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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전체를 통틀어도 고작 서른 명 안팎인 육군 중장인 고정현과, 미술계에서 소위 3대 화랑 중 하나로 불리는 아토 화랑을 이끄는 강서진 대표.
이 화려한 타이틀의 부부 사이에는 공식적으로 두 아들이 있다.
바로 고진영과 고신재 형제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곧잘 하던 형 고진영은 한국대학교 화학과의 학부와 석사를 졸업하고 곧장 외국계 제약회사에 취업해서 제 앞가림 하나는 톡톡히 한다.
원한다면 더 쉬운 길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던 그는, 꽤 고집스레 제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둘째 고신재 역시 마찬가지다.
일곱 살에 시작한 무용에서 눈에 띄는 재능을 보이더니, 이내 형과 나란히 같은 학교의 무용과에 들어가 보란 듯이 장학금까지 받으며 학교를 다닌다.
그뿐일까. 뺨에 동그란 젖살이 다 빠지지 않았을 때부터 사람 많은 곳에 갈 때마다 온갖 소속사나 에이전시의 명함을 수집했던 이목구비에 완벽하게 다듬어진 단단한 몸이 더해져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를 남자로 자라기까지 했다.
이들은 실로 구성원 하나하나가 그린 듯이 완벽한 가족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아쉬울 게 없는 그들의 뒤에는 누군가의 선망이 뒤따른다.
하지만, 어릴 적 잠자리에서 들었던 동화가 성인이 되어 원전을 찾아봤을 때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이 흠잡을 데 없는 가족의 일화에도 이면은 존재한다.
한 꺼풀 뒤의 이야기는 같은 등장인물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완벽한 가족의 도입부 역시 마찬가지다.
단 한 번 출세가도가 막힌 적 없었던 군장성과 미술계를 휘어잡고 온갖 재벌가와 교류하는 화랑의 대표 역시 그 근사한 이력을 뒤집으면, 뒤따르는 모든 전개가 달라진다.
예컨대, 부도를 코앞에 둔 망해가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남은 명예였던 전도유망한 젊은 장교와, 우스울 정도로 넘쳐나는 돈으로 그림 장사를 시작해 상류사회로 진입했지만 명예에 대한 근본적인 콤플렉스를 지닌 집안의 야망 가득한 차녀의 만남처럼 말이다.
고신재는 세상 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적당히 불행하게 사는 줄 알았다.
그 시작점을 헤아릴 수 없는 기억이 존재했을 때부터 쭉 그랬다.
부모님은 서로 각방을 쓰는 게 당연하고, 가족들이 아침저녁으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하는 건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 번 될까 말까 한 드문 행사인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네 가족이 모두 모여 밥을 먹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각각의 개인 접시에 따로 덜어진 음식을 먹다가 젓가락을 잘못 움직여 쇳소리 한 번이라도 났을 때 쏟아지는 시선을 생각하면 되레 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고신재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가장 놀랐던 건 ‘보통의 집’에서 TV를 보는 방법이었다.
‘우리 가족’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초등학교 2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 중 여섯 명이나 짠 듯이 같은 그림을 그린 그 날은 고신재에게 하나의 기점이 됐다. 커다랗고 네모난 TV. 각양각색의 소파, 그리고 그 위에 앉아서 모두 방긋 웃으며 앉아 있는 사람들.
친구들은 서로 말을 맞춘 듯이 같은 말을 했다.
‘엄마, 아빠, 형, 누나, 오빠, 동생과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봅니다.’
그중에 어떤 친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끼어있었지만, 결국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TV는 ‘원래부터’ 부모님이 안 계실 때 몰래 TV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서서 보다가, 20분 내로 아버지와 어머니 둘 중 하나라도 귀가한다는 비서의 문자가 오면 얼른 전원을 끄고 액정을 식혀야 하는 특별한 기계였다.
초등학교 2학년의 고신재는 그 날 제가 그린 그림 위에 있는 부모님의 표정을 뒤늦게 친구들을 따라 웃는 얼굴로 고쳐 그렸다.
하지만 그 날은 같은 반 친구들이 그렸던 그림이 자꾸 머릿속을 떠다녀서, 늘 칭찬만 받던 무용 레슨에서도 실수를 잔뜩 하고 혼이 났다.
느지막이 저녁에 돌아온 집에서 만난 가정교사는 그걸 다 전해 들은 모양인지, 어린 고신재가 귀가하자마자 곧장 저녁 식사도 건너뛰고 자습실로 신재를 끌어다 앉혔다.
「고신재. 오늘 레슨 때 전혀 집중을 못 하고 엉망이었다고 들었는데. 그랬니?」
고신재는 어렸을 적 가정교사를 꽤 무서워했었다.
늘 머리를 하나로 올려묶고 흐트러짐 없던 그녀는 고신재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웃은 적이 없었다.
「네.」
「다른 친구들도 있는데?」
「……네.」
「열심히 하지 않을 거면 레슨을 갈 이유가 없지. 그만두고 싶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작은 발끝만 내려다보던 신재는 아니요, 라고 대답하는 것 대신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가정교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든지 가르쳐주고, 알고 있는 그녀라면 온종일 머리를 사로잡았던 질문 역시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선생님.」
「그래.」
「원래 TV는 앉아서 보는 거예요?」
난데없는 질문에 가정교사는 잠시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천천히 되물었었다.
「……뭐?」
「소파에 앉아서. 엄마랑, 아빠랑, 형이랑. 그렇게 다 같이?」
고신재는 언제나 제 앞에서 답만을 말해주던 그녀가 조용히 침묵했던 순간의 적막을 성인이 된 순간까지도 쭉 잊지 못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다 흐려지고, 무뎌져도 그 날 제가 가정교사와 마주 앉아 있던 전등의 색과 패브릭 의자의 질감만큼은 여전히 머릿속 한구석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날 밤, 늘 엄했던 가정교사는 처음으로 숙제를 내주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고신재는 ‘아.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 이상하구나.’ 처음 깨닫게 됐다.
그래도 그런대로 살만했던 건 네 살 터울의 형, 고진영이 있어서였다.
부모님과 가정교사가 없을 때 살금살금 몰래 발을 옮겨 음량을 10퍼센트에 맞춰놓고 그 코앞에 나란히 서서 TV를 볼 때도, 저녁 6시부터 10시 사이 학교 숙제를 할 때만 쓰는 게 허락됐던 컴퓨터를 할 때도, 외가든 친가든 하나같이 숨통이 턱 막히는 조부모를 만나러 갔을 때도.
고진영은 그때마다 고신재의 옆에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존심은 세서 티는 안 냈지만, 고신재는 뭇 어린 동생이 그렇듯 제 작은 세계의 기준을 형으로 삼았었다.
한 살 한 살이 유독 큰 차이가 나는 학창시절에 4살 터울의 형은 꽤 높다란 존재다.
고신재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 고진영은 중학생이었고, 간신히 중학생으로 따라잡았을 땐 까마득한 어른 같은 대학생 형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조금은 이상한 세상의 감옥 같은 집에서 사는 걸 이 악물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애초에 형인 진영 때문이었다.
고신재는 제 형이 대학에 입학하며 집을 나가 대학 근처에서 따로 나가 사는 걸 보며 저도 형과 같은 학교에 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걸 아는 고진영 역시 접점도 없는 무용과 친구를 사귀어 이쪽저쪽 귀동냥을 해서 종종 넌지시 연락하고는 했다.
그러다 스무 살.
보란 듯이 한국대학교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고신재는 형과 함께 살게 됐다.
제아무리 좋은 주상복합이어도 원래 살던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그깟 건 상관없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75인치 TV와 소파, 그리고 제 방 책상 위에 생긴 저만을 위한 컴퓨터만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세상에 드디어 발 디딘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부터 뒤틀렸던 탓일까.
간신히 숨통이 트였다 생각했던 고신재의 세상은, 막 꿈꾸기 시작한 미래를 비웃기라도 하듯 집을 나온 스무 살의 첫해를 다 채우지 못하고 완전히 뒤집혔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온전히 한 해가 마무리되는 12월의 마지막 주. 이른 눈이 내렸던 그 날.
형 고진영은 처음으로 술에 취해 귀가했다.
* * *
「……대체 뭐야?」
난데없이 거실에서 무언가 시끄럽게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제 방에서 나온 고신재는, 저만치서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현관에서 축 늘어져 있는 자신의 형을 보며 잠시 얼이 빠졌다.
「형. …형!」
「…….」
「아니, 대체.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셔.」
사실 고진영은 평소에 꽤 잔소리 많은 형이었다.
밤늦게 다니지 말고 잠은 무조건 집에서 자라는 뭇 대학생들이 흔히 듣는 말부터 남자든 여자든 무조건 사람 조심하고, 어디서 누가 우리 집안에 대해 물어보면 너 잘하는 그 방긋 웃는 거 하면서 모르는 척하라는 조언까지.
진영은 4살 어린 동생을 꽤 알뜰살뜰 챙겼다.
고신재는 제 형이 그럴 때마다 꼰대 나셨다며 시큰둥하게 대꾸하기는 했지만, 이제껏 그걸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레슨과 학원, 집을 반복하는 저울추 같은 일상을 보낸 고신재는, 대단한 일탈을 꿈꿀만한 상상력도 빈약했다.
하지만, 그런 고신재보다 더한 범생이가 고진영이었다.
「맨날 술은 주량보다 적게 마시라느니, 취했다 싶으면 늦은 거라느니 잔소리하더니…. 눈까지 오는데 뭐야, 이게?」
「네가 왜 여기 있어.」
「왜 여기 있기는. 인간이 정신 못 차리네. …아, 진짜 술 냄새!」
머리가 좀 크고 나서는 갈수록 무용을 하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부모님과 종종 부딪혔던 고신재와는 달리, 고진영은 취미도 공부, 특기도 공부에 무슨 말이든지 무조건 네네 하고 보는 유순한 남자였다.
성격만 다른 것도 아니다.
고진영과 고신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형제였다.
고신재는 부드러운 흑갈색 체모에 웬만한 사람들을 모두 아래로 볼 정도로 키도 크고 골격도 딱 벌어졌지만 우락부락한 느낌 대신 근육이 단단하게 새겨진 대리석처럼 유연하게 흐르는 체형이다.
생긴 것도 진한 이미지와는 멀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더해져 그 인상 자체로 눈에 띄는 미남 쪽이다.
한편, 고진영이란 남자는 딱 봤을 때부터 이목구비가 먼저 들어올 정도로 선이 뚜렷했다.
거기에 짙고 검은 눈썹에 진한 쌍꺼풀, 170 중반 정도의 키에 평범한 보통 체격.
서글서글하고 곧잘 웃는 고진영과 다소 예민하고 꼼꼼한 완벽주의자인 동생 고신재는 때로는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다시 안 볼 것처럼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외모도 성격도 정반대인 두 사람의 우애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작 TV조차도 마음 편히 볼 수 없는 억눌린 환경에서 함께 자라는 내내 크고 작은 비밀을 공유하며 깊게 쌓인 유대와 신뢰는, 그들을 어디에서나 형제로 보이게 했다.
고신재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허우적대는 제 형 앞에 그 큰 키를 쪼그리고 앉아 눈에 젖어 말을 듣지 않는 뻣뻣한 구두를 벗기려고 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동생 앞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온 진영은 오늘따라 전에 없던 행동을 계속 이어갔다.
「형, 아니, 신발, 신발 벗어야지! 잠깐만!」
「…됐어. 야. 손대지, 마.」
「그거 신고 들어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씨발, 내 다리에 손대지 말라고!」
그 순간 고신재는 신발을 벗기려던 제게 크게 발을 구르는 제 형의 헛발질을 가까스로 피하기는 했다.
하지만, 육체적 타격이 없다 할지라도 뭐라도 얻어맞은 듯이 머릿속이 얼얼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뭐 들은 거냐, 나.
허우적대는 것에 가까운 진영의 발길질을 피하느라 엉거주춤 현관 근처 바닥에 주저앉은 고신재는, 드물게도 멍하게 제가 들은 말을 되새김질했다.
‘씨발’?
사실 대단할 것 없는 두 음절의 욕 한마디다.
하지만 고신재는 저 짤막한 욕이 제 형의 입에서 나오는 걸 20년을 통틀어 이날 처음 들었다.
「야. 고신재. 손, 대지 말라고…, 했어, 내가.」
「……하, 그래. 안 대.」
너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으면 욕을 먹고도 화가 안 난다. 당혹스럽지도 않다.
그저 헛웃음만 피식 흘러나올 뿐이다.
하지만 술에 취한 건지, 추위에 얼어붙은 건지 모를 붉은 뺨을 한 고진영은 반쯤 풀린 눈을 하고도 그 지나가는 웃음을 기어이 들은 모양이었다.
「…야. 고신재. 너 지금…, 웃었어?」
「그래. 웃었어.」
「네가 뭔데?」
「미치겠네, 정말. 주사가 이따위라 나한테 술 조금만 마시라고 그 유난을 떨었던 거야?」
「……다 너 때문인데, 대체, 씨발, 네가 왜 웃는데!」
저도 모르게 순간 미간을 찌푸리게 될 정도로 쩌렁쩌렁한 고함이었다.
덕분에 고신재는 이날 밤 제가 처음 보는 형의 모습이 하나 더 추가됐다.
술에 취한 형.
욕을 하는 형.
그리고, 집이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형.
정말이지, 싸운 적은 있어도 이런 괴성은 또 처음이었다.
주사 한 번 끔찍하네.
고신재는 다시 한 번 터져 나오려는 한숨 같은 웃음을 애써 참았다.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제가 여기서 또 웃는다면 취한 사람 앞에서 불을 지르는 꼴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불행히도, 고신재는 웃는 상의 정석 같은 미남이었다.
작정하고 웃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살짝 처진 유한 눈꼬리 때문에 한껏 부드럽게 보이는 남자가 고신재였다.
고진영은 알코올에 완전히 지배당한 시선을 그런 제 동생의 얼굴에 말없이 고정했다.
한편, 그 꽉 막힌 침묵을 다시 깬 건 고신재였다.
「…후우, 형. 여기서 잘 거야? 현관에서?」
「…….」
「다른 말 안 해. 형, 신발 벗고 방에 들어가서 자. 그냥 좀, 우선은 자. 아무리 종강했다고 해도 이렇게 취해서는 뭐하는 거야, 대체.」
정말이지 참을 인을 열댓 번은 더 새겼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집에 들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욕을 내뱉었을 때부터 보란 듯이 코웃음 치고 내버렸을 거다.
술 처먹고 겨울에 얼어 죽든지 말든지 내 알 바야? 하며 뒤돌아보지도 않았을 사람이 고신재다.
하지만 형이니까.
다른 형들은 동생과 주먹다짐을 하며 매일같이 욕을 하고 부려먹는다는데, 바보같이 착해빠져선 이제껏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욕 한 번, 주먹질 한번 해 본 적 없는 형이니까. 고신재는 생전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목소리로 취한 제 형을 달랬다.
벽이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더니 이제는 혹시 잠들었나 싶을 정도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고진영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