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33화 (33/65)

33

와. 씨.

정말 역대급….

백한빈은 환한 아침 햇살에 눈을 뜨기도 전에 생각했다.

사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눈을 뜨기도 싫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상쾌한 하루를 맞는 건 사람이 하는 일이다. 저 같은 ‘사람 새끼’가 할 일상적인 루틴이 아니다. 정말 죽어도 싸다.

꿈을 꿨다.

거지 같은 꿈을 꾸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지만, 정말 이번에는 선을 넘었다. 선을 넘다 못해 아예 줄넘기를 했다.

이 망상 대잔치에서 아무리 잘 쳐줘도 이해할 수 있는 건 뽀뽀까지다.

그런 건 드라마만 봐도 흔하게 나오니까. 그러니까, 백번 양보해서라도 반나절 정도 심란하면 끝난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아무리 좋아도,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진짜 사람 새끼도 아냐….”

정말이지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좆같을까.

백한빈은 살며 단 한 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제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더욱 지옥에서 갓 기어 올라온 좀비의 첫 인사처처럼 음산하게 바닥을 긁는 걸 보고 더욱 우울해졌다.

진짜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쪽팔려서, 아니 미안해서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한빈은 흐어어엉 하고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간밤에 짝사랑 상대를 만났던 여느 때처럼 푹신한 침대 위에서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자책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백한빈을 방해하는 게 두 개 있었다.

첫 번째는 분명 뇌에서 명령이 떨어졌을 텐데도 꼼짝하지 않는 허리였다.

백한빈은 눈을 감은 그대로 제 몸을 다시 옆으로 돌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허리가 꼼짝도 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잠이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사지의 근육이 땅기고 욱신욱신 한 게 팔다리가 몸통에 붙어있는 것 같기는 한데,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어제 너무 무리하고 돌아다닌 다음에 술까지 마셔서 그런가.

한빈은 평소보다 유독 환하게 쏟아지는 햇빛에 얼른 떠지지 않는 눈을 그제야 간신히 살짝 떴다.

“…….”

“…….”

그리고 이내, 백한빈은 제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를 시야가 번지는 육안으로나마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끔벅, 끔벅.

부을 대로 부은 백한빈의 눈이 고장 난 태엽 인형보다도 느리게 몇 번 깜박였다.

눈앞이 보이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안경을 쓰지 않아 뿌연 시야로도 충분히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반듯하니 잘생긴 얼굴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건 저를 언제부터 마주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슬쩍 고운 눈썹을 휘고 웃기까지 했다.

그 순간, 백한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은 이거였다.

……선물 속의 선물?

생각해보니 어제 고신재와 가나에게 줄 선물을 사러 몇 시간이나 백화점에 처박혀 있다가 집에 간 기억이 없다.

설마하니 외박을 했을 리는 없으니, 이제 정말 하다 하다 짝사랑 상대와 관계를……, 하는 꿈을 꾸고 그거로도 모자라 하나 더 꾸는 모양이었다.

백한빈은 오늘따라 더욱 살랑살랑 간지럽게 눈웃음치는 그 곱상한 얼굴 앞에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예쁘게 웃으며 눈을 마주치던 남자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안녕. 잘 잤어?”

누구는 좀비의 솔로 공연 같던 목소리인데, 누구는 꿈속의 꿈에서마저 저와 비교할 바가 아닌 나직한 저음이었다.

백한빈은 그 듣기 좋은 목소리의 남자에게 조금은 자괴감이 뚝뚝 떨어지는 대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

“…한빈아?”

왜, 아무리 잠에서 막 깨서 몽롱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에겐 촉이라는 게 있다.

처음에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꿈속에서마저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적 없던 저 잘생긴 남자가 오늘따라 너무너무 현실감 있게 헝클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어? 머리가 좀 부스스하네.’로 시작했던 의문은 ‘어? 왜 옷을 안 입고 있지?’로 이어졌고, 그 다음은 ‘야 뭔데 나도 옷을 안 입고 있냐?’로 완성됐다.

그것까지 짚어내고 나니 가면 갈수록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지는 허리와……, 살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둔부의 이물감이 기묘할 정도로 선명해지기 시작했고 말이다.

등줄기를 타고 긴장이 흐르며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순간의 살벌한 위험신호가 주는 긴장감에, 한빈은 저도 모르게 옹알이처럼 툭 입을 열었다.

“…나…, 나, 안경….”

“아. 그래, 안경. 잠깐만. 가져다줄게.”

하지만 불길함 중 가장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건, 제 말에 침대 옆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의 조각상 같은 나신이 보여주는 완성도였다.

그건 백한빈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한 줌의 잠기운마저 실로 완전히 달아나게 하기 충분한 문화 충격이었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입도 못 다물고 하나하나 새겨 그려진 듯한 근육들이 실오라기 하나 가리는 것 없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걸 바라보았다.

완벽한 역삼각형의 몸에 말랑한 부분 하나 없이 탄탄하게 뻗은 팔과 다리. 그 위에 얼마나 오래된 운동으로 섬세하게 자리했을지 모를 근육.

그리고 왜, 그 중심에 있는, 서서 걸을 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번지는 눈을 거듭 힘주어 깜박이게 되는 크기의…….

“…….”

상상이면.

꿈이면, 이렇게까지 퀄리티가 좋을 필요가 없다.

대학교 1학년 습작에 업계 10년차 모델링이 끼는 건 좀 너무했다.

백한빈은 까슬하게 곤두선 제 팔뚝의 소름을 느끼며 얼빠진 표정으로 남자의 잘 뻗은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안경이 없어서 실루엣이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데도 성큼성큼 침실 밖으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끝내준다는 것만큼은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다행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걸어 다니는 루브르 조각상 같던 남자는 커다란 손에 제 안경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는 진한 남색의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한빈아. 너 시력 몇이야?”

“……어?”

“눈 많이 안 좋아? 시력 안 좋으면 렌즈 두꺼운 거 써서 안경테 아무거나 못 한다고는 들었는데.”

슬리퍼를 신은 것도 아닌데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걷는 남자는, 백한빈에게 손수 안경을 쥐여주고 다시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받은 안경을 멍하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남자의 웃음기 어린 말이 이어졌다.

“안경 내가 하나 새로 사 줄게. …아, 지금 거가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잘 어울리는데, 얼굴을 너무 가리니까. 그것만 좀 아쉬워서.”

“…….”

“싫으면 편하게 말해. 좋아도 편하게 말하고.”

참 눈물 나게 다정한 목소리다.

백한빈은, 저 목소리를 참 좋아한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도롱이처럼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서 손에 들린 안경과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인 남자를 번갈아 보는 한빈의 시선이 스멀스멀 불안에 차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한빈은 차마 무서워서 제게 들린 안경을 쓸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물론 그걸 알 리 없는 남자는 백한빈의 기묘한 침묵을 눈치채고 느긋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백한빈?”

“…….”

“한빈아, 왜? 어디 몸 불편해? 아파?”

살면서 부모님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저를 건강을 챙겨준 사람이 몇이나 됐었나.

백한빈은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답지 않게 말을 빠르게 쏟아내는 남자를 불안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뭇머뭇 안경을 썼다.

안경은 간밤에 닦지 않아 지문과 먼지가 묻어 얼룩덜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썩 시력이 좋은 편이 아닌 맨눈으로 봤을 때보다야 훨씬 더 초점이 잘 맞았다.

덕분에 쏟아진 질문세례보다도 훨씬 더 선명한 걱정을 갈색 눈동자 가득 품고 있는 남자, 고신재 역시 선명하게 들어온 한빈이었다.

“왜. 어디가 안 좋은데. 응?”

이어지는 고신재의 말은 정말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급히 달래는 것 같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빈은 이번에도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저분한 제 안경 너머로 눈에 들어온 제 가슴팍의 수없는 잇자국과 울긋불긋한 흔적 보고 순간 말문이 막힌 탓이었다.

심지어 연한 갈색이었던 유두와 유륜마저 붉은 기가 돌고, 만지면 아플 것처럼 부어 있기까지 했다.

경험은 없지만 바보는 아니다.

정신이 선명해질수록 솜털이 쫙 곤두서고, 몸의 이런저런 통증들이 선명해진다.

특히, 허리와… 민망한 부위의 이질감이 ‘진짜’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정말, 정말 진짜처럼.

한빈은 아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응?”

그건 온 신경을 백한빈에게 집중하고 있었을 남자조차도 듣기 어려웠던 거라, 고신재는 침대에 누워 고개만 빼꼼히 내놓고 있는 한빈에게 제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한빈은 그의 선명한 갈색 눈동자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조심조심 말을 이었다.

“…꿈.”

“…….”

“…꿈이…, 아니라. 우리, 정말로…?”

그건 첫 물음보다도 훨씬 더 제대로 된 발음으로 고신재 역시 분명히 어렵지 않게 식별해냈을 거다. 하지만 한빈이 무슨 말만 해도 뭐든 해 줄 것처럼 굴던 다정한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백한빈은 남자가, 그러니까 고신재가 드물게도 석상처럼 굳어있는 것을 코앞에서 눈에 담았다.

긴 속눈썹이 몇 번 깜박이고 시작점부터가 높고 오뚝한 코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었다.

느슨하고 부드러운 눈매 너머의 흑갈색 눈동자가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산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하.”

백한빈의 바로 옆에서 작은 속삭임 하나라도 더 듣겠다는 듯 붙어있던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헝클어진 것조차도 근사했던 머리를 쓸어 넘기기도 하고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며 산만하게 침실을 왔다 갔다 하며 중간중간 헛웃음치고는 날 선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뿐일까.

평소에도 혈색 좋았던 고신재의 얼굴은, 가운 너머로 보이는 가슴팍과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얼굴, 귀 끝까지 모두 다 빨간 토마토처럼 익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를 올려다보면 백한빈은 저 역시 지렁이가 꿈틀대듯 간신히 몸을 일으켜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언제나 나직하고 다정다감했던 목소리가 먼저 터지듯이 쏟아져 오는 게 먼저였다.

“-뭐, 꿈?”

솔직히 백한빈은 고신재가 저렇게 커다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줄 몰랐다.

“빌어먹을, 개 같은 꿈?!”

그제야 간신히 누워 있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아닌 자세에 도달한 한빈은, 눈가까지 벌겋게 익은 남자가 그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작은 삑사리를 낼 정도로 외쳐 묻는 걸 들으며 바짝 마른 까칠한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 그게 말이다, 고신재야.”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꿈이었어, 백한빈!”

“어어….”

“눈알 굴리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솔직히 말해. 언제부터 그 씨발할 꿈이었냐고! 더 이상 상할 자존심 같은 거 남아있지도 않다 싶었는데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였어, 너!”

“나, 나도 그건 잘 모르겠는데.”

“백한빈 네 좆같은 꿈인데 그걸 어떻게 몰라!”

진짜 꿈속의 꿈인가?

그렇다면 다정했던 우리 고신재는 어디로 갔을까. 평소에 욕도 안 하고 목소리 한 번 크게 낸 적 없던 애였는데. 아니다, 저렇게 얼굴이 새빨개진 것도 처음 보는 것 같다.

백한빈은 ‘개 같은 꿈’과 ‘씨발할 꿈’에 이어 기어이 좆으로까지 떨어진 제 망상월드를 향한 비난을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작은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하찮은 변명을 이어갔다.

“그으…, 그니까. 좀 간당간당해. 술을… 마시는데. 신재 네가 갑자기 눈앞에서 뿅! 사라져서….”

“…….”

“아니, 대체 얘는 어디로 갔지? 생각했거든? 그런데 정신 차려보니까 다시 걔가 뿅! 있는 거야. 그, 그래서…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어디서부터 진짜고 꿈인지….”

최대한 나름대로 열심히 꺼낸 재구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걸 들은 당사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백한빈은 고신재가 제 쪽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침대 저쪽에 그 길쭉한 다리가 무너지듯 털썩 앉더니 머리를 짚고 사지가 몸서리치듯 웅크리는 걸 보고 앗차 싶어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 침묵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제 지난밤…… 현실 포르노 상대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듯했다.

번개맞은 타란튤라처럼 긴 팔다리를 웅크리고 있던 그는, 별안간 확 고개를 쳐들고 평소 가만히만 있어도 웃는 상이었던 눈을 흉흉하게 뜬 채로 날 선 비난을 이어갔다.

“-네가 나 꼬셨잖아, 백한빈!”

아니, 사실 비난이라기보다는…… 책망과 좀 더 색이 비슷하기는 했지만.

여하튼 한빈은 갑작스레 방향이 바뀐 말에 잘 움직이지도 않는 엉덩이를 들썩이기까지 하며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해명했다.

“……나? 내가? 나, 나 안 그랬는데?”

“키스하려고 했잖아!”

“그야…, 그랬지만. 그건, 이런 꿈을 꾼다라고 말해주려고 한 건데. 입술 안 닿았는데.”

“나도 처음엔 안 닿았었거든! -그런데 백한빈 네가 뭐랬어. 진짜 안 할 거냐고 그랬지!”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그건 기억이 좀 가물가물….

제가 떠올린 말이 고신재의 속을 뒤집어 놓을 거라는 걸 깨달을 눈치는 있던 백한빈은, 차마 그 의문문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혼자 속으로만 곱씹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표정에서 티가 난 모양인지, 고신재는 서글서글하던 눈매를 다시없이 서늘하게 떴다.

“꼬신 사람이 잘못이야 넘어간 사람이 잘못이야?”

“…바… 반반…?”

“뭐?”

“아, 아니, 미안. 미안. 미안해.”

아이 씨…….

못 걷는 건 난데…….

처, 첫 경험을 한 것도 난데.

그런데 왜 그 처음에 부끄러워 할 겨를조차 없이 사과만 하는 걸까.

백한빈은 머리 한구석에서 살며시 고개를 드는 소수 의견을 간신히 무시하며 그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후우우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쉬고 있는 고신재의 눈치를 봤다.

늘 그렇게나 여유만만하더니 손등까지 붉게 익어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숨을 고르는 저 장신의 남자를 보고 있노라니, 적당히 아른아른한 필터가 끼어서 뒤죽박죽인 간밤의 음란한 기억이나 민망한 부위의 이물감보다도 지금 상황이 훨씬 더 선명하게 실감 나는 한빈이다.

한빈은 제 뺨마저 뒤늦게 뜨끈뜨끈하게 상기되는 걸 느끼며 긴장 어린 한숨을 토해냈다.

백한빈이라고 충격받지 않은 건 아니다.

진짜 어떡하냐 싶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다.

…하지만.

“신재야.”

“…….”

“야아, 고신재야.”

신체조건상 육체적 데미지는 제 쪽이라지만, 어째 딱 봐도 정신적 데미지는 저쪽이다.

아니 데미지 수준이 아니라 거의 멘탈 파괴 수준 같다.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꼬셨다’라고 하는 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한빈은 끄으으, 하는 소리까지 내며 이불로 돌돌 만 제 몸을 꿈틀꿈틀 움직여 고신재의 근처로 갔다. 여전히 꿈 같고, 실감도 안 나지만 그래도 엉킨 지금을 풀긴 풀어야 했으니 말이다.

백한빈은 여전히 붉게 익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건 한빈이 제 몇 안 되는 친구이자 하나뿐인 연애 상담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너무 취해서…, 아니, 그것보다 애초에 그런……거로 상상을 하면 안 됐는데. 아무리 꿈이어도. 이것 때문에…, 서로 어색해져도 할 말은 없지만. 신재야. 우리….”

“-내가 걔보다 못한 게 뭐야.”

“……어, 응?”

“난 왜 안 되는데?”

하지만 내내 침묵하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빈이 이 순간 머리를 굴려 예상할 수 있는 수많은 예상 패턴 중 그 어디에도 없었다.

“뭐……가?”

“-그 게임 친구랑 나. 목소리도 똑같다며.”

“……”

“어제는 나랑 섹스까지 잘했잖아. 네가 나 끌어당겨 안기까지 했잖아. 키스도 몇 번이나 하고, 내가 너한테 넣고 쑤실 때도 좋아했잖아. 심지어 꿈속으로는 내 얼굴 달고 ‘좋은 것’도 한다며. 그런데 왜 우리가 섹스 한 번 하고 서로 어색해져?”

빠르게 쏟아지는 문장은 고신재 그가 평소에 자랑하던 어떤 여유도 없었다.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기는 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빨갛고, 늘씬하고 긴 목에는 퍼런 핏대까지 서 있다.

한빈은 저 잘나디 잘난 남자가 제게 하는 말이 순간 머리에 입력이 안 되어서 멍하게 입만 벌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단어도, 문장도 머리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건 고신재인데.

그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잘난 고신재인데. 녀석이 하는 말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게 꿈보다도 더 꿈 같았다.

한빈이 잠시 얼이 빠져있자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그마저도 못 견디겠다는 듯 조급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나오는 족족 이해되는 건 하나 없었다.

“내 얼굴이랑 몸은 되는데, 왜 나는 안 돼. -심지어 게이이기까지 한데!”

“아, 아니, 그, 야. 그건.”

“납득 가능한 이유로 설득해. 안 되면 책임지고.”

“……책임?”

“네가 먼저 꼬셔서 뒹굴었는데 책임 안 져? 너 아무하고나 원나잇하는 저질 게이야? 따먹고 나면 뒤도 안 돌아보는 쓰레기였어?”

“-아아니! 아니지! 나, 나 진짜 너랑 한 게 처음인데!”

“나도 남자랑 한 거 처음이거든! 똑바로 대답해. 대체 그 새끼는 되고, 왜 난 안 되냐고!”

아마 이건 섹스하고 난 다음 날 듣는 고백으로는 가장 살벌할 거다.

25년 인생을 탈탈 털어 오늘이 처음이지만, 한빈은 감히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벌하긴 할지라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짙은 흑갈색의 눈동자가 담긴 눈가가 새빨갛게 물든 채로 옅게 떨리는 게 고스란히 보이는데, 저걸 어떻게 농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백한빈은 왠지 저 열이 제 눈가로도 옮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쏟아진 질문의 답을 간신히 입 밖으로 토해냈다.

“그야……, 우린 친구잖아!”

쉬고 갈라진 목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 형편없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고신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빈은 제 대답에 천장을 보고 더운 한숨을 길게 내쉬는 남자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긴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쉰 고신재는, 별안간 자세를 바로 하더니 시선을 똑바로 맞추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한빈.”

한빈은 그 어떤 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응, 하고 대답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이어진 문장이 그보다 좀 더 빨랐다.

“나 너랑 친구 할 맘 없어졌어.”

묘하게도 그건 고백보다는 무언가를 향한 선전포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작품후기]

+++업데이트 관련 공지를 올렸습니다. 혹 시간이 있으실 때 확인해주시면 기쁘겠습니다. ㅠ ㅠ 34편은 13일에서 14일로 넘어가는 월요일 자정에 업데이트 됩니다.

++문의를 주신 독자님이 계셔서요... 키워드엔 적지 않았지만 둘은 첫 연애 첫 경험 맞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이어갈 이야기라 이 부분은 느긋하게 기다려 주세요. ^ ^* 항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 megacoffee님!!! 후원 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 ^

하나의 분기점이 될 챕터 3이 끝났네요.

항상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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