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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재님
박비서님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혹시 주소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오후 9:12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오후 9:12
고신재님
택배로 받을 게 좀 있어서요 오후 9:12
네 알겠습니다
회사 주소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후 9:13
고신재님
.......
저 정말 죄송한데
집이어야... 하는데요 오후 9:13
“박, 종, 우, 래. 박종우.”
“…….”
“아, 진짜 이름부터 멋있지 않아?”
“…그래, 뭐.”
박종우는 고신재를 도와주는 비서의 이름이다.
고신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늘 무심한 표정으로 전하던 남자의 이름을 몇 년 만에 처음 알았다.
아니, 사실 어쩌면 언젠가 그 이름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 입학 이후로 쭉 마주치고 연락했던 비서의 이름을 외울 일이 없었기에 기억하지 못했다.
상대 역시 이름으로 불리기를 기대하지 않았던 듯 스쳐 지나간 통성명 이후로는 단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말한 적 없었다. 그런 게 필요한 관계도 아니었다.
‘박 비서님’. 호명은 이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
고신재는 이제껏 박 비서님으로 충분했던 남자의 이름을 두 시간 반 동안 갖은 찬사와 함께 듣는 중이다.
박종우, 박종우, 박종우.
덕분에 죽을 때까지 못 잊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뿐일까!
“성동구 살던데. 진짜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나 솔직히 우리 집에서 거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지도에 찍어봤어. 너무 궁금해서.”
“……얼마나 걸려?”
“지하철로 50분, 차로는 40분, 걸어서는 3시간 15분, 자전거로 1시간 20분.”
“…….”
그러면 안 되는 거 알면서 주소 찍어봤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본격적이다.
그걸 다 외울 정도면 대체 얼마나 보고, 보고 또 봤다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겠다. 실로 크리피 순정이다.
고신재는 제 옆에 찰싹 붙어서 작게 속삭이던 백한빈이 “아! 상자 빈 곳에 간식 좀 넣자!” 하면서 과자 코너로 달려간 다음에야 쭉 참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그는 백한빈을 따라 두 시간 반째 백화점에 잡혀있다.
다름 아닌 ‘가나다라123’에게 줄 선물을 함께 고르기 위해서다.
정말이지 그건 전에 없이 오묘한 기분이었다.
촘촘한 망사로 된 눈가리개를 하고 보일 듯 말 듯 걸려드는 물건을 고르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덕분에 처음엔 크게는 품목부터 자잘하게는 브랜드, 색, 디자인까지 평소답지 않게 쉼 없이 떠드는 한빈의 옆에서 입도 제대로 벙긋 못한 채 고개만 주억거렸던 고신재다.
……물론, 쇼핑이 한 시간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얘 이거 혼자 내버려두면 절대 오늘 안에 못 끝내겠구나 싶어서 슬그머니 제 취향을 설파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성 잡화관을 드디어 벗어나나 했더니 이제는 식품관이다.
힘들지는 않다.
오히려 학교에서는 점심만 지나도 지쳐 하던 저질 체력이었으면서 이 넓은 백화점을 쉬지도 않고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백한빈을 구경하는 게 꽤 신선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한빈은 어느새 이것도, 저것도 하면서 품에 한가득 과자를 안은 채였다. 고신재는 얼른 카트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초코, 초코, 초코, 치즈, 또 초코.
백한빈의 과자 취향을 좀 알 것 같다.
신재는 다 거기서 거기인 과자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내내 궁금했던 물음을 슬쩍 꺼내 들었다.
“그런데 한빈이 너 부산 산다고 했다며.”
“어? 어어.”
“…지금 사는 집 주소로 보낼 거야?”
“에이. 당연히 아니지!”
당연히?
고신재의 곧고 예쁜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물론 그걸 알 리 없는 한빈은 여전히 간식거리를 고르는 데 여념이 없는 채로 종알종알 말을 이어갔다.
“푸름이 동생이 부산에서 대학에 다니거든. 우선 걔한테 보냈다가 걔가 다시 내 이름으로 보내기로 했어.”
“‘박종우’한테?”
“으응.”
한 발짝 뒤에서 카트를 밀면서 뒤를 쫓는 고신재의 시선이 헤실헤실 표정이 풀린 예민한 이목구비에 고정됐다.
늘 일자로 뚱하게 다물어진 채던 한빈의 입꼬리는 온종일 저렇게 말랑말랑하게 풀린 채다.
언제나 작은 입술을 꾹 붙인 채로 말도 많이 하지 않고 툴툴댔으면서 오늘은 아예 다른 사람 같다.
그 백한빈이 저렇게 웃음이 헤플 수 있을 줄이야.
…이름만 들어도 좋아 죽겠나 보지.
고신재는 괜히 쯧, 혓소리를 냈다.
저는 몇 년이나 이름도 모르고 지낸 비서의 이름을 팔고, 하마는 살지도 않는 부산에서 보내려고 친구 동생을 거치고.
대체 이게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체한 것처럼 속이 울렁이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따라 들뜬 한빈이 몇 배는 더 떠들어준다는 거다.
“신재야. 근데 이거 지갑 진짜 괜찮은 거 같아?”
고신재는 선물 하나만 달랑 보내기 뭐하다며 카트의 절반을 채울 정도로 보이는 초콜릿 과자란 초콜릿 과자는 다 때려 붓더니, 이제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려는 한빈에게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잘 골랐어. 좋아할 거야.”
“진짜? 진짜로? 잘 생각해 봐. 별로면 가서 바꾸자. 역시 갈색이 낫나.”
“검정이 예뻐. 무난하고. 그리고 이미 두 번 바꿨잖아.”
그랬다.
백한빈은 맨 처음에 짙은 남색에 갈색이 섞인 가죽 지갑을 골랐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계 두 개를 내려오기도 전에 “야, 야. 그냥 갈색으로 바꾸자.” 하고 도로 올라가서 교환했고, 또 그러다가 매장의 코너를 돌기도 전에 “역시 이 브랜드는 너무 올드하지. 역시 저-기 검정색이 더 예뻤어!”하고 마음을 바꿨다.
사실 고신재는 백한빈이 고른 후보 세 개 다 마음에 들었다.
거하게 멋을 내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과하지 않으면서도 매끈한 디자인만 고르는 게 애초에 미감이 저와 잘 맞았다.
하지만 한빈은 이것도 저것도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아니 그래도…. 아, 씨. 그냥 기왕 쓰는 거 10만 원 더 쓸까.”
“25만 원도 몇 달씩이나 모은 거라며.”
“나 나름 비자금 있어.”
“무슨 비자금.”
“휴학했을 때 학원 강사 해서 모아둔 거. 원래 휴학하고 유럽여행 가려고 모은 건데. 어쩌다 보니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있거든.”
못 살겠다.
그런 건 비자금이 아니라, 간신히 모은 쌈짓돈이라 하는 거다.
심지어 그렇게 모은 걸 게임 친구, 아니 짝사랑 상대 선물 사는 데 쓰겠다고?
올해는 더 좋은 선물을 주겠다기에 기대한다고 하긴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하란 말은 아니었다.
작년에는 치즈 케이크를 줬으니 올해는 뭐… 조각 케이크 하나만 줘도 좋았을 거다.
아니, 더 솔직히는 아예 까먹고 안 준대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저 혼자 기억해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기억이었으니 말이다.
몇 달 전부터 조금씩 돈을 모으기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는 사고 싶은 새 카메라 렌즈도 나왔다면서!
어찌나 하나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르는지 인상까지 쓴 채인 백한빈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다시 한 번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아진 고신재는, 괜히 머리를 쓸어올리며 제 심란함을 감췄다.
“신재야. 그냥 그 좀 더 비쌌던 거로 바꾸자. 까짓거 예쁘고 좋은 거 사면 좋잖아.”
“아니지. 너무 비싼 거 받아도 부담스럽겠지. 자기도 똑같이 해야 할 것 같아서.”
“헐. 그런가.”
“내 말 믿어. 지금 산 까만 지갑, 예뻐. 포장도 잘 됐고.”
“그래, 그럼……. 아! 젤리도 넣자. 걔 젤리 좋아할까. 젤리 맛있는데.”
고신재는 장장 세 시간을 넘어선 쇼핑을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던 한빈을 간신히 뜯어말리는 데 성공했다.
애초에 그게 아니어도 한빈은 가나다라123에게 주고 싶은 게 많디많았다.
초콜릿 과자, 쿠키, 젤리, 하다못해 자기가 맛있게 먹는다는 그래놀라 시리얼까지.
이건 뭐 거의 하마표 비상식량 수준이었다.
……진짜 어디까지 바보냐, 넌.
차마 꺼낼 수 없는 문장이 혀끝에서 굴러다녔다. 물론 백한빈은 그 타는 속을 알 리 없었다.
고신재가 백한빈과 함께 전에 없이 긴 쇼핑을 끝냈을 때는, 환했던 하늘 저편에서부터 어둑어둑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할 때였다.
과자 보따리 세 개를 혼자 다 들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한빈에게서 큰 봉투 두 개를 빼앗아 들고 작은 거 한 개만 들린 고신재는, 사람들 몇이 웅성대며 서 있는 백화점 정문 근처에 다다르기도 전에 곧장 바깥 상황을 눈치챘다.
“비 오나 본데.”
“비 온다고?!”
“그러고 보니 소나기 온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네.”
“우산 있어?”
“없지.”
“허얼…. 소나기 때문에 백화점에서 우산 사는 거 좀 창조 손해인데.”
백화점에서 자기 우산 하나 사는 건 저렇게 고민하면서 지갑 하나는 낑낑대고 20만 원을 모은 거로도 모자라서 10만 원을 더 보태서 사겠다고 하는 바보가 여기 있다.
아니, 지갑에 돈을 더 안 썼어도 이 쓸어 모은 과자로 벌써 오륙만 원은 더 썼다.
두 손 가득 들린 간식 봉투와 점점 강해지는 빗줄기,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심각한 얼굴의 백한빈을 번갈아 보던 고신재는, 결국 심호흡보다도 더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건 비로소 내놓은 오늘 하루 혼자만 삭히고 또 삭히던 답답함이었다.
덕분에 온종일 들뜬 채로 있느라 고신재 주변에 둥둥 떠다니던 기묘한 고민, 혹은 울적함을 눈치채지 못하던 한빈의 뾰족한 눈꼬리가 동그래질 정도로 커졌다.
작은 짐 하나도 직접 들 일 없을 것 같은 고운 남자가 백화점 정문 앞에서 양손에 잡다한 간식거리가 가득 담긴 봉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 역시 꽤 묘한 그림이라는 것도 그제야 깨달은 한빈이다.
“왜, 왜애? …아, 피곤해? 피곤하지. 미안. 오늘 너무 끌고 다녀서.”
“한빈아.”
“……어어?”
백한빈의 대답에서는 미안함이 뚝뚝 떨어진다.
고신재는 이제야 온전히, 또 오롯이 저를 향하는 그 까맣고 다정한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거 다 들고 집에 갈 거야?”
“응?”
“지갑 포장한 건 가방에 있다고 해도 이것들은? 어차피 오늘은 6시 다 되어서 우체국도 못 가잖아. 이거 다 들고 집에 가도 괜찮겠어?”
끔벅, 끔벅.
커다란 뿔테안경 너머로 커진 눈이 느리게 깜박이다가 고신재와 제가 들고 있는 커다란 간식 봉투로 시선이 멈췄다.
역시나 고신재가 짚은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보통의 부모라면 제 자식이 뜯지도 않는 과자를 선물이랍시고 두 손으로도 다 못 들 정도로 들고 오면 대체 그게 뭐냐는 질문쯤은 던질 거다.
보통은, 그렇다.
백한빈은 어딜 봐도 그 보통의 집에서 갖은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들이었다.
차마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선물을 보내는 김에 간식도 챙겨 보내고 싶어서 이것저것 사다보니 이렇게 됐다는 말을 꺼내지 못할 사람이기도 했다.
아니나다를까 온종일 예쁘게 웃던 얼굴에 검게 부글대는 하늘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고신재는 그걸 오래 지켜보지 않았다.
“한빈아. 택시 좀 불러 줄래. 앱 깔려있지.”
“……택시는 왜.”
“내 자취방 가게.”
갑자기 훅 거세지기 시작한 비에 옆으로 지나가는 여자 무리 몇이 어우우, 하고 질색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하지만 나직하게 이어지는 문장은 거세진 빗소리에도, 이름 모를 누군가의 탄식 같은 목소리에도, 움직이는 차 소리에도 묻히는 일 없이 또박또박 이어졌다.
“학교에서도 가깝고, 우선 이것들 두고 갔다가 내일 천천히 포장해서 보내도 되고. 우산도 빌려 가고. 그럼 좋지 않을까?”
백한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평소의 뚱한 기본 얼굴로 돌아와서 저보다 시선이 높은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꾹 붙어있던 작은 입이 툭 열렸다.
한빈이 내뱉은 건 순수하게 놀라운 듯한 작은 탄성이었다.
“……우와.”
“왜?”
“그냥….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친구 집 가는 거 처음이라서.”
보통의 대학생이라면 3학년 될 때까지 한 번을 못 가봤어? 하고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신재는 여느 그 보통의 대학생과는 꽤 다른 캠퍼스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건 상관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나도 누구 데려가는 거 처음이야.” 하고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걸 곧장 들은 건지, 휴대폰으로 택시 앱을 열던 한빈이 작게 웃었다.
[작품후기]
+다음편은 아침 7시 10분쯤 업데이트됩니다 ㅠ ㅠ!
예약을 걸어두려고 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코멘트, 추천 모두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늘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답니다. ^ ^
또, 후원쿠폰 보내주신 naruya님!!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드디어 신재의 집에 가네요 호호...*
태풍이 올라온다는데 다들 무탈한 하루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능한 내일 뵙겠습니다.
항상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