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람으로 꽉 찬 무대 위에 오를 때도 심장이 뛰어본 적 없고, 공연 중 무대 뒤에서 건물이 무너질 듯 커다란 굉음이 나도 눈 하나 깜짝한 적 없는 고신재는 저 작은 입에서 웅얼웅얼 흘러나온 문장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5년 동안…… 딱히 그럴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직접 말도 못 붙일 거짓말이 뭔데?
고신재는 몇 초간 그의 상상력으로 할 수 있는 가정을 모두 떠올렸다.
하지만 매일같이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고 떠들던 제 친구가 저렇게나 창백한 얼굴로 끙끙 앓을만한 거짓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거짓말?”
“…….”
“응?”
“나 걔한테 동생 있다고 했어. …그것도 둘이나.”
……너 동생 없어?
순간 고신재가 제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건 거의 초인적인 일이었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우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쉰 백한빈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지 오래인 제 칵테일을 그제야 처음으로 한 모금 입에 담았다.
“동생들 앞에서 게임 하면서 떠드는 거 민망해서 마이크 못 쓴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태세 전환해.”
“…….”
“맞다. 개도 키운다고 했다.”
“…동물 안 키워?”
“아빠가 털 알러지가 있어서 못…, 왜, 나 뭐 키우는 줄 알았어? 개 키우는 건 푸름이고.”
한빈은 다시 한 번 연거푸 한숨을 내쉰 다음 칵테일을 꿀꺽꿀꺽 삼켰다.
사실 고신재가 이 순간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누가 술을 그렇게 마시냐며 백한빈을 말렸을 거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백한빈이 이전에 오래 아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알게 모르게 그의 작은 행동에 신경이 쓰인 지 오래였다.
과제 때문에 밤을 샜다고 하면 저절로 쯧, 하고 혓소리가 났고, 저 마른 어깨에 이것저것 별 쓸데없는 것까지 다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신경 쓰여서 틈만 나면 무거운 보조가방을 빼앗아 드는 건 일과가 다 됐다.
하다못해 찬물을 곧장 마시는 것까지 저거 저래도 되나 싶은 생각에 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데 오죽할까.
하지만 지금, 고신재 그의 머릿속을 가득 찬 문장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김푸름이고 뭐고 그게 내 알 바야!
5년을 알고 지내면서 마이크를 켜는 쪽으로 화제가 빠질 때마다 빌어먹을 개새끼 핑계를 몇 번이나 댔었나?
심지어 가끔은 동생이 컴퓨터 써야 한다면서 게임에서 나가기까지 했었는데.
그런데 그게 다 있지도 않은 거였다고?
5년 동안, 시작부터 지금까지?
“…아. 진짜 미치겠다….”
서글서글하게 휜 눈은 얼핏 보면 사람 좋게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번에 칵테일의 절반을 해치우고 테이블 위로 머리를 푹 처박은 백한빈의 동그란 뒤통수를 따갑게 내려다보고 있다.
백한빈이 있지도 않은 개나 동생들 핑계를 대면서 게임이나 채팅 프로그램에서 나갔을 때는 대체로 컨디션이 안 좋았을 때라는 건 꽤 나중에 알게 될 얘기다.
지금 그가 가장 궁금한 건 단 하나다.
-대체 왜?
“이건 짚고 넘어가자. 백한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지금 고신재는 실연한 친구를 달래주는 다정하디 다정한 남자처럼 보일 거다.
아니, 사실은 누군가의 낭만적인 상상을 자극하기에도 부족함 없기까지 했다.
참 예쁜 착각이다.
“그 사람 정말 좋아하는 건 맞긴 해?”
“…어?”
“나는 내 목소리만 듣고도 쩔쩔매길래 어지간히 고생 중이구나 싶어서 내 나름대로 위험감수 했던 건데. 들으면 들을수록 괜한 짓을 했나 싶은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하거든.”
“…….”
“사이버 연애까지는 그렇다고 쳐. 그런데 5년을 있지도 않은 동생이랑 개 핑계 대면서 말 한마디도 안 붙여본 사이는…, 하하, 진지하지 못해도 좀 정도가 지나친데.”
고신재는 제가 은은한 미소까지 건 채로 나직하게 이어가는 말들이 꽃망울 밑에 숨어든 유독 뾰족한 가시처럼 날섰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조곤조곤한 포장을 보기 좋게 둘러쌌을 뿐, 백한빈이 제가 쏟아낸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으리란 생각도 안 했다.
솔직히 조금 따끔했으면 싶기도 했다.
정말 아주 조금은, 그러라고 한 말 맞다.
있지도 않은 동생들과 개의 안부를 물었던 5년이 기가 차서 그랬다.
분명 그랬다. 그랬는데….
“…….”
“…….”
말하자마자 후회하는 건 그의 일상에서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돌겠네.
쟤는 왜 저렇게 삐쩍 말라서는 무슨 말 한마디를 못 하게 해!
왜 또 어깨는 축 처져.
네가 뭘 아느냐고 짜증이라도 내야지.
고신재는 작게 혀를 차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커다란 뿔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표정이 어찌나 속을 거슬리게 하는지.
제 뾰족한 말에 송곳에 찔린 듯한 눈을 한 백한빈을 보고 있노라면 혀가 저절로 말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익숙하지 않은 자책도 뒤따랐다.
뻔뻔하기는. 지금 내가 백한빈이 몇 개 솔직히 말 안 했다고 울컥할 땐가.
정작 나도….
고신재는 제 초조함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나긋하게, 하지만 조금은 급하게 입을 뗐다.
정확히는, 떼려고 했다.
“…한빈아.”
“-좋아해.”
멋대로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속삭임이 이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여느 때처럼 제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채로 백한빈의 대답을 끌어낼 작정이었다.
“정말, 좋아해. 그런데. 이상하잖아. 듣기 싫잖아. 그래서 그랬어.”
“…….”
“어차피 게임 하루 이틀 같이 하고 모르는 사이 되는 게 얼마나 흔한데. 하루 같이하고 다음 날에 들어와 보면 친구 삭제되어 있을 때도 있다고.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어떡해.”
고신재의 25년 인생에서 타인에게 받는 고백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기억이 흐리게 존재하는 7살 때부터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또래들이 성별을 불문하고 가득했고, 각종 기념일에 대한 개념이 생겼을 때부터 먹지도 않는 다디단 간식들을 수거하는 게 일상이었다.
어느 순간 좋아한다는 말은 심심하면 듣는 ‘만나는 사람 있어? 좋아해, 사귀자.’의 중간 단계 정도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거절하는 것도 쉬웠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입시를 핑계댔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거창한 표현으로 포장만 바꾸면 됐다.
백한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사실 제 오랜 친구의 마음은 그 어떤 이제껏 전해 들었던 그 어떤 고백보다 답이 명쾌했다. 어떤 핑계나 이유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안 되는 이야기.
애초에 이 모든 건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살며 들었던 그 어떤 고백보다 볼품없고 자신 없는 문장들 앞에서 왜 제 목이 콱 막힌 것 같을까.
고신재는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어울리지도 않게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뭐가…, 이상하고. 뭐가 듣기 싫다는 건데?”
“…너 누구 놀려?”
백한빈의 저 목소리는 이제껏 고신재 그가 살며 들었던 그 누구의 것과도 비슷한 구석이 없다.
학기 초, 술에 취한 사람들로 북적였던 술집에서도 백한빈의 주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저 특이한 음역대 덕분이었다.
유리병 안에 자잘한 자갈을 가득 넣은 다음 차가운 쇠막대로 휘저어 내는 소리처럼 캉, 캉 귀에 곧장 꽂히는 것 같기도 하고, 빈틈없이 꽝꽝 얼어붙은 각얼음 위에 뜨거운 물을 끼얹을 때 솨아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는 수증기마냥 들끓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
닮은 것 하나 없기에 어디서나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것.
백한빈이 말한 ‘이상하고 듣기 싫은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 같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백한빈 너는 내 목소리가 그 친구랑 닮아서 눈도 못 마주쳤다면서. 너는 네 목소리 때문에 있지도 않은 동생들이랑 개를 만들어서 몇 년이나 둘러댔다고, 지금?”
“다, 다들 시끄럽다고 그러니까. 솔직히 호감형은 아니고.”
“다들, 누가.”
“…….”
“걔도 그러든?”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튀어나온 뾰족한 물음에 그새 도로 움츠러든 백한빈이 큼직한 안경알 너머 까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게 보인다.
…미칠 지경이다, 진짜.
고신재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하듯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웃자, 웃자. 표정 풀자.
그 세뇌는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단정하고 부드러운 이목구비가 유독 느슨하게 휘는 순간 저만치서 이쪽을 흘끗흘끗 구경하던 몇 명이 슬쩍 서로 시선을 교환할 정도로 주변이 화사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특유의 예쁜 표정은 고신재가 수년이나 노력해서 얻은 산물일 뿐이다.
실상은, 이게 다다.
“한빈아?”
“뭐, 뭐어.”
좋게 말하자.
…좋게….
“너야말로 이번 주말까지 채팅 졸업한 거 인증해서 보내.”
“……뭐?”
“마이크 켠 화면을 찍든, 동영상을 찍든.”
“야. 그런 걸 어떻게 인증해!”
“그럼 대체 언제까지 키보드만 두들기려고 했는데. 남자 좋아하는 거 걔가 처음이라며. 채팅 졸업할 각오조차 못 한 채로 발 딛기엔 너무 가시밭길이라 생각하지 않아?”
옆으로 비스듬히 비뚤어진 안경을 바로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고 있는 한빈의 얼굴이 유독 창백하게 질려 보였다.
이럴 때면 참 신기했다.
제가 누군지도 모를 게임 속 사람들에게 닭대가리, 붕어대가리, 소대가리 등 온갖 동물의 지능으로 빗대질 때마다 동물을 대신해 전쟁의 서막을 선포하고 종족에 걸맞는 아가리 파이터의 기질을 보여주었던 하마다.
그런데, 그럴 정도로 싸움꾼이었던 하마가 ‘가나다라123’만 나오면 저렇게 약점이라도 쥐어 잡힌 듯 쩔쩔맨다.
이쯤 되면 정말 궁금해진다.
대체 내 뭐가, 아니, 가나다라123의 무엇에 그렇게 꽂힌 걸까.
저렇게 예민하고 경계 많은 녀석이 대체 뭐에 어떻게.
고신재는 그조차도 잠시 잊고 있던 제 몫의 칵테일을 간신히 입술을 적시는 정도로 머금은 다음, 고집스레 침묵하는 한빈에게 한숨 같은 질문을 이어 던졌다.
“너 걔가 엄청 못생겼으면 어떡할래.”
끔찍하게 유치한 물음이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많디많은 질문 중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건 소름돋게 유치한 것들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몇 달 전에 너 무슨 걸그룹에 꽂혀서 걔네 노래만 맨날 듣는다면서. 그건 뭐였어?’ 하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아니나다를까 백한빈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시종일관 얼어있던 눈썹을 아래로 휘면서 픽, 옅은 웃음마저 흘렸다.
……웃네.
고신재는 평소에도 보기 드문 그 긴장 풀린 미소 앞에서 부러 더더욱 한심한 질문들을 이어갔다.
“응? 목소리만 좋은 거면?”
“애초에 생긴 거에 반한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리고, 야. 너 걔 목소리랑 네 목소리랑 비슷한 거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그러니까 물어볼 수 있는 거지. 실제로 만나보니까 하는 행동마다 깨고, 같이 다니기 창피할 정도여도 그 게임친구가 좋아? 아, 키도 작고.”
“키가 무슨 상관이냐고요. 갑자기 왜 이래.”
사람이라는 건 참 간사하다.
처음에는 백한빈이 기가 죽어 있는 걸 좀 환기해보려고 시작한 질문이었는데, 슬슬 대답을 듣기 시작하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같은 남자끼리 만나는 건 키는 전혀 안 따지는 건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니라고?’였다.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툭 떠오른 문장에 왠지 저 자신에게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플러스면 어떻고 마이너스면 또 어떤데.
물론 그 속을 알 리 없는 한빈은 반쯤 남은 칵테일을 다시 한 번 홀짝이곤 알콜에 살짝 뭉개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또 내가 누구 외모 따질 처지냐? 별말을 다 해 진짜.”
그리고 그건, 오늘 밤 뾰족한 문장은 입에 담았을지언정 최소한 서글서글한 미소는 단 한 번 잃은 적 없던 고신재의 예쁜 눈썹 하나를 휙 치켜뜨게 하기 충분한 내용이었다.
“백한빈 네가 왜?”
“왜는 왜야.”
“아니. 너 꽤-”
…….
고신재는 슬슬 취기가 오르는지 실핏줄이 살짝 비칠 정도로 연한 뺨 위로 붉은 기가 아른대기 시작한 백한빈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그러자 예쁜 말 한마디 하는 걸 본 적 없는 작은 입술이 삐죽이며 열렸다.
“나 꽤, 뭐. 인마.”
“……됐어. 유치한 소리 그만하려고.”
“아주 잘나셨어, 그냥.”
꿀꺽, 꿀꺽, 꿀꺽.
마른 목울대가 세 번 크게 움직이고 나자 남은 칵테일은 남김없이 비워졌다.
고신재는 이 순간에도 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몸도 약한 애가 저렇게 술 마셔도 돼?’라는 것이 슬슬 어이없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제 생각보다도 더욱 예상치 못한 말을 이어가는 건 백한빈이었다.
“키는 나도 안 커서 너무 큰 것보다는 작은 게 차라리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
“뭐?”
“네가 방금 물어봤잖아. ‘걔’가 목소리만 좋고, 하는 행동마다 깨고, 같이 다니기 창피하고 거기에 키까지 작으면 어떠냐고.”
취했나.
고신재는 살짝 뺨이 붉어졌을 뿐이지 헤실헤실 표정이 풀리지도, 크게 들뜨지도 않은 백한빈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평소와 조금 다른 걸 찾자면 말이 조금 빨라지고, 또 많아졌다는 것 정도일까.
“…그럼 키가 많이 크면?”
“크면…, 우와. 좋겠다. 부럽다, 하는 거지 뭐.”
“…….”
“그리고 걘 하는 행동마다 깨고 그런 캐릭터는 아니야. 좀…… 컴맹이긴 해도, 뇌지컬은 된다고. 게임 피지컬이 안될 뿐이지.”
그게 비록 게임 속 컨트롤에 한정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살면서 ‘피지컬이 안 된다’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고신재는, 5년을 알고 지냈으면서도 처음 듣는 제 진솔한 평가에 왠지 목이 간지러웠다.
잠시 대답을 고민하고 있으려니 백한빈이 다시 픽, 스쳐 지나가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백한빈의 주사 아닌 주사를 하나 알았다.
그나마 잘 웃고, 솔직해진다.
잘된 일이었다.
“웃기지. 좋아한다면서 직접 말도 못 걸어놓고.”
“…….”
“엄청 착하고 다정하긴 해도…, 걘 사생활…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자기 얘기는 잘 안 하거든. 물어보는 것도 안 좋아하고.”
때로는 어떤 그럴듯한 추임새를 넣는 것보다도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낫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이 그때다.
그런데 왜 뭐라도 말하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덩달아 입이 탈까.
‘가나다라123’에 대한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백한빈을 흉내 내듯 제 잔의 술을 크게 한 모금 삼켰다. 하지만 백한빈의 취중진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 걔한테 사는 곳도 거짓말했네. 부산 산다고.”
그러고 보니 앞선 두 개가 워낙 커서 그건 기억도 못 했다.
고신재는 왠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한 번 삼키고는 이미 답을 알 것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건 왜?”
“뭐겠어. 만나자고 할까 봐 그랬지.”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역시나인 이유다.
사실 이건 굳이 따지자면 저건 지금의 고신재 그에게도 나쁠 게 없는 거짓말이기는 했다. 만나면 곤란한 건 고신재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백한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아! 근데 그건 걔도 좀 너무했어. 내가 예-전에 걔한테 어디 사는지 물어본 적 있었거든?”
“…응.”
“아니, 근데, 그거 물어보자마자 갑자기 무뚝뚝하게 ‘알아서 뭐하게’ 이거 툭 남기고 나가버리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내가 이름을 물어봤어, 주소를 물어봤어? 지역 정도는 그냥 궁금할 수도 있잖아.”
“…….”
“와. 그러고 나서 한 일주일 게임 안 들어왔나.”
내가 그랬다고? ……언제?
안… 그랬을 텐데.
고신재는 순간 뭐라 반응하는 것조차 잊고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서 제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스무 살에 처음으로 시작한 게임에서 온라인 속 낯선 사람이 제 실제 거주지를 물었다고 해석했던 순진무구한 5년 전을 일일이 기억하기엔, 아무래도 때가 좀 탔다.
“난 진짜 그때 이후로 걔한테 뭐 물어보는 거 무서워했는데. ……걔는 그거 기억도 못 하는지, 나한테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어디 사는지 물어보더라.”
“…….”
“그래서 나도 모르게 좀, 놀라서. 그냥 생각나는 거 가져다 댔어. 씨이, 이건 내 잘못만은 아니다. 진짜….”
입술을 작게 삐죽이며 원망 아닌 원망을 이어가던 백한빈은 이내 그만이 기억하는 옛 기억으로 빠져들었는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조용해졌다.
고신재는 그런 백한빈을 묘하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곁눈질했다.
창백한 뺨의 실핏줄이며 솜털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때문일까. 백한빈에게서는 샴푸 냄새인지, 섬유유연제 향인지 모를 옅은 라벤더 향이 났다.
그건 탁하고 나른한 웃음소리와 악기 연주가 섞여 들리는 이곳에서는 왠지 허리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약하고 또 여려서, 왠지 슬금슬금 이쪽으로 꽂히는 것 같은 낯선 이들의 시선에서 짝사랑을 고백하는 남자를 숨기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고신재는 그 기묘한 욕구를 누르며 간신히 침묵을 깼다.
“……되게 이상한 사람 좋아한다. 백한빈 너.”
끝이 뾰족한 한빈의 눈이 조금 동그랗게 커진 채로 느리게 깜박, 깜박했다.
“그런가?”
“그래.”
“그래도 좋은데 어떡해.”
나도 몰라. 고신재는 속으로 작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