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29화 (2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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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기로다.

고신재는 제 눈을 마주 보지도 못하는 백한빈을 여기서 놔 줄지, 아니면 드디어라면 드디어 떨어진 기회를 조금 더 붙잡을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생각을 많이 할 일도 아니었다.

그가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비밀을 쥔 쪽이 자진해서 실책골을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말 못 해.”

“…말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해?”

“아, 씨….”

굳이 채근하지 않아도 입을 여는 족족 알아서 진실에 가까워지는데, 얼굴이 벌겋게 될 정도로 쩔쩔매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못 할 짓이다.

고신재는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면서 백한빈을 그저 지긋이 눈에 담았다.

아니나다를까 그건 백 마디의 말보다 유효했다.

정말 그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한빈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혼자 낑낑대며 전에 없던 당혹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기대도 하지 않았던 해명을 술술 이어갔다.

“너, 신재, 너…, 이거 들으면, 좀 선 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니, 백 퍼 그렇게 생각해.”

“안 그럴 수도 있잖아.”

“백 퍼야!”

“그리고 그깟 선 좀 넘을 수도 있지.”

“아니이…….”

“들어나 보자고. 그리고, 뭐가 됐든 꿈인데 뭐 어때. 상상도 마음대로 못해?”

평소에는 표정의 변화가 그리 많지 않아서 끝이 뾰족한 눈을 가늘게 뜨고 퉁명스럽게 툴툴대는 게 일상이던 백한빈은 오늘따라 드물게도 생각이 잘 읽혔다.

작은 입을 우물쭈물하는 예민한 얼굴 가득 ‘그, 그런가?’하는 망설임이 둥둥 떠오르는 게, 보아하니 절반은 넘어왔다.

고신재는 그런 백한빈을 달래는 것 대신 맥주캔을 가볍게 짠 부딪히는 걸 택했다.

“…야. 고신재. 우선 짚고 넘어갈 거 있어.”

“응.”

“나 원래는 이런 애 아니거든. 진짜 진짜 아니거든? 진짜 하늘에 맹세코 전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어.”

“그래.”

“원래도 꿈을 자주 꾸는 편이기는 했는데 개꿈이 다였단 말이야. 그 전에 제일 꿈같은 꿈 꾼 건 우리 고모 태몽뿐이었다고!”

그래 봤자 꿈인데. 저렇게 끙끙 앓을 필요가 있나?

고신재는 대답 대신 고개만 느슨하게 끄덕이며 생각했다.

별 의미 없이 던진 가벼운 질문에 이렇게까지 펄쩍펄쩍 뛰며 밑밥을 깔아대니 차마 그 내용을 상상하기도 힘들어진 그다.

순진무구한 의아함을 뒤로한 고백은 이제 퍽 진지하게 가라앉기까지 한 채로 이어졌다.

“후우우, 그런데. 한 작년부터인가…. 걔가 나오기 시작했어.”

“꿈에?”

최대한 담백하게 건넨 호응이었건만, 백한빈에게서는 머뭇거림이 묻어나는 되물음이 돌아왔다.

“……징그럽지 않아?”

“뭐가.”

“누구 좋아한다고 해서 꿈까지 꾸는 거…?”

“꿈에 나오는 걸 백한빈 네가 어떻게 막아.”

“아, 씨! 내 말이! 내 말이 그 말이야! 나도 처음에는 얼마나 놀라고 현타 왔었는데!”

“술 천천히 마셔. 기분만 낸다며.”

“안 마시면 말 못 해!”

얜 진짜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시게 하면 안 되겠다.

고신재는 기어이 맥주 캔 하나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탈탈 비우는 한빈을 보며 작게 한숨 쉬며 생각했다.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제가 백한빈의 음주를 간섭하는 게 꽤 웃긴 짓이라는 자각이 없지는 않다.

애초에 저 역시 백한빈을 처음 알게 된 것도 개강 첫날 교수가 끌고 간 학교 앞 술집의 옆 테이블에서 우연히 들리던 목소리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백한빈이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로 술기운에 기대서야 내보일 수 있는 마음이 누군지도 모를 녀석들 사이에서 그저 그런 드문 술주정으로 끝나리라 생각하면 좀…… 아깝다.

그 마음을 거절할 방법만 고민하는 주제에 모순이 있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평소에는 모르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괜히 휴대폰만 내려다보면서 낯을 가리는 백한빈이라 더욱 그렇다.

물론 그 생각을 알 리 없는 한빈은 살짝 받침이 뭉개진 고백을 본격적으로 쏟아내는 데 시동을 걸었다.

“후우우, 여튼. 처음엔 엄마 옆에서 같이 본 드라마 영향을 좀 받았거든. 일일 드라마였는데. 무슨 본부장님인가 뭔가 나오는 거였는데. 며칠 건너뛰고 봐도 ‘엄마, 쟤 왜 저래?’하면 내용 이해되는 드라마…, 아니, 이건 중요한 게 아니구나.”

“괜찮아. 편하게 말해.”

“여튼! 그땐… 걔한테 얼굴이 없었어. 달걀귀신은 아닌데. 왜, 지나고 나면 기억 안 나는 그런 거. 그땐, 드라마나 영화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정도였는데….”

확실히 백한빈은 좀 취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말하는데도 그중 대부분은 술주정이나 다름없는 딴소리다.

하지만 아예 건질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드라마랑 영화를 흉내 내?”

“으응. 어설프게!”

“어설프게, 어떻게?”

“…음….”

조곤조곤 이어 물은 말에 한빈이 후우우, 하고 취기 어린 한숨을 내쉬면서 덥수룩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한빈은 어느새 이마까지 벌겋게 익어 있었다.

까맣고 두꺼운 뿔테 프레임 너머로 깜박이는 눈도 어째 알딸딸하다.

주량은 맥주 한 캔. 고신재는 새로 알게 된 정보를 머릿속에 잘 새겼다.

살짝 탁하게 갈라진 한빈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그런 거 있잖아. 로망. 몰라?”

“로망?”

“왜애. 인터넷에서 ‘애인이랑 사귀면 하고 싶은 로망 말해보자!’ 하는 글 보면 있는 내용 말야.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좋은 거. 그런 거 흉내 냈다고.”

사실, 고신재는 그때까지만 해도 꽤 느긋했었다. 참 못됐지만 그랬다.

술기운 때문인지 얇은 셔츠 너머로 체온이 따끈따끈하게 오른 백한빈이 제 어깨에 살짝 몸을 기댄 채로 종알종알 말을 잇는 걸 듣는 비 오는 밤은, 솔직히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꽤 좋았다.

매일매일 조금씩 내리는 비에 잔잔했던 수위가 조금씩 올라오는 것처럼 하루만큼 불어난 백한빈의 감정이 간질대는 건 꽤 예뻤다.

내가 아끼고 아끼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 역시 실은 도저히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 없기도 했다.

그 순간 고신재가 견뎌야 할 건, 고작 딱 그만큼 함께 커진 미안함 뿐이었다.

……이어진 투정 같은 말을 듣기 전까지는, 감히 그랬다.

“-근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더라.”

“문제?”

“마지막 휴학까지 다 탈탈 털어 쓰고 복학해서 전공 교수님이 하는 교양을 들으러 갔는데, 같이 한 학기 과제 하게 된 키가 이-만한 무용과 사람이 걔랑 목소리가 존똑인 거야. -와, 씨이!”

한빈의 작은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고신재는 그 웃음에 평소엔 그렇게나 잘하던 흐린 눈웃음조차 치지 못하고 맥주 캔을 쥔 그대로 딱 얼어붙었다.

지금 이 순간 절대 들을 일 없다고 생각했던 ‘무용과 사람’이 난데없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탓이었다.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오는데, 폰번호 하나 멍청하게 말했다고 걔 목소리로 ‘한빈아,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할 때는 또 얼마나 심장이 벌렁벌렁하던지. 첫인상은 진짜 구린데, 목소리만 좋아.”

“그건…!”

“알아, 알아. 뭐라고 하려는 거 아니거든? 끝까지 들어, 새끼야.”

“…….”

“하여간.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너 지인-짜 걔랑 목소리 비슷해. 전화 목소리는 더 비슷한 거 같아.”

시뻘겋게 익어서 말 못한다고 버티던 백한빈은 어느새 눈에 띄게 풀린 얼굴로 비틀비틀 문장을 이어가는데, 정작 이 모든 것을 시작한 남자의 속은 뒤늦은 불이 났다.

신재는 뭐라 말을 더 잇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가 맥주를 몇 모금 더 들이켰다.

뻔뻔할 정도로 평온했던 심장이 시끄럽게 달음박질치기 시작한 핑계를 알코올로 돌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냉기가 희미해진 맥주가 따끔하게 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정도에 인상을 찌푸리는 건 너무 성급한 일이었다.

아직 백한빈이 토해내는 문장은 본론에 채 도달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여튼! 진짜 문제는 이거야. 분명히 그 전까지는 꿈에서 나오는 걔한테 얼굴이 없었는데, 목소리 존똑인 사람을 만나고 나니까 그 사람 얼굴을…… 달고 나온다는 거.”

“……뭐?”

“-후우우우, 목말라. 맥주 남았어? 나 한 입만.”

고신재가 쨍한 목소리에 줄줄 담겨 나온 문장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건 취기가 오른 상태로도 민망함을 덮으려 일부러 한 번 꼬아 말한 백한빈의 탓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발갛게 취한 상태인 백한빈이 제 손에 있던 맥주 캔을 채가는 걸 말릴 생각조차 못 한 건 분명 후에 되돌아올 그의 실수이기는 했다.

…물론, 지금은 귀에 가서 붙은 듯 시끄럽게 존재를 자랑하는 심장 소리 때문에 그 사실을 자각할 여유가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신재는 제 맥주까지 빼앗아 기어코 한두 모금을 더 마시는 백한빈을 멍하게 바라보면서 거듭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긴!”

“걔한테 얼굴이 없었는데, 갑자기 뭘…….”

“-아으으으, 진짜아!”

별안간 목소리를 뾰족하게 하며 울컥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백한빈의 뺨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열이 옮을 듯 붉었다.

“꿈에서 걔가 네 얼굴로 나온다는 말이지 뭐야!”

“…….”

“…그, 그런데 나 정말 네 얼굴로 나오면 눈도 안 마주치려고 노력 많이 했단 말야. 네가 자꾸 내 이름도 부르고 아는 척해도 최대한 맞장구 안 치려고 정말로…… 아, 이래서 내가 말 안 한다고 한 건데!”

“…….”

“아, 알았어. 미안, 미안, 미안, 미안, 고신재, 미안. 미-안. 그…, 그래서 내가 진짜 문제라고 했잖아.”

이왕 술기운에 기대 목소리를 키웠으면 끝까지 당당할 것을.

한빈은 뭐라 한 마디 책망을 던진 것도 아닌데 뻔뻔하게 목소리를 키웠던 게 일 분도 가지 못하고 쭈글쭈글한 사과를 시작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 가까스로 꺼낸 고해성사를 두고 고신재가 정색하며 싫은 내색을 하지도, 그렇다고 여느 때처럼 웃으며 그게 뭐냐고 장난기 어린 핀잔을 던지지도 않으니 되려 덜컥 움츠러든 거다.

말 한마디 없이 침묵하는 고신재는 참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온화한 눈매를 접어 웃지도 않고, 그 단정한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는데 딱 한 꺼풀의 표정 아래로 뭔가를 눌러 참는 것도 같았다.

한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나른하게 기대있던 남자의 팔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쓸면서 아슬아슬 눈치 보듯 변명을 이어갔다.

“야아. 미안해. 나도 정말 그런 미친 꿈 안 꾸려고 요즘에는 자기 전에 운동까지 하고 자. 진짜야.”

하지만, 고신재는 줄줄 쉼 없이 이어지는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문장 그대로의 뜻이다.

그럴 생각 따윈 아예 하지도 않았다.

고신재 그는 제가 조금 전에 들었던 말 중 내내 머릿속에 남았던 단어 하나를 뒤늦게 끄집어내는 데 모든 정신이 팔려있었을 뿐이었다.

고신재는 백한빈의 작은 입에서 웅얼웅얼 흘러나오는 말을 끝까지 다 듣지 않고 툭 입을 열었다.

“……좋은 거가 뭐야?”

“뭐?”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좋은 거, 네 꿈속에서 흉내 냈다며.”

“…….”

“뭐였어, 그거?”

도저히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백한빈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붉게 변한 눈가는 제가 들은 말의 진의를 가늠하려는 듯 느리게 깜박이고,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마른 목의 쇄골이 도드라졌다.

고신재는 그 작은 움직임 하나를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하나하나 새기듯 살폈다.

오래된 궁금증 하나가 해결됐으면 속이 개운해져야 하는데 정반대다.

오히려 더, 더 궁금한 것들만 생긴다.

백한빈이 말하는 ‘로망’은 뭘까?

애인이랑 사귀면 뭘 하고 싶은 걸까? 백한빈은 나와 뭘 흉내 냈다는 걸까? 뭘 상상했을까?

……그리고, 대체 너와 사귀는 나는 어땠을까?

“고신재. 진심 지금 궁금한 게 그거라고?”

“응.”

고신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의 연쇄를 털어놓는 것 대신 짤막한 대답을 택했다.

기가 차다는 듯 작게 웃는 한빈의 웃음소리가 유독 귀에 따갑게 박혔다.

그건 조금은 한숨 같기도 했고, 또 조금은 안도한 것도 같았다.

한편 여유를 찾은 백한빈과는 달리 신재는 그 느긋함에 더욱 속이 들떴다. 진한 커피를 오랜만에 한껏 들이킨 것처럼 심장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 들뜸은 이어진 것에 비하면 차라리 귀여운 축에 속했다.

백한빈의 마른 손이 제 다리를 짚더니 갑자기 훅 고개를 가까이하기 전까지는 그나마 생각이라는 게 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거.”

“…….”

“이해했어?”

늘 쉽게 비뚤어지고는 했던 못난 뿔테 안경이 살짝 뺨에 닿아있는 감촉이 낯설었다.

언제나 적당히 거리를 두던 예민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가까이 있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덕분에 고신재는 장난기마저 어린 백한빈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굳어있었다.

이해했어? 뭘?

제가 들은 말을 천천히 머리에 입력하던 남자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 살짝 풀린 까만 눈동자에 비친 저 자신을 발견했을 때였다.

고신재는 반쯤 제 위로 올라탄 남자가 누구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또, 제 입술에 와 닿는 따뜻한 숨이 누구의 것인지, ‘이해했냐’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비로소 ‘이해했다’.

……그 순간.

“-미안. 잠깐만. …화장실 좀.”

거의 소스라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는 와중에도 마른 몸만큼은 거칠게 밀어내지 못하고 거의 인형을 들 듯 성인 남성을 통째로 잡아 올렸다가 내려놓는 고신재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작게 기어들어갔다.

덕분에 스물다섯 살에 난데없는 1인 헹가래를 당한 한빈은, 그 얼떨떨한 힘에 놀란 소리를 내기도 전에 덩그러니 혼자 거실에 남았다.

“…뭐야…?”

끔벅, 끔벅.

한빈은 까만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백한빈의 주량은 고신재의 짐작보다도 더 약하다.

평소 같았으면 맥주 한 캔은 엄두도 못 내고, 딱 반 캔 정도 들어가면 알딸딸해져서 멈춰야 하는 정도다.

하지만 오늘 한빈이 제 주량의 두 배 이상을 들이킬 수 있었던 건, 제 짝사랑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를 앞에 뒀다는 편안함과, 취한 와중에도 미안하다는 생각을 다 떨치지 못한 제 오래된 망상의 고해성사 덕분이었다.

기묘한 정적 속에 혼자 남겨진 한빈은, 조금 전부터 자꾸 걸리적거리던 안경을 벗고 따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몇 번 크게 마른세수했다.

하지만 맥주 한 캔을 다 비운 거로도 모자라 고신재의 맥주를 몇 모금 더 빼앗아 마시기까지 한 머릿속은 뇌가 통째로 알코올 비커 속에 담긴 것처럼 몽롱하기만 했다.

……여기가 어디더라.

백한빈은 반쯤 풀린 눈을 깜박이며 멍하게 제가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는 말끔한 집 안은 저를 이곳에 데리고 온 남자의 이름을 얼른 떠오르게 하지 못했다.

어느새 완전히 어둠이 깔린 창밖에서는 빗물에 흐려진 낯선 야경이 반짝이고, 널찍한 공간 안에서 들리는 거라고는 저만치 먼 부엌의 정수기에서 얼음이 달그락대는 소리 뿐이라 더욱 그랬다.

설상가상으로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고신재가 눈앞에서 휙 사라지기까지 하니, 그렇지 않아도 툭툭 끊어지는 생각 사이에서 제정신을 잡기는 더욱 어려웠다.

“…꿈인가…?”

백한빈은 그만의 잘못이 아닌 오답을 중얼거리며 등을 기댄 소파로 머리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적당히 피로에 절은 몸은 수마를 곧장 동반했다.

한편.

그 시간, 고신재는 그 나름의 비상사태에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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