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야. 청담동 왕자님. 너 솔직히 말해.”
…미친, 진짜 쪽팔려서!
고신재는 제 돈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이 빌어먹을 닉네임을 바꾸고 말리라 다짐했다.
이 계정이 형 것이라는 건 이제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아니, 제 형이라는 사람이 이딴 닉네임을 걸고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뭘.”
이를 악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자 뾰족한 눈매를 더욱 가늘게 뜨는 백한빈의 시선이 유독 따가웠다.
고신재는 그 시선을 모르는 척, ‘청담동왕자님’이라는 끔찍한 닉네임이 박혀있는 모니터 화면을 괜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머잖아 백한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대리 받았지.”
“뭐?”
“딱 견적 나옴. 너 모스트가 딜러인데 왜 이래. 왕자님 너 여기 있을 실력이 아닌데.”
이전 판, 아군 팀원의 마지막 채팅은 이거였다.
‘3인큐 진짜 좃.같네 패작이냐?’.
고신재는 제 화면에도, 백한빈의 화면에도, 김푸름의 화면에도 떠 있는 그 문장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
“아니거든.”
“솔직히 말해. 안 비웃을게. 청담동 왕자님이 돈과 티어를 바꾸실 수도 있지, 암.”
“아니라고.”
정말 거짓말은 아니다.
게임 티어 대리는 안 받았다. 그냥, 계정을… 형한테 빌렸을 뿐이지. 신재는 속으로 대답했다.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고.”
“근데 에임이 왜 이래. 대체 어딜 보고 쏘는 거야. 봐, 이게 머리야. 머-리. 헤드! 헤드 몰라? 헤드를 쏘라고. 왜 자꾸 벽이랑 허공에 대고 쏘는데. 벽에 그림 그리냐고. 게임 속 현대미술 뭐 그런 거에 관심 있어? 누가 화랑집 아들 아니랄까 봐.”
“푸후흐으읍!”
오늘만 해도 김푸름에게 벌써 두 번째의 폭소를 선사한 고신재는, 제 고운 눈썹을 삐딱하게 휜 채로 백한빈을 흘겨보았다.
솔직히 그는 지금 좀 배신감에 차 있다.
하마는 가나다라123, 일명 가나에게는 뭐든 칭찬하며 소위 ‘뽀록’만 터져도 잘했다고 물개 박수를 쳤었다.
실생활로 치자면 숨만 쉬어도 잘했다며 잘했다고 칭찬받는 보송한 고양이 같은 삶이었다 할 수 있겠다.
조금만 잘해도 칭찬해 준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마와 저의 티어 차이가 하늘에서 땅인 걸 차치하고서라도 5년간 게임 하면서 먹은 욕이 얼마인데 그걸 모르는 게 바보다.
하지만 가나다라123에게는 시종일관 칭찬만 해주던 사람이 현실의 제게는 가혹하다 못해 일점사를 해대는 걸 실시간으로 겪으니 기가 안 차려야 안 찰 수가 없다.
파일럿은 똑같은데 왜 누구는 나이스고, 누구는 대리 의혹인지!
한편, 백한빈의 죽창은 모두에게 평등했다.
다시 말해 고신재를 이어 비폭력을 이어가던 벌레2, 김푸름 역시 백한빈의 평가를 피해갈 수 없었다는 뜻이다.
“푸름아. 요즘 다이아가 원래 다 이렇게 벌레냐?”
“……나 실버거든, 씨발놈아.”
“골드 아니었어? 언제 또 떨어졌냐. 어우, 몇 판만 더 지면 브론즈….”
“닥쳐.”
“아. 광물들이랑 겸상 힘드네. 하나하나 불나방처럼 가서 죽는 그 기개에 오늘도 감탄만 나온다. 이걸로 손 풀고 다른 게임 가자며. 손 언제 풀려, 둘 다.”
“시험 보고 와서 그래.”
신재는 ‘어차피 브실골은 하나라던데 쟤도 나랑 비슷하구나’ 하는 듣는 실버 서운한 생각을 하며 늘 조금씩 마음에 안 들었던 김푸름을 처음으로 친숙하게 평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PC방에 들어 선지 약 1시간.
여덟 판째 이어진 연패 앞에서 백한빈은 장난기 싹 사라진 목소리로 선언했다.
“-안 되겠다. 고신재 너 딜러 봉인이다. 힐러 해라, 벌레야.”
싸늘한 일갈에 고신재의 반듯한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고신재는 근 여덟 판 동안 다이아 티어인 형의 계정을 들고 무공해 청정 딜러를 표방하며 적을 티끌 하나 없이 방생 중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 순간 신재의 편을 들어 준 건 김푸름이었다.
“힐러도 쉬운 거 아니거든, 백한빈!”
“……맞아. 힐러 무시해?”
오늘에서야 간신히 말을 튼 고신재와 김푸름은 근 한 달이 넘는 어색한 관계가 무색하게 서로 합이 착착 맞았다. 심지어 거기엔 서로 나란히 전장의 비폭력 딜러로 날아다닌 벌레끼리의 동질감마저 깔려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연합은 이어진 백한빈의 딜에 완전히 무너졌다.
“그치. 힐러도 쉬운 거 아니지. 완전 중요하지. 그런데 벌레가 딜러 잡으면 그 역캐리는 뭔 짓을 해도 감당 못 해. 힐러는 그나마 좀 봐줄 수라도 있지…, 쯧.”
“…….”
“…….”
딜 미터기는 이미 터졌다.
전선을 재정비하는 건 그랜드 마스터와 랭커를 왔다 갔다 하는 선봉장의 몫이다.
백한빈은 조율을 이어갔다.
“야, 푸. 너는 탱 해.”
“나 탱 못 해. 딜러만 해봤어.”
“무슨 ‘나 탱 못함’하기로 약속한 비밀 결사라도 있냐고! 하면 하는 거지 못하는 게 어딨어!”
“랭겜도 아닌데 대충 돌려.”
“여덟 판을 내리 졌는데 얼마나 더 대충 돌려. 지금 우리 승률 0퍼센트야, 0퍼센트. 말 안 돼. 무조건 한 판 이기고 다른 게임 간다.”
“씨이…. 아니, 그건 그런데에…. 나 진짜 탱 하나도 할 줄 모르는데.”
“아오.”
결국 백한빈은 탱커를, 김푸름은 딜러를, 돈 주고 대리 맡긴 게 분명하다는 암묵적인 도장이 찍힌 브론즈맛 다이아, 고신재는 힐러를 하기로 했다.
사실 백한빈은 여덟 판을 거의 일방적으로 지는 내내 다른 두 사람이 실수해서 죽을 때마다 무조건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었다.
가장 높은 티어인 그가 제 친구 둘이 딜러를 잡고 터트리는 게임에 간섭 한 번 안 하고, 혼자 뒤에서 뼈가 부서져라 힐만 넣으면서 말이다.
지금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도 한 시간 넘게 계속 지기만 하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푹 한숨을 내쉬는 승부욕 강한 김푸름 때문에 안 되겠다 싶어 직접 나서는 게 뻔했다.
-하지만, 그래도 좀 너무했다.
“……맨날 잘한다 잘한다 해놓고 현대미술 하는 벌레는 또 뭐야?”
고신재는 이제껏 제가 하마와 함께한 몇 해 동안 채팅으로 들었던 다양한 칭찬들을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즐겜 유저 5년 인생에서 이렇게 참신한 욕은 또 처음이다.
아마 이쪽이 진심이겠구나 생각하면 5년간 저와 붙어 게임 한 백한빈에게 미안한 맘, 싱숭생숭한 마음 반이다.
확실히 백한빈은 뭐든 게임을 잡았다 하면 제가 접속하지 않았을 때 틈틈이 혼자 돌리는 것만으로도 가장 높은 계급을 찍었다.
워낙 차이가 크다 보니 점수가 달린 게임은 같이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다.
몇 년 전쯤 “너 나랑 하는 거 안 답답해?” 하고 몇 번이나 물어봤을 때 ‘난 즐겜이 좋아’ 하고 거듭 대답한 하마의 말을 믿었다.
실제로도 근 5년을 총싸움부터 농사게임, 생존게임, 하다못해 아기자기한 섬 가꾸기까지 같이 하면서 잘 지냈다.
아니, 잘 지냈다고 생각했다.
고신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청담동 왕자님이 아닌 가나다라123이 되어 꽤 진지하게 ‘사실 이때까지 나만 재밌었나?’ 하고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고 있는 건 꿈에도 모르는 백한빈은, 어찌나 말을 많이 했는지 조금 쉬기까지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라면 냄새. 야, 다음 판 돌리기 전에 우리도 뭐 시키자.”
‘뭘 시켜?’ 하고 신재가 묻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곧장 말을 받는 푸름은 이 모든 게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오. 좋아. 나 치즈라면.”
“치즈라면 맛있어? 나 라면에 치즈 한 번도 안 넣어 봤는데.”
“존맛임.”
“그럼 나도 치즈라면. 그리고-”
백한빈과 김푸름의 시선이 고만고만한 콩나물 오징어들이 가득한 PC방에 앉아서도 제가 앉은 자리를 영상화보 속 한 장면으로 바꾸는 남자에게로 동시에 스윽 옮겨갔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했던 고신재는 슬슬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정반대의 두 사람을 향해 한숨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
“난 괜찮아.”
물론, 그 짤막한 사양은 워낙에 마르고 약한 탓에 단 한 끼를 굶어도 펄쩍 뛰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백한빈과, 먹기 위해 사는 김푸름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마뜩잖은 거절이었다.
“아무리 무용과여도 중간고사 끝났는데 라면 조금은 괜찮지 않나.”
“엊그제 학교 앞에서 무용과 애들 파스타 먹던데. 라면이나 파스타나.”
“앗차차! 왕자님은 치즈라면 안 먹나!”
“아. 그럼 어쩔 수 없네. 푸, 우리 것만 주문하자.”
언제 어색한 사이였다는 듯 옆에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짜증 나는 추임새를 넣는 김푸름과 말 한마디 지지 않는 하마, 백한빈이 만나니 이만한 완전체가 또 없다.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이를 빠득 갈면서 대답했다.
“……내 것도 시켜.”
* * *
왜애애애????
왜 그러는데에에에에 오후 10:02
가나
뭐 그냥
5년 해도 브론즈면 겜 접을까 싶고 오후 10:02
브론즈가 뭐 어때서!!!!!
그리고 너 전보다
진짜 훨~~~~씬 잘한다고!!! 오후 10:03
가나
나 전에는 대체 얼마나 못한 거야 오후 10:03
어............? 오후 10:04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알기 힘든 건 짝사랑 상대의 속마음이다.
백한빈 역시 그건 예외가 아니라 한빈은 그 견고한 벽 앞에서 쌍시옷에 쌍시옷을 더해가며 울분을 터트렸다.
“어떤 씹스러운 쌍놈의 새끼가 걔 게임 못 한다고 구박했을까?”
“……그런 상스러운 말은 어디서 배워?”
“아, 몰라, 몰라.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아주 그냥 기가 팍! 죽었다니까? 요새 아무리 꼬셔도 싸우는 종류 게임은 아예 안 해. 맨날 농사짓고 낚시하는 게임만 한다고.”
“그냥… 농사짓고 낚시하게 내버려두는 건?”
“걔가 왜 팔자에도 없는 사이버 귀농을 해! 하고 싶어서 하는 거랑, 나 없을 때 웬 개새끼한테 욕먹고 접은 거랑 완전 다르지!”
어느새 고신재와 백한빈의 교내 정모 장소가 다 된 인적 없는 캠퍼스 뒤편 벤치. 나란히 앉아 아메리카노를 입에 문 대화는 꽤 일방적이었다.
고신재는 백한빈의 목청 큰 토로에 오늘따라 신맛이 유독 강한 커피를 조용히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이 이렇게 전에 없던 상소리를 연달아 하며 분개하게 된 건 모조리 제 탓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한빈도 좀 너무했다.
저한테는 PC방에서 게임 하는 내내 “너 정말 대리로 다이아까지 올렸지. 왕자님 솔직히 말해보세요. 예에?” 같은 말이나 했으면서, 집에 도착해 가나다라123으로 만나자 여전한 제 실력을 두고 하루 동안 들은 적 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역시 난 너랑 해야 합이 잘 맞는 것 같아.” 하는데….
쪼잔하다는 건 알지만 솔직히 조금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신재는 요 며칠 전 가나다라123의 이름으로 사이버 귀농을 선언했었다.
물론 거기에는 하마의 진솔한 감상을 들은 이상, 저와 같이 전투류 게임을 하며 답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설마하니 그것 때문에 며칠간 내내 먹구름 낀 표정이다가 이내 극대노 상태로 ‘걔’를 욕한 누군가에게 저주를 퍼붓는 전개는 영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 카톡도 왠지 바로바로 안 읽는 것 같아.”
심지어 다른 방향으로 우울해 하기까지 한다.
고신재는 속으로 쯧, 혀를 차면서 조곤조곤 달래듯 대답했다.
“바쁜가 보지.”
“원래는 그래도 꽤 빨리 읽는 편이었단 말이야. 요즘은 좀 느려….”
하늘에 맹세코 일부러 휴대폰을 늦게 본 게 아니다.
그저 요새 한빈과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할 틈이 부족했을 뿐이다.
고신재는 좀 더 신경 써서 휴대폰 확인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작은 입을 삐죽거리는 백한빈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씹스러운 쌍놈의 새끼’라니. 예쁜 입으로 어디서 저런 욕을 다 배웠을까.
다시 생각해도 참 험하기 짝이 없다.
…역시 인터넷이 문젠가?
고신재는 저 역시도 백한빈을 인터넷에서 만난 거나 마찬가지면서 퍽 뻔뻔한 생각을 했다.
그 때, 고신재의 속을 알 리 없는 백한빈의 말이 이어졌다.
“신재 너도 대리로 티어 올린 거 조금, 정말 쪼-끔 게임 서툰 거 가지고 막말하는 놈들 때문에 욱해서 그런 거니까 걔 심정을 좀 알지 않아?”
“……대리 안 받았다니까.”
“너 게임 못 한다고 구박하는 것 때문에 게임 접고 싶었던 적은 있지.”
“며칠 전에 너도 구박했거든?”
“그럼 이럴 땐 뭐라고 위로해야 돼? 뭐라고 해야 기분이 좀 풀려?”
가만 생각해보면 참 귀엽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화내는 것도, 속상해하는 것도, 위로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결국 다 저를 위한 것이다. 까만 뿔테안경이 어느새 또 살짝 비뚤어진 것도 귀엽다.
신재는 잠시 백한빈의 말을 곱씹으며 피식 웃음이 날뻔한 걸 겨우 삼켰다.
한편, 백한빈은 제 유일한 연애 상담가의 모호한 태도에 되레 입이 말랐다.
어쨌거나 그에게 고신재는 제 감정이라는 망망대해에 뚝 떨어져 갈 길을 잃었던 외로운 시간에 깜짝 선물처럼 찾아온 선생님이었다.
심지어는 하라는 대로 용기 내어 입을 열고 나니 평생 제 목소리로 대화할 수 없을 것 같던 가나와 말까지 텄다.
“야아. 어떻게 말하는 게 좋겠냐고.”
백한빈이 몸을 바짝 붙이자 살짝 어깨 끝이 닿을 듯 말 듯 했던 거리가 순식간에 훅 좁혀졌다.
중간고사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따뜻해진 날씨에 더욱 단출해진 옷감은 얇은 후드티 한 장 너머의 마른 어깨를 어렵잖게 그릴 수 있게 했다.
백한빈은 어깨가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살면서 만난 사람을 통틀어도 그 중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뼈대가 가늘었다.
잠시 한빈의 비뚤어진 안경에 정신이 팔려있던 고신재는 제 팔뚝의 반이나 될까 싶은 그 마른 팔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하지만, 그건 이어지는 것과는 비할 것도 아니었다.
“응?”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올려다보는 까만 눈에, 그 앞을 가린 안경에 제가 비치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