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18화 (18/65)

18

하마

있잖아 혹시

이따 밤에 접속 가능해? 오후 3:52

몇 시? 오후 3:52

하마

10시? 11시? 너 편한 시간!! 오후 3:53

그래. 이따 봐. 오후 3:53

백한빈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훨씬 더 많은 사람이다.

그건 굳이 백한빈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소위 골골대며 살아서가 아니다.

한빈은 신혼 초 혼자는 외로울테니 딸이든 아들이든 둘을 키우고 싶다고 내심 생각했던 제 부모님을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파로 선회하게 할 정도로 애초부터 예민한 인간이었다.

등이 바닥에 닿기만 하면 자지러지게 울며 발악하는 어린 백한빈에게는 소위 육아 선배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100일의 기적 따위 없었다.

백한빈의 부모는 첫돌이 오기 전까지 밤낮으로 예민한 등짝 센서를 자랑하는 작고 어린 아들을 두고 밤마다 잠을 못 자 피골이 상접한 채 부부상담까지 다니기까지 했었다.

좀 자라고 나서 잠자리는 혼자 씩씩하게 보내게 됐더라도 다른 건 여전했다.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그건 별로야.

아무리 몸이 약하다고 한들 버릇없이 자란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도, 어떤 훈육으로도 변하지 않았던 건 백한빈의 칼 같은 호불호였다.

어릴 적 죽어도 채소를 안 먹길래 편식을 고쳐보겠다고 “너 그러면 밥 먹지 마!” 했다가 그 어린 꼬마가 정말로 곡기를 끊고 악착같이 버티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픽 쓰러지는 통에 온 집안이 눈물 바람이 됐던 건 백 씨 집안의 전설처럼 남았다.

쪼끄마한 게 한 번 아니라고 마음먹은 건 죽어도 안 했고, 작고 비리비리할지언정 누구에게 지고 오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게 예민하디 예민한 백한빈 역시 좋아하는 게 있었다.

세상천지가 싫어하는 것투성이인 만큼 몇 안 되는 좋아하는 것에 유독 헌신적이기까지 했다.

가나다라123은, 그런 백한빈이 좋아하게 된 첫 번째 사람이다.

“후우우우.”

그 짝사랑이자 첫사랑 앞에서 무던한 게 가장 큰 장점이던 백한빈의 일상은 이미 실금이 잔뜩 생긴 지 오래다.

아니, 실금만 갔을까.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까지 한다.

「그 사람 정말 좋아하는 건 맞긴 해?」

「사이버 연애까지는 그렇다고 쳐. 그런데 5년을 있지도 않은 동생이랑 개 핑계 대면서 말 한마디도 안 붙여본 사이는…, 하하, 진지하지 못해도 좀 정도가 지나친데.」

이건 로또를 사는 심리와 비슷했다.

사지 않으면 당첨 확률이 완전히 제로인 로또를, 그래봤자 0.000……의 1퍼센트의 확률만 보고 사는 이유와 다를 바 없다.

물론, 토요일에 역시나 꽝인 결과를 보고 ‘에이, 어떻게 매번 사는데 5등도 안 되냐? 하고 작은 종잇조각을 몇 갈래로 찢으면 그만인 것과, 이 도박 아닌 도박이 실패했을 때 꽤 적잖게 속이 쓰릴 백한빈의 입장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포기가 안 되는 게 도박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바보 같은 짝사랑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장난처럼 던진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인 확률을 무시하면 그만인데 혹시 모르잖아, 하면서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입을 열어 말을 거는 게 이 짝사랑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바보 같은 가능성을 말이다.

[온라인 1 ? 가나다라123]

백한빈은 모니터 위에 한참 전부터 떠올라있던 성의 없는 닉네임을 심각한 표정으로 노려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먼저 말을 걸면 어떡하나 고민했던 건 괜한 일이었다.

무심한 짝사랑 상대는 저보다 늦게 접속한 이후로도 먼저 인사 한마디 없었다.

“…후우우, 나한테 관심도 없는 사람한테 이깟 게 뭐라고. 그냥 해. 해보자고.”

꽤 힘이 들어간 중얼거림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말을 실행으로 옮길 듯 호기로웠다. 물론, 여느 사람이 그렇듯 백한빈 역시 말과 행동은 달랐다.

헤드셋을 낀 채 그대로 굳어 어깨까지 움츠린 채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전부였으니.

[물먹는하마 : 안녕]

손도 떨고, 다리도 떨면서 바짝 얼어 던진 인사에 가나는 한발 늦게 대답했다.

-늦었네. 접속한 지는 한참 됐는데 말이 없길래 바쁘나 했는데.

한글에는 이렇게 할 말이 없을 때 가장 쉽고, 빠르고, 만만하게 칠 수 있는 마법의 자음이 있다.

[물먹는하마 : ㅋㅋㅋㅋㅋㅋ]

백한빈은 웃음기라고는 싹 사라진 창백하다 못해 초췌한 얼굴로 키읔을 줄지어 쳤다.

평소에도 떠드는 건 백한빈이고 주로 대답해주는 쪽이 가나였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저 느긋한 침묵이 속상한 건지 모를 일이다.

헤드셋 너머로 간간히 들리는 숨소리에 솜털까지 곤두설 정도로 신경을 집중하던 한빈은, 이내 긴장으로 저릿저릿한 손가락을 움직였다.

[물먹는하마 : 가나야]

[물먹는하마 : 바빠??]

-아니.

아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떠냐고! 쟤는 내가 이러는 거 상상도 못 하는데. 멍청하게. 백한빈은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탓했을지 모를 스스로를 욕했다.

[물먹는하마 : 엉ㅋㅋ 다른게 아니고]

[물먹는하마 : 내가 마이크를 샀거든?]

-마이크?

[물먹는하마 : 아니 정확히는 마이크 있는 헤드셋]

가나가 대답 없이 가만히 있던 건 그래봤자 고작 몇 초였을 거다.

하지만 그 순간 TV에서 연예인들이 소위 사운드가 비는 것을 왜 두려워하는지 뼈저리게 알게 된 한빈은 그 몇 초간 애꿎은 입술만 얼얼할 만큼 세게 깨물었다.

-……웬일이야. 마이크 써도 되는 건가. 동생들 때문에 힘들다면서. 요새 개는 덜 짖어?

이 순간 한빈은 제가 거짓말 한 것마다 유독 힘을 주어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게 제 죄책감 때문이라 생각하며 긴장으로 마디마디가 저린 손가락을 움직였다.

[물먹는하마 : 그냥 써보려고]

[물먹는하마 : 나도 답답해서ㅋㅋㅋ 잠만]

애초에 긴 변명은 포기했다.

직접 말을 걸 생각만 해도 떨려 죽겠는데,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덧붙일 엄두조차 안 난다. 백한빈은 식은땀까지 난 손바닥을 서로 비비고 문지르며 다시 한 번 짧게 심호흡했다.

최소한의 것.

정말 좋아한다면 해야 하는 최소한의 진지함. 백한빈은 고신재보다도 저 스스로에게 그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건 상대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어서만은 아니다. 어쩌면 이건 조금씩 조금씩 흘러넘치기 시작한 마음을 달래려는 본능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딸깍.

5년 만에 해제하는 음소거는 고작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됐다.

한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아. 크흠, 흠.

-…….

-안녕. 드…, 들, 려? 아 이거 되게 어색하네. 하…, 하하. 어, ……가, 가나, 야? 하핫….

-…….

분명, 정말로 많이 준비한 첫인사였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첫인사 정도는 매끄럽게 할 줄 알았다. 그래 봤자 안녕, 하는 인사인데 대단할 거 없다고 세뇌도 몇 번이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없는 시뮬레이션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나 열심히 혼자 중얼중얼 준비했건만 성대를 거쳐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닉네임을 하마가 아니라 염소로 바꿔야 할 판인 바보 같은 문장들뿐이다.

사실 제 첫인사에 저 다정한 남자가 무슨 대답을 할지 상상하고 또 상상한 가정 중에서 가장 최악은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평소의 상냥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제가 아무리 끔찍할 만큼 멍청하게 굴어도 헛웃음 치는 것 이상으로 곧장 티를 낼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나쁜 게 있었다.

“망했다. 망했다. 망했어. 완전 반응 조졌네. 아, 진짜!”

잠시 마이크를 음소거하고 방언이라도 하듯이 중얼거림을 토해내는 백한빈은 그대로 곧장 기절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만큼 퀭하게 질렸다.

아무리 매일같이 떠들었다고 한들 처음 마이크를 켜면 잠시 어색하기 마련이라고 스스로를 달랠 여유는 없었다.

그럴 느긋함이 있었다면 온라인 속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했을 때부터 넉살 좋게 말을 건넬 수 있었을 거다.

채팅은 느려도 대답은 늘 재깍 해주던 가나다라123이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제가 마이크를 켜자 말을 하지 않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귀의 헤드셋이 고요하기만 하다.

목소리 듣기만 해도 찌질함이 전해지나?

이런 거랑 내가 놀았나 싶어서 할 말이 안 나올 지경인가? 현타 세게 왔나?

백한빈은 이미 되는대로 살 것을 괜히 욕심부렸나 싶어졌다. 아니, 그 전에 몇 번이고 연습했던 것처럼 인사하지 못한 제 한심함이 더 싫다.

안 되겠다. 그냥 컴퓨터 끄자.

점점 최악의 가정으로 치닫던 한빈의 생각은 이내 컴퓨터 본체로 무작정 손을 움직이게까지 했다.

그때였다.

-……5년 만에 처음 이야기하네, 하마.

장담컨대 평소보다 낮은 저 목소리는 꿈에 나올 거다.

어떻게 편집될지는 모르지만, 저도 모르게 몸이 배배꼬이는 저건 무의식의 망상 대잔치에 안 나오고는 못 배긴다.

백한빈은 저도 모르게 헛숨까지 들이켜며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집에 혼자 있을 때 종종 켤까 싶어서…. 화, 확실히 마이크 있는 게 편하지?

-나보고 티어 올리고 싶으면 마이크 많이 쓰라고 했던 거 너야.

-어…, 그랬나.

-그랬지. 몇 번이나.

조곤조곤 말을 받던 가나다라123의 대답에 옅은 한숨이 섞여 나왔다.

온 신경이 상대의 목소리에만 집중된 한빈은 평소 같았으면 별생각도 하지 않았을 그 한숨을 두고 잠시나마 온갖 상상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저만치 앞서간다.

-그만 좀 떨어. 바보야.

고작 마이크만 켜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상대에게 보이지 않을 흉한 제 얼굴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헤드셋 너머의 남자가 한 말이 느리게 머리에 입력되고 나자 눈이 시릴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진 한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러 가리고는 웅얼웅얼 대답했다.

-……나 많이 떨어?

-나랑 이야기하는 게 뭐라고 그렇게 떨어.

-아니…. 그게, 이제까지 채팅으로만 말하다가 마이크 켜니까 조, 조금 긴장되기도 하고….

-안 잡아먹어. 쉬엄쉬엄 이야기해.

-……으응.

-게임 한 판 할래?

-으, 으응!

왜 꼭 그렇게 바보같이 말하는 건데!

백한빈은 제가 입 밖으로 내뱉은 덜떨어진 대답을 믿기가 싫어서 거의 몸서리를 쳤다.

채팅도, 하다못해 꿈도 아닌 상대와 온전한 제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손이 떨린다. 장담컨대 이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패작이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뭐라도 하면서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으면 이 덜덜덜 떨리는 속을 달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게임을 켜기 전에 미리 확인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그…, 흠흠. 가나 님.

-네, 하마 님.

미쳤다. ‘하마 님’ 이래. 돌았다. 이거 진짜 꿈 아닐까.

백한빈은 순간 신을 찾으며 들썩이는 가슴께를 꽉 누르기까지 하며 말을 이어갔다.

-내 목소리 너무 안 크지는… 않아? 혹시 듣기 불편하다거나 하면.

-전혀 안 불편해.

입술을 열고 혀를 움직이고 성대를 써서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삐걱대는 목소리로 불렀는데도 재깍, 또 상냥하게 대답하는 남자 앞에서 백한빈은 마이크에 잡힐 정도로 숨을 크게 컥컥댔다.

아! 씨이! 쪽팔린 짓은 다 하고 있어, 진짜!

한빈은 게임을 켜면서 잠시 까맣게 된 화면 위로 비친 울긋불긋한 저 스스로의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욕을 삼켰다.

물론, 그마저도 마지막 한 줌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거였다.

-하마.

-으, 으응.

-정말 지금 딱 듣기 좋으니까, 그대로 해. 절대 마이크 끄지 말고. 소리 줄이지도 말고.

-…….

-듣고 있어?

쿵,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어, 어어, 그, 어…. 잠깐만! 나 잠깐 물 좀 떠올게. 화장실도 다녀오고.

‘그래, 그럼.’ 하고 대답하는 나직한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여유조차 없었다.

헤드셋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내던진 채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백한빈은, 그 순간 제힘을 못 이기고 크게 휘청하며 컴퓨터 의자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우당탕탕 크게 난 소리만큼 요란한 착지였다.

“아, 씨이…. 아야야….”

그렇지 않아도 살짝만 부딪쳐도 쉽게 멍이 드는 한빈은, 넘어지며 책상 모서리에 세게 찧은 허벅지를 급히 문지르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심상찮은 알싸함으로 보아 분명 퍽 끔찍한 모양새의 훈장이 남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멍이 들 게 분명한 허벅지를 확인하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반팔 아래로 보이는 팔뚝 위로 살결을 따라 얇디얇은 피부가 오돌토돌하게 곤두서있는 거였다.

쪽팔려 죽겠어, 진짜.

드러난 팔을 황급히 쓸어내리는 한빈의 손이 이제는 감출 수도 없이 떨렸다.

뭐 하나 금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하게 넘어지기까지 했는데 그 통증보다도 등줄기를 타고 흐른 전기가 더 찌릿찌릿했다.

“…우와….”

스물다섯 살의 첫사랑치고는 너무 호되다.

상대에게는 별거 아닐 인사나 마찬가지인 이야길 조금 나눴을 뿐인데 이 모양 이 꼴이라니.

백한빈은 제가 침대 위에 내던져둔 휴대폰을 갈 곳 없는 감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다 머잖아 그걸 세게 움켜쥐었다.

스크롤이 몇 번 내려가지 않는 단출한 연락처 안에서 고 씨 성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머뭇거림은 짧았다.

단정한 이름을 꾹 힘주어 누르자, 상대는 신호음이 네 번에서 다섯 번으로 넘어가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조금 전 대화한 상대와 쏙 빼닮은 고신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유독 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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