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19화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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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백한빈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고 있던 거 깨웠으면 미안. 다음에 전화 할까?” 정도의 물음을 던질 예의는 차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친절히 안부를 확인할 기력이 없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무릎은 도로 컴퓨터 의자에 앉지도 못할 지경으로 늘어졌고, 심장은 짜증 날 정도로 제 위치를 알려대서 뭐든 토해내지 않으면 못 버티겠다.

한빈은 거두절미하고 곧장 본론으로 달려들었다.

“신재야. 있지, 나 방금 걔랑 얘기했어.”

-…걔?

“걔! 내가 좋아하는 애!”

-…….

“야. 어떡하지? 어떡해, 진짜? 나 지금 완전 헛소리만 하고 있는데. 목소리도 염소처럼 벌벌 떨면서 진짜 개찌질하게!”

느릿느릿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목이 탄 한빈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채 쏟아져 나왔다.

고신재는 설렘이, 떨림이, 긴장이 여전히 한가득 담겨있는 토로 앞에서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천천히 말을 받았다.

-잘했어. 시작한 게 중요한 거지.

“아, 한심해 죽을 것 같아. 연습 진짜 많이 했는데, 이게 뭐야.”

-한빈이 너 이제 나 보면서 얘기할 때는 긴장 안 하잖아. 걔랑도 얘기하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지기 전에 걔가 이 새끼 어디 좀 모자란 거 아냐? 하고 손절 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걔 인성이 그 정도야?

“그건 아니지만!”

우울한 가정을 줄줄 늘어놓으면서도 짝사랑 상대를 향한 힐난은 절대 두고 보지 않는 반박에 휴대폰 너머의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웃었다.

솔직히, 한빈은 그 웃음에 조금은 위로받았다.

휴대폰으로 들으니 유독 가나다라123과 ‘비슷하게’ 들리는 웃음을 듣고 있노라면 제 한심한 첫인사가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빈은 침대 옆에 앉아 고개를 반쯤 묻은 채로 살며 몇 부려본 적 없는 투정을 이어갔다.

“몰라. 망했어, 완-전 망했어. 미친. 나 진짜 왜 이렇게 떨지? 직접 보고 말하는 거면 억울하지도 않아!”

사실 백한빈은 밤 10시에 뜬금없이 전화해서 곧장 와르르 쏟아내는 자책 세례 앞에서 고신재가 진지하게 대답해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단지 누군가에게 뭐라도 말하고 싶어서 무작정 휴대폰을 움켜쥐었던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 고신재는 백한빈의 기대 이상으로 관대했다.

-……나랑 얘기한다고 생각하고 말해. 그럼 좀 낫겠지.

“고신재 너랑?”

-그래.

한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게 약간 한숨 섞인 헛웃음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해도 어쨌든 웃음은 웃음이니, 다른 건 비집고 들어올 틈 없던 꽉 찬 긴장 사이에 실낱만 한 바늘구멍 정도는 생긴 셈이다.

-뭐야. 왜 웃어.

“아니. 뭐…, 그냥. 너랑 말하듯이 했다간 점수 더 깎이는 거 아닌가 싶어서.”

-확실히 한빈이 네가 나한테 좀 툴툴대기는 하지.

“너도 만만치 않거든! 맨날 웃는 얼굴로 나 멕이면서, 무슨.”

-내가 그래?

“완전 그래!”

여전히 울긋불긋 불이 난 얼굴을 식히며 실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최소한 숨쉬기 힘들 정도로 울렁거렸던 속은 슬슬 가라앉기 시작했다.

덕분에 한밤중에 난데없는 전화를 받은 고신재에게는 미안하지만, 전화하길 잘했다 싶어진 한빈이다.

심지어는 살며 처음으로 늦은 밤 타인에게 속삭이는 연애 상담이라니.

숨 돌리기에는 이만한 것이 또 없다.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래. 끽해야 뭐 인사 정도 한 거 아닌가?

“그건 맞는데…. 야, 아니, 있지. 걔가 나보고 그냥 말하라잖아. 마이크 끄고 그러지 말고. 전혀 안 불편하대. 심지어는 뭐라더라.”

백한빈은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입이 마르는 순간을 옮기며 저도 모르게 목소리마저 낮췄다.

“후우우, 내 목소리가 좋대. 그러니까 마이크 끄지 말래! 와, 진짜 말이 되냐고!”

-뭐가 말이 안 되는데. 시끄러우니까 그냥 채팅하자 그럴 줄 알았어?

“에이, 야. 걔가 너냐?”

아. 지금 건 조금 선 넘었나.

백한빈은 제가 저도 모르게 툭 뱉어낸 말에 괜히 조금 찔끔했다.

휴대폰을 거쳐서인지 유독 가나와 빼닮은 목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무시한 가정을 하는 것에 저도 모르게 과민반응이 튀어나왔다.

웃음기가 섞이긴 했지만 유난스레 목소리를 높인 리액션이었다는 걸 말한 저 스스로가 모르긴 어렵다.

늦은 밤 대뜸 건 전화를 마다치 않고 속을 달래준 사람에게 고마움조차 모를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은 한빈은, 뒤늦게 속으로 혀를 차면서 얼기설기 구겨진 변명을 허둥지둥 덧붙였다.

“아, 아니이, 그니까. 솔직히…. 굳이 콕 집어서, 그…. 드, 듣기 좋다고 할 줄은 몰랐단 소리지.”

-……그 사람은 뭐가 그렇게 다른데?

“어?”

-백한빈 너 저번에 그 사람 말하는 거랑 성격에 반한 거라고 했지. 그 사람은 어떤데. 걔는 나랑 뭐가 그렇게 달라. …아니, 아니다. 걔를, 그 친구를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좋아해?

확실히 오늘 고신재는 좀 이상했다.

첫인상만큼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지는 오래였지만, 그래도 밤 10시에 전화로 쏟아내는 헛소리를 다 받아줄 정도로 녹록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어째 오늘은 십년지기 친구라도 되는 양 제 헛소리를 모두 묵묵히 받아준다.

심지어 지금은 제가 한 실언에도 화나거나 비꼬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묘하게 차분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제 짝사랑 상대에 대해 물어볼 뿐이다.

백한빈이 멋쩍게 턱을 긁적이면서 홀린 듯 입을 연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거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하고 끙끙 앓던 첫사랑을 두서없이 토로할 수 있는 경험은, 알코올이 없어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의 빗장이 풀리기에 충분했다.

“뭐… 대단한 이유는 없는데. 나도 처음에는 내 바보 같은 말 다 잘 들어주는 게 고마운 정도였거든.”

-응.

“아, 그런데 진짜……. 뭐라고 해야 하지. 너는 좀 유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자랑하는 건 뿌듯하기는 해도 그만한 민망함이 따르는 일이다.

어쨌거나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제 마음을 한 자락 꺼내놓아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백한빈은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간질간질하기도 한 기분에 괜히 발가락을 크게 꼼지락 꼼지락 했다.

“…왜 좋아, 라는 말보다는 어떻게 안 좋아해 싶다고나 할까.”

-…….

“걔는, 숨도 못 쉬겠다 싶을 때마다 조용히 옆에서 내가 바보처럼 구는 거 다 들어주고, 농담하는 척 달래주고 그래. 그 날 하루가 얼마나 거지 같았든…… 그냥 평범하게 웃어주는 거 있잖아.”

-…응.

“그것만으로도 너무 위로 되는 거. 그런 애야. 나한텐.”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건 참 신기했다.

한 번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제 말을 먹고 조금씩 조금씩 몸집을 불려간다. 한빈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께를 후우우, 긴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달랬다.

잠시 조용하던 고신재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알아.

직접 고백하지 못하는 마음을 대신 들어주는 상대의 목소리가 그 당사자와 빼닮았다는 건 정서적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심장에는 영 나쁘다.

한빈은 나직한 대답에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며 손에 쥔 휴대폰에 힘을 줬다.

-나도 알아. 그런 거.

“그, 그치. 너도 알지. 그거! 그러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 난 골때리는 게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 걔가 꿈에 나와서….”

-…꿈?

아, 또, 또, 또!

정신줄 잡자, 백한빈!

한빈은 저도 모르게 줄줄 쏟아낸 말을 이번만큼은 가까스로 잘 끊었다.

오늘 밤 기묘할 정도로 너그러운 고신재라고 한들 미친 무의식의 대환장 파티를 들으면 소름 끼쳐 할 거라는 생각이 술술 말려드는 혀를 멈춰 세웠다.

“아, 아냐! 아무것도! 나 끊는다. 정신 놓고 너랑 너무 오래 통화했다. 맞다. 인증! 인증하라고 했지. 근데 뭐로 인증해. …설마 진짜 영상 찍어?”

누가 봐도 화제를 돌리는 티가 나기는 할 테지만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그리고 정말 전화를 끊어야 할 때이기도 했다. 잠깐 화장실 갔다가 물 좀 떠오겠다고 했는데 바닥에 주저앉아 고신재와 몇 분을 떠들었는지 모르겠다.

백한빈은 허둥지둥 반쯤 기울어진 채 코에 대롱대롱 걸쳐졌던 안경을 고쳐 쓴 다음 고개를 빼꼼히 들어 모니터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가나는 별 채팅을 남긴 게 없다.

-됐어. 전화만 해도 알겠으니까.

그러니 살짝 억눌린 듯한 목소리는 굳이 붙잡아 물어볼 것 없이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아니, 사실 지금은 그러는 게 맞았다.

괜히 꿈이 무슨 얘기냐고 나중에 꼬치꼬치 캐물을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하지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기 전 머뭇거리던 백한빈은 기어이 툭, 입을 열어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야. 나 그렇게 티나?”

그 물음에 고신재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 번 아주아주 긴 한숨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몇 초 뒤쯤 뒤, 그 고신재에게 듣는 욕치고는 퍽 귀여운 비난이 돌아왔다.

-……엄청 티 나거든. 바보야.

“에이 씨….”

잠시 열을 달랜 것이 무색하게 다시 뜨끈해진 귓가를 몇 번 거칠게 쓸어내린 한빈은 전화를 끊기 전 “야, 그리고 걔가 너냐고 한 건…, 농담이다. 알지?” 하고 작게 우물쭈물 덧붙인 다음 후다닥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 * *

난 오늘 시험 두 개!

교양이랑 전공 하나씩! 오전 8:41

가나

잘 보고 와 오전 8:41

응 가나얌

너두!!

다 끝나고 톡할게!! 오전 8:42

너도나도 화사하게 차려입는 첫 달이 지나고 어느새 중간고사가 시작된 대학가는 과제와 시험공부에 찌들기 시작한 사람들로 슬슬 퀴퀴해지기 시작한다.

제2의 교복으로 전성기를 맞은 과잠바는 말할 것도 없고, 간신히 드라이만 하고 온 산발을 감추려 캡모자를 눌러 쓰는 사람의 비율도 훅 높아진다.

그건 여기 사진과 2인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로 짜고 나온 것도 아닌데 나란히 캡모자를 눌러 쓴 두 사람은 교양동의 휴게실에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푸름아. 너 임 교수님 프린트물 지금 있어?”

“어? 어어, 잠만. 엉, 있다.”

“나 그거 좀 빌려주라. 복사하고 이따 전공 때 줄게.”

“응. 편할 대로 해. 헐. 시간 언제 이렇게 됐어.”

“야. 빨리 가! 미쳤나 봐.”

“괜찮아. 요 바로 앞 강의실이야.”

정신을 놓고 있다 보니 어느새 교양 시험 시작 5분 전이다.

이 와중에도 허허실실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은 김푸름은, 늘어놓은 프린트물이며 교재를 가방에 와르르 쏟아 넣으면서 슬쩍 눈을 굴렸다.

그의 시선은 저와 백한빈이 내내 떠드는 와중에도 단 한 번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정물처럼 앉아 있던 남자, 고신재에게 닿아있다.

……인사해, 말아.

푸름은 턱을 긁적이며 잠시 망설였다.

혹시라도 제가 말을 붙이는 게 이 고요한 남자에게 방해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당장 시험을 앞둔 입장에서 이런 걸 한가하게 오래 고민할 여유는 없다.

“…그, 수, 수고하세요!”

“……네. 수고하세요.”

역시나 돌아온 대답에는 단 한 줌의 영혼도 없다. 사람이 말하는데 쳐다보지도 않는 건 뭐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어째 오늘만큼은 그리 기분이 상하지도 않는 푸름이었다. 솔직히 좀 혀를 내두르고 있기까지 했다.

사실 김푸름은 무용과의 저 잘난 남자에게 꽤 두터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백한빈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발이 넓은 푸름이다.

덕분에 제 친구와 주야장천 붙어 다니기 시작한 남자에 대한 악명을 전해 듣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무용과 선배 동기 중에서 고신재라면 샐쭉 웃는 것만 봐도 발작하는 사람 몇 있다더라, 누가 잘난 집안사람 아니랄까 봐 동기들하고는 겸상도 안 한다더라….

저 눈에 띄는 남자는 참 그 화려함만큼이나 적이 많았다.

물론 그 안에 슬쩍 담긴 시기 질투를 못 알아볼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하지만, 저 보기에 아니다 싶은 게 있으면 선후배 동기 가리지 않고 그 특유의 웃는 낯을 한 채로 들이 박아대서 무용과에서는 이미 암암리에 ‘고신재 또라이’와 ‘고신재가 또?’라는 의미 모두를 담아 ‘고또’라고 불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좀 걱정이 됐더랬다.

‘친한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천상계 생활하는, 은은하게 인성 터진 새끼.’

이 처참한 문장은 한빈과 한 학기 내내 조별과제를 하는 거로도 모자라 온갖 교양이 다 겹쳤다기에 신경 쓰여 무용과 사람에게 슬쩍 알아본 평판의 첫 문장이었다.

물론 이어진 소문들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이아 수저랑 잘 지내보라고 말하긴 했었지만, 혹시라도 저 까다롭고 거만하다는 평의 남자가 그렇지않아도 예민하고 몸 약한 제 친구를 스트레스로 졸도하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어찌나 신경이 쓰였는지 모른다.

……물론, 이건 지금 와서는 다 지나간 걱정이다.

요즘 김푸름은 그 악명이 자자하던 무용과 다이아 수저에 대한 평가가 좀 달라졌다.

정확히는 그가 제 친구의 ‘가방 셔틀’이 된 이후부터 마음이 퍽 누그러졌다. 짜식, 생각보다 나쁜 놈은 아니었어. 정도가 됐다고나 할까.

“푸. 안 가고 뭐 해?”

“…아, 어어, 가! 갈 거야.”

김푸름은 저를 챙기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다시 한 번 고신재를 흘끗 봤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 단 한 번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싱그럽게 웃던 남자는, 누가 시험 기간 아니랄까 봐 오늘따라 전에 본 적 없이 멍했다.

솔직히 푸름은 그 모습을 보고 좀 반성했다.

……다이아 수저도 저렇게 진 빠지게 공부하고 오는데.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

김푸름은 혼자 크으으 하고 고개를 저으며 얼른 교양 강의실로 발을 옮겼다.

한편, 고신재는 김푸름의 그런 찬사와는 달리 꽤 싱숭생숭한 상태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몇 번 봤던 ‘이참에 고백해서 과수석 멘탈 박살’을 실시간으로 겪는 중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 씨. 어째 중간고사 안 보는 강의가 딱 하나뿐이냐. 죽겠다 진짜.”

길게 기지개를 켜자 품이 넉넉한 셔츠가 쭉 늘어나며 마르고 창백한 팔뚝이 도드라졌다. 고신재의 시선은 그 팔뚝과 이어진 뼈대가 도드라지는 손목으로, 하얗고 긴 이파리같은 손가락으로 따라 움직였다.

파란 힘줄이 비치는 혈색 없는 피부는 오늘따라 유독 얇고 약해 보였다.

“맞다. 고신재.”

시간표를 엉망진창으로 하면서까지 접점을 늘린 덕에 어느새 백한빈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된 건 여러모로 잘된 일이고, 후회도 없다.

……하지만.

「-좋아해.」

「정말, 좋아해.」

「…왜 좋아, 라는 말보다는 어떻게 안 좋아해 싶다고나 할까.」

저 톡톡 튀는 목소리가 이렇게 심란할 정도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날에는, 조금은 숨을 고를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기도 하다.

고신재는 기지개를 켜다가 퍼뜩 고개를 돌려 저를 부르는 걸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신재야.”

처음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이 사근사근해진 한빈이다.

하지만 특유의 저 담백하다 못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퉁명스러울 정도로 무뚝뚝한 말투는 변함이 없다.

고신재는 저 시큰둥한 목소리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덜덜 떨리던 순간을 바로 조금 전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잠시 덮어두고 시험공부에 집중하려고 해도, 자꾸 저 담담한 목소리에 넘칠 듯한 감정이 가득 차서 출렁이던 순간이 자꾸 삐죽 머리를 들어서 덩달아 그것에 휩쓸린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큼직한 뿔테안경 너머의 뾰족한 눈에는 약간의 피로가 걸려 있다.

하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눈가가 조금 젖어있는 것도 같다. 고신재는 그 여린 피부를 훑듯이 살피며 뒤늦게 느릿느릿 대답했다.

“…어.”

“뭐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공부할 거 많아? 무용과는 전공 거의 실기 아냐?”

“응. 이번에는 전공 중간고사는 따로 없어.”

“아. 완전 좋겠다. 난 이번에 전선 하나 빼고 다 시험 보는데. 그나마 없는 것도 리포트 제출이고.”

확실히 이번 학기 중간고사는 운 좋게 지필고사가 그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말 내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따라온 질문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심지어 답을 알고 있는 유일한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도 전혀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넌 교양 공부 다 했어? 완전 여유롭네.”

“뭐. 그냥.”

한빈의 말에 뒤늦게 너덜너널한 인쇄물 위로 시선을 옮겨보지만 사실 지금 그가 입을 열어 묻고 싶은 건 따로 있다.

꿈에 나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나와서, 어떤데?

고신재는 괜히 볼펜으로 교양 인쇄물 위에 끄적끄적 공부하는 척 줄을 치면서 묘하게 일렁이는 속을 달랬다.

그는 온종일 이 상태다.

백한빈 혹은 하마와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떨림 가득한 고백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이렇게 마주 보면 끝까지 대답을 듣지 못한 문장을 묻고 싶어 입이 바짝바짝 탄다.

“신재야. 나 이따 한… 4시쯤 전공 시험 끝나는데. 같이 중도에서 시험공부 할래?”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명확하다.

백한빈에게도, 하마에게도 하지 못할 질문이 하나씩 더 쌓일수록 평평한 일직선일 줄 알았던 길이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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