀에 들어올 수 있다니. 참 새삼스럽게 반가웠다.
반갑다니. 참, 나 이제 내세울 것도 없구나. 고신재는 내심 생각하며 픽, 웃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가 그렇게 마냥 웃으면서 귀에 담을 내용은 아니었다.
“어째 나랑 이번 연작 주제가 좀 겹치는 것 같던데. 그렇게 생각 안 해?”
“선배님은 길 위의 사람들이고, 저는 길 위의 동물들인데…요.”
“어어. 그래. ‘길 위에’. 장소가 따악 겹치네. 둘 다 같은 거로 하느니 둘 중 하나는 다른 거 하는 게 좋지 않나.”
그리 낯설지도 않은 진상의 분위기다.
하지만 그건 사진과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강의실을 빠져나오던 몇은 제 근처에서 슬쩍 안을 들여다보고 있고, 또 어떤 무리들은 안에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고 있다.
그들의 얼굴 위에 떠오른 표정은 참 손에 그릴 듯이 뻔하다. ‘저거 봐, 또 시작이네’.
“사람이고, 또 동물인데 그리 겹치는 건-”
“아이참! 왜애. 다른 거 연작 삼을만한 거 많잖냐. 환경, 교통, 어? 어? 좋은 주제 세상에 얼마나 많아. 안 그래? 좋은 주제 많고 많은데?”
“상호 선배님, 잠시만요.”
“어어, 그래. 후배님. 잘 생각해 봐. 알겠지?”
“-이게 겹쳐서 문제가 될 거 같았으면 교수님이 먼저 말하지 않으셨을까요. 수진이랑 혜리만 봐도요. 정말 겹치는 게 있으니까 조율을.”
“에헤이, 동물은 치트키잖아, 마!”
“선배님!”
“야!”
네가 그 ‘개쌔끼’구나.
고신재는 살짝 코가 막힌 먹먹한 목소리가 백한빈의 말을 자르는 순간 확신했다.
몇 년 전, 하마가 제게 실수로 제가 찍었던 사진을 보냈던 그 날 말했던 그때 그 ‘개쌔끼’. 나중에도 종종 몇 번이나 등장했던 진상 중의 진상.
저 짜증 나는 노성을 내지르는 면상은 보지 않아도 어떤 놈인지 알겠다.
고신재는 벽에 기대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 다음 강의실의 입구까지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