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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힐, 힐!-22화 (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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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눈꼬리, 무뚝뚝한 인상. 거기에 극도로 낯까지 가리는 성격까지.

백한빈은 첫인상이 좋기 힘든 3박자를 모두 가지고 있다. 고신재 역시 그 때문에 한때 음침한 사진과 녀석이라고 내심 흉보듯 생각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제는 왜 그랬나 싶은 과거의 일이지만 말이다.

“-배, 백한빈 너는.”

“응.”

“너는…, 너보다 못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 안 답답해?”

신재는 제 인생을 전체에서 이렇게 말을 많이 더듬은 게 지금이 처음이라고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차라리 말만 더듬으면 또 몰랐다.

갑자기 왜 이렇게 백한빈이…… 저보다 훨씬 작은 게 확 와 닿을까.

참 새삼스럽지도 않다. 심지어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미간을 좁히는 백한빈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지는 것조차 괜히 신경 쓰였다.

고신재는 갑작스레 화제를 돌리는 답지 않은 횡설수설을 이어갔다.

“뭐?”

“얼마 전에 나랑 김푸름이랑 같이 PC방 갔을 때도 거의 세 시간이나 지루하게 했던 것 같아서.”

“너네랑 하는데 뭐가 지루해. 아, 그래. 물론 가끔 답답할 때야 있는데….”

간신히 만든 사람 좋은 미소는 흠잡을 데 하나 없이 그럴듯했고, 한번 말을 더듬은 것 이후로는 당황한 내색조차 없이 매끄러운 문장만을 이어갔지만, 사실 그 뒷면의 고신재는 제게 바짝 가까이 붙은 백한빈에게 솜털 하나까지 모두 곤두서 있었다.

이정도 거리가 처음도 아닌데 유독 의식되는 건 아마 백한빈이 먼저 거리를 먼저 좁혀든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일 거다.

고신재는 그렇게 저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뒤늦게 툭툭 눈에 걸렸다.

섬유유연제인지 샴푸 향인지 모를 옅은 라벤더향. 커다란 뿔테안경의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까맣고 긴 속눈썹. 창백한 뺨 위의 주근깨 몇 개. 후드티의 손목이 넉넉히 남을 정도로 마른 손목. 무언가 생각하듯 운동화를 꼬물거릴 때마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까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이 순간 오감 중 네 개는 백한빈이 차지하고 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최소한 남은 하나는 백한빈을 먹지 않는 한 휘둘릴 일 없는 거다.

고신재는 그렇게 반쪽짜리 안도를 했다.

한동안 말을 고르듯 침묵하던 백한빈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야. 나 솔직히 중고등학교 때 친구 없었거든.”

예상할 수 있는 범주에서 한껏 떨어진 채 시작된 학창시절의 화제는 갑작스러운 만큼 고신재를 손쉽게 현실로 훅 끌고 올라왔다.

고신재는 어깨 한쪽을 살짝 제게 기댄 채로 낮게 말을 잇는 백한빈을 멍하게 눈에 담았다.

“왕따 같은 건 아니었어. 그냥, 툭하면 학교 조퇴하고 다 같이 혼날 때 나는 약하다고 선생님들이 알아서 빼주고 그러면서 친해질 기회도, 사람도 없었다고나 할까.”

“…….”

“그때도 게임은 잘했어. 엄마는 학원 원장이고, 아빠는 공무원이라 이모네 사진관에서 놀다가 혼자 집에 와서 할 게 게임밖에 없기도 했지만.”

어느새 한 손으로 꼽지도 못할 정도로 지난 이야기를 새삼 회상하는 백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묘한 표정이었다.

그립지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기억을 정말 오랜만에 먼지를 털어 열어본 어색한 거리감이 뚝뚝 배어 나왔다.

“학교 애들이랑 어울리려면 게임 잘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었어. 누가 ‘백한빈 쟤 저번에 챌린저도 찍었대.’ 하면 PC방 가는 걸 끼워줬거든. 가끔은 먼저 같이 가자고 물어봐 주기도 하고.”

알고 지낸 지 벌써 5년.

사실 고신재는 제 게임친구 하마에 대해 잘 알면서도, 또 잘 몰랐다.

성격이나 자잘한 호불호를 아는 건 쉬웠다.

예를 들면 생판 남이어도 누굴 괴롭히는 건 도저히 그냥 모르는 척하지 못하는 거라든가, 치즈케이크를 좋아해서 가끔은 밥 대신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은 매일같이 떠들면서 자연스럽게 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말마따나 고신재 그가 저의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했기에 백한빈 역시 이런 이야기는 입을 다문지 오래였던 탓이다.

고신재는 가나다라123조차 알지 못하는 백한빈의 이야기 앞에서 저도 모르게 목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채로 대답했다.

“…예전부터 게임 되게 잘했네.”

“좋지만은 않던데. 혹시라도 손 좀 안 풀리거나 너무 컨디션 안 좋은 날 실수하거나 무슨 짓을 해도 버스 못 태워주는 날에는 분위기 완전 어색해지고. 아- 진짜 개싫었다고.”

평소에 어떤 감정 한 자락 허투루 내놓지 않아서일까.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는 백한빈은 억지로 웃는척하는 것조차 서툴렀다.

그 순간 백한빈이 ‘하마’로 제게 지병을 오래 앓았던 사실을 말했던 순간이 떠오른 건 괜한 일은 아닐 거다.

아프다고 안 놀아주면 안 된다느니 하던 말은 그저 실없는 농담인 줄만 알았는데. 거기엔 생각보다 꽤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막연한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난 지금이 얼마나 좋은데. 진짜 놀고 싶을 때 노는 것 같고. 같이 웃고 떠들고.”

“…….”

“저번에 게임 못한다고 구박해서 미안. 진짜 막 진심으로 그런 건 아니고…, 계속 지기만 하니까 푸름이도 속상해하고, 분위기도 안 좋아지길래.”

한빈의 목소리는 어느새 속삭이는 혼잣말처럼 작아지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고신재는 순간 그 흔한 웃음기 하나 덮어씌우지 못한 채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트롤짓했어. 하도 못 하니까 상대가 나만 보면 신나서 잡으러 오던데, 그걸 왜 사과해.”

“…….”

“백한빈. 내가 못해서 그런 거야. 미안해하지 마.”

백한빈이 속을 알 수 없는 말간 얼굴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괜한 걸 물어봤나.

괜히 하기 싫은 옛날 이야기를 나 때문에 꺼냈나?

순간 고신재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폭풍처럼 휩쓸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눈만 깜박이던 백한빈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참 여러모로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었다.

“신재야.”

“어.”

“너 진짜 대리 안 받았어? 암만 봐도 잘 해봐야 실버인데. 진짜로 수질 낮은 광물의 향기가….”

“……야!”

백한빈이 오늘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

한빈은 시원하게 하하, 웃는 쪽보다는 목 안으로 살짝 울리다 그 안에서 꺼지는 꽉 억눌린 웃음소리를 낸다.

목소리가 콤플렉스인 탓에 변성기를 지날 무렵부터 이렇게 작게 웃는 것이 습관이 된 탓이다.

쌍꺼풀 없이 긴 아몬드형 눈이 살짝 접히는 순간을 뜯어보는 고신재의 시선이 퍽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하마에게서 한 조각. 또 백한빈에게서 한 조각.

쉬이 이유를 상상할 수 없었던 이유가 하나씩 손에 쥐어질수록 명쾌해지지도, 후련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속이 답답해질 뿐이다.

현실의 고신재는 백한빈에게 고생 많았다며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줄 명분도 이유도 없다. 그건 ‘하마’가 ‘가나다라123’에게 건네준 조각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니까.

‘고신재’와 ‘가나다라123’은 절대 함께할 수 없다.

그걸 몰랐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5년간 컴퓨터나 메신저를 거쳐서만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을 매일같이 직접 만나 인사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그게 너무 편해서- 아니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서.

……그래서, 잠시 모르는 척했다.

고신재와 가나다라123 모두가 백한빈의 친구로 있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걔는…, 걱정하지 마. 그거 가지고 게임 접을 사람이면 5년이나 너랑 같이 놀았겠어.”

“…그, 그런가?”

“생각을 좀 줄여.”

고신재는 살짝 비뚤어진 한빈의 안경을 고쳐주며 싱긋 눈을 휘었다.

꾸며 웃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자연스럽다는 게 이 순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간단명료한 공략법이었다.

하마가 가나다라123에게 고백하게 하고, 저는 그걸 찬다.

그 다음, 현실의 백한빈을 위로하는 사이 온라인 속 이름은 사라진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이렇게 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백한빈의 마음도 잘 ‘수습’하고, 놓을 수 없는 우정도 이어갈 수 있다.

모든 게 좋아도 안 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게이도 아닌데, 아무리 하마가, 아니 백한빈이 좋은 녀석이라고 해도 안 된다.

그걸 잘 알아서 짠 계획이었고, 심지어 그 당사자인 백한빈과 매일매일 가까워지고 있으니 문제 될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기분이 엉망인지.

고신재는 그것의 이름이 죄책감이라고 생각했다.

둘 중 하나는 정리해야 하고, 그건 온라인 속 이름이라는 것에 이변은 없다.

고신재는 제 친구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작게, 하지만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이미 형 아이디까지 빌려서 ‘가나다라123’과는 선을 그었으니 정신만 잘 차리면 그만인 일이다. 딱 눈 한 번 감고 마음 독하게 먹으면 된다.

고신재는 한숨이 슬쩍 스쳐 지나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창백한 얼굴을 눈에 담으며 다짐하듯 생각했다.

그때였다.

“신재야. 너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돼?”

시간이 있고, 없고를 떠나 한빈이 원한다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 내야 할 판이다.

고신재는 조금 전부터 쭉 신경쓰였던 한빈의 마른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살살 그리면서 대답했다.

“괜찮아. 왜?”

“나 다음 주에 걔한테 뭐 선물 챙겨줘야 하는데. 내가 이런 거 진짜 못 골라서. 좀 도와주라. 내가 점심 살 게.”

“……선물?”

“응. 원래 인터넷으로 사려고 했는데 직접 안 보니까 잘 감이 안 와서. 뭐, 선물 보내면서 겸사겸사 좋아하는 사람 이름도 알게 되면 좋다고 생각하면…… 너무 크리피한가.”

이 순간 고신재의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누구 이름으로, 또 어느 주소로 대신 받아야 하지? 하는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선물? 목적이 뭐야. 그걸 알아야 도와주기 쉬울 것 같은데.”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선물 받을만한 일이 없는데, 라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고신재는 제게 줄 선물을 고른다는 백한빈이 잠시 대답 대신 멋쩍게 턱을 긁적이는 걸 보며 제 머릿속을 탈탈 뒤집어엎듯 기억을 거슬러 갔다.

하지만 고신재가 제 의문의 답을 찾기도 전에 백한빈의 입에서 정답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 뭐랄까. 생일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래.”

그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참 이상한 대답이라고 할 만한 문장이었다.

생일 선물이면 생일 선물이고, 생일 선물이 아니면 생일 선물이 아닌 거지, ‘뭐 그래’, 정도인 건 또 뭐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신재는 그 어색한 웃음이 담긴 문장 앞에서 1년 전의 이맘때에 기억이 멈췄다.

……독한 마음이고 뭐고, 그 순간 나오는 한숨이란.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기쁘게 확인했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해요.^ ^

다음 편은 고신재에게 백한빈이, 그러니까 '하마'가 왜 유일한 친구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 ^ 개인적으로 빨리 쓰고 싶었던 부분이라 왠지 떨리네요.

가능한 내일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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