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24화 (2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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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라고, 부르지 마.」

「…….」

「내가 어떻게 네 형이야?」

「그럼 뭐라고 부를까. 고진영, 그렇게 불러? …아, 좀. 형!」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거의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더니 마지막에는 거의 발작하듯 소리치는 고진영의 모습은 그저 그런 취객치고는 정도가 심했다.

한창 먹고 마시기 좋아하는 신입생으로 1년을 보냈는데도 울고 짜고 토하는 사람들은 질릴 만큼 많이 봤어도 이런 종류의 술주정은 본 적 없다.

심지어 저 노려보는 눈은 또 어떤지.

고신재는 제 형이 밀쳐내 자리에 주저앉은 그대로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이내 반쯤 자포자기 한 채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묻지 않고 무시하고 지나가는 게 나았을 질문을 던지고 만 거다.

「뭐가 그렇게 지긋지긋한데.」

「너. 고신재, 너 보는 거.」

「왜?」

담담하기까지 한 질문의 연속이었지만 고진영은 그 침착함에 오히려 더 불이 붙었다.

반쯤 풀린 진한 눈에 기어코 힘을 주어 뜬 진영은 되려 제 동생에게 되물었다.

「고신재. 너 대체 왜 나 따라서 여기 왔어?」

「…….」

「어? 왜 왔냐고. 대체 왜.」

「대학 온 거지. 집 나와서.」

「그러니까 왜 하필! 왜, 그 하고많은 대학 중에서, 왜!」

사실, 이 절규 같은 질문의 답은 맥이 빠질 만큼 단 하나였다.

형이 있어서.

형이 다니는 학교라.

아무리 해가 지나도 무용을 한심하게 보는 가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는 학교라. 대회가 있을 때마다 헐레벌떡 뛰어와서 지켜봐 주던 유일한 제 편이 좋아하는 학교라.

…그래서.

분명 무용 전공으로도 손꼽히는 곳이기는 했지만, 말마따나 하고많은 대학 중에서 하필 한국대학교 무용과에 목숨 걸고 달려들었던 건 단지 그 이유 하나였다.

스무 살의 고신재는 뻔한 답을 내어주는 것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러자 그 침묵을 뭐라 해석했는지, 고진영은 옅게 충혈까지 된 눈으로 반쯤 뭉개진 문장들을 두서없이 이어갔다.

「야. 고신재. 너, 나 형이라고 부르지 마. 좋은 말로 할 때 형, 형, 하는 거 때려치워. 짜증나니까.」

「……정말 술주정 한 번 좆같아서 못 들어주겠네.」

그리고, 간당간당하던 고신재의 인내심 역시 거기까지였다.

「뭐…, 뭐?」

「적당히 좀 하라고! 지금 누가 누구보고 짜증 난대.」

「야!」

「같이 살기 싫으면 그냥 그렇게 말해. 술 처먹고 들어와서 유치하게 뭐하는데? 나가라고 하면 나가. 안 나갈 것 같든? 당장 박 비서님한테 연락할까? 그래?」

「지금 내가 그딴 얘기를 하려는 거 같아?!」

「그럼 뭔데!」

고진영과 고신재는 서로 자잘한 싸움조차 없는 형제는 아니었다.

형은 왜 분리수거를 제대로 안 하냐느니, 고신재 너는 대체 하루에 옷을 몇 번을 갈아입어서 빨래를 산더미처럼 만드느냐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것으로 다투기도 하고, 그 작고 유치한 싸움이 커져서 며칠을 남이나 다름없는 냉전으로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지르고 한 치도 지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고신재. 너 왜 우리가…, 집 나오기 전에 그렇게 병신같이 지내야 했는지 알아?」

「……뭐?」

「-우리가, 아니 내가! 대체 왜 집에서 TV도 한 번 마음 편하게 본 적 없고, 웃고 떠드는 것조차 눈치 보고 벌벌 떨면서 지내야 했는지. ……넌 아느냐고!」

……또, 학교 근처 이곳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었던 ‘집’에서의 생활을 입 밖으로 꺼낸 것 역시 처음이었다.

고신재는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을 한 자신의 형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 단어 한 단어, 씹어 말하듯 쏟아내는 것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지켜보았다.

「너야. 너 때문에… 그런 거야. 고신재.」

「…….」

「왜 그렇게 아버지가 식사 때마다 표정 한 번 푼 적 없는지. 왜 외가를 가든, 친가를 가든 그렇게 씨발……, 딱 죽었으면 싶은 분위기였는지. 야, 넌…, 그걸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아홉 살, 다들 웃으며 가족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는 친구들의 그림을 봤을 때부터 확실히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모두가 적당히 불행하고 끔찍하게 사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던 최초의 순간이었다.

「생각해 봐. 문 열리기 전에는 안에서 하하호호 처 웃는 소리 들리다가도 왜 우리가 문 열고 들어가면 다들…, 벌레라도 보듯이 했을까?」

「…왜… 그랬는데?」

「말했잖아. 너 때문이라고, 고신재. -아, 아니다!」

고진영의 목소리는 한 번 입이 열리고 나니 저 자신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점점 더 속도가 붙다가 거의 헐떡이듯이 변했다.

신재는 저를 향한 그 쉰 목소리를 단어 하나하나 똑똑히 새겨들었다.

「너, 고신재도 아니네.」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붙은 짤막한 문장은 얼른 이해가 쉽지 않았다.

「……뭐?」

「너 고신재 아니라고.」

답지 않게 얼빠진 목소리로 묻자, 언제나 다정다감했고 어른스러웠던 형은 들은 적 없는 목소리로 취한 웃음을 터트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힌트가 있었다.

「고, 신재, 가 아니라고.」

‘고, 신재, 가 아니다’.

고신재는 제 기억이 존재하는 한 한평생 들어왔던 그 당연한 호명을 입안으로 굴려 따라 해 보았다.

차라리 그 짧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둔했으면 좋았을 거다.

하지만 고신재는 그 이를 가는 듯한 말을 얼마 안 가 이해했고, 이내 멍하게 앉아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었다.

「못 믿겠으면 가서 물어보지 그래.」

「…….」

「엄마든, 아빠든. 아니면 너라면 잡아먹고 싶어 하는 할머니든. 가서 물어봐. 너 대체 고신재가 아니라 뭔지. 김신재? 박신재? 야. 들으면 나한테도 말 좀 해주라. 아, 맞다. 이것도 물어볼래.」

형은, 아니, 이날 밤 형이 아닌 고진영이 된 남자의 날 선 말은 기어이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콱, 고신재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씨발……, 대체, 너를, 데리고 들어온 이유가 뭐냐고.」

「…….」

「다들 그렇게 좆같이 굴 거면 애초에 낳아서 데리고 오지나 말든가, 대체 왜 그랬냐고. 제발 좀 네가 알아와. 너 잘하잖아. 부모님이랑 싸우는 거.」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 고신재는 그제야 제가 영영 알지 못할 것 같던 의문들의 답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예컨대 제가 살면서 들었던 조부모에 대한 그 감성 가득한 문장과 저를 대하는 당사자들의 표정은 왜 이렇게 다를까.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건 다들 이렇게 지독한 존재라 작정하고 그걸 감추려고 하는 걸까 싶은 순진해 빠진 상상들 말이다.

……그들은 그저 감히 눈조차 함부로 마주칠 수 없는 며느리가 데리고 온 부산물까지 떠받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인 것을.

그 다음 날, 술에서 깬 고진영은 제 동생이었던 남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신재야, 형이 미안해. 형이 잘못했어. 형이 취해서, 형이 그러면 안 됐는데, 미친 말을 했어. 신재야. 고신재.

고진영은 고신재에게 쉰 목소리로 몇 번이나 울며 사과했다.

하지만 고신재는 꼭 어렸을 때처럼 우는 진영의 앞에서 지난밤처럼 넋 나간 표정 따위 보여주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따지지도 않았고,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이 나에게 그럴 수 있냐며 원망하지도 않았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회피도 안 했다.

그저 딱 한 가지만 물었을 뿐이다.

「언제부터 알았어?」

고진영은 그 물음에 한참을 망설이다 떨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열…, 아홉 살. 고3때….」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지난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고 싸운 것이 무색하게 고신재의 반응은 그게 다였다.

마치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산뜻한 대꾸를 하는 단정한 얼굴엔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려 있기까지 했다.

충분히, 아니 넘칠 만큼 똑똑하게 자란 남자는 제가 알게 된 것들을 그 웃음 이후 제 얼굴 뒤로 꼭꼭 숨겼다.

살기 위해서였다.

아니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제가 ‘안다는 걸’ 인정하면 간신히 밟고 서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것을 누구보다 오래 배워온 고신재는,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알던 비밀을 저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심지어는 뻔뻔하게 잘살아 보려고도 했다.

제게 주어진 것들을 모르는 척 누리고, 휘두르고, 맛보며 지내려고 부단히 애썼다.

어느 정도는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연습벌레로 살았던 대학 생활은 높은 학점으로 돌아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고, 웃고, 잡담하며 떠들었다.

그렇게 하면 잠시나마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완벽한 가족의 일부로, 흠잡을 데 없는 이야기의 일원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체는 대체일 뿐.

정교한 기계 안에 맞지 않는 부품을 억지로 밀어 넣어 그걸 돌아가게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간신히 돌아가던 일상이 무너지는 날은 느리게든 빠르게든 반드시 오기 마련이었다. 그건 웃는 얼굴 뒤로 비밀을 감춘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한계는 스물네 살의 봄이었다.

유독 끔찍하게 따뜻했던 그 날.

고신재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작품후기]

++개인 사정으로 이틀 건너 뛰고 오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 선작, 코멘트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타 알림도 늘 감사합니다. 아!!! 후원쿠폰 보내주신 서백록님, 정말 감사합니다!!!

1년 전의 이야기는 다음 편까지 이어질 것 같습니다.

가능한 내일 뵙겠습니다. 건강한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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