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10화 (10/65)

10

“교양 세 개를 듣는데 그게 다 겹친다고? 지금 이거 말고 두 개가 또? 와. 맞춘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러냐.”

내 말이 그 말이야.

백한빈은 김푸름의 말에 대답 대신 까만 빨대의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저를 향해 살랑살랑 눈을 접어 웃던 매끈한 얼굴을 떠올렸다.

“야. 그냥 맘 편하게 생각해. 교양인데 뭐.”

“……찝찝해.”

“그야 그렇다만, 친구 하나 사귄다고 생각하면 되잖냐? 교양 혼자 듣는 거 심심하기도 하고.”

“같은 과도 아닌데 굳이.”

“같은 과 아니어도, 인마. 너 그 무용과랑 친해져서 손해 볼 건 없을걸.”

물론 그야 그렇다.

그 얼굴을 한 제 사랑 가나가 꿈에 뿅 나왔다는 기괴한 사실만 똑 떼어놓고 보면, 현실에서 듣는 사이버 러버의 목소리라 생각하고 귀 호강하면 그만이기는 하다.

하지만 뭔가 뒷골을 살살 잡아당긴다고나 할까.

아프지는 않은데, 머리카락을 무언가 하나씩 따끔따끔 뜯어내는 것 같은 묘한 불편함이 스멀스멀 끼친다.

난데없이 같은 교양을 세 개나 같이 듣게 된 무용과 고신재, 그 사람에게서 이상할 정도로 거슬리던 뾰족한 부분이 싹 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뭐랄까. 날선 칼날 끄트머리에 둥그런 유리돔을 씌운 듯한 느낌이다.

분명 뾰족한 뭔가가 있다는 게 보이는데, 알겠는데……. 직접 아프지는 않고, 오히려 처음에는 서늘했던 것이 목덜미에 계속 닿으며 미지근한 체온이 옮아가는 것처럼 거슬려 죽겠다.

그 무용과 사람- 아니 고신재가 저와 시간표를 맞출 일이 어디에 있나.

우연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일전에 카페에서 제 시간표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시선이 자꾸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좀 웃긴 게, 그 무용과 사람- 아니 고신재가 저와 시간표를 맞출 일이 뭐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백한빈은 머잖아 진짜 껄끄러운 부분을 한발 늦게 깨달았다.

“김푸, 방금 뭐랬냐.”

“엉?”

“‘손해 볼 건 없어’? 뭘. 뭐가 손해 볼 게 없는데. 푸. 너 그 사람 알아?”

김푸름은 백한빈이 대학에 입학해서 알게 된 사람 중 그저 동기가 아닌 친구의 이름을 붙어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사람이자 백한빈의 이런저런 사정에 대해서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한 동생을 뒀던 김푸름은 사람들에게 쉽사리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쉽사리 움츠러드는 백한빈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그 특유의 넉살로 먼저 다가갔다.

물론, 한빈은 인사이더 중 인사이더인 푸름의 그런 활발함을 처음에 꽤 벅차했더랬다.

하지만 뻣뻣한 백한빈을 꽤 눈꼴사납게 봤던 선배 몇이 억지로 술을 먹이고 기합을 줬던 어느 날, 늘 허허실실 웃던 사람 좋은 김푸름이 처음으로 선배들에게 벌컥 화를 내며 백한빈을 감싼 뒤로 학과 내에서 두 사람은 곰과 뼈다귀라는 별명까지 붙은 단짝이 됐다.

심지어는 휴학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하게 하며 이번에도 나란히 복학했다.

“-왜, 그 무용과 다이아몬드 수저잖냐. 엊그제 그 사람이랑 후문 카페도 같이 가서 놀 정도면 그래도 아예 안 맞는 건 아닌 것 같고.”

“내가 그 사람이랑 같이 카페 간 건 또 어떻게 아는데?”

아오, 이놈의 입.

푸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한빈을 보며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하여튼, 웬만한 것엔 관심도 없고 감정표현도 그리 또렷하지 않은 녀석이 다른 사람같았으면 대충 넘어갔을 문장을 짚어내는 것 하나는 귀신이라고 혀를 내두르면서다.

“김푸, 머리 굴러가는 소리 들린다. 어?”

“아니이. 그게, 그냥.”

“그냥, 뭐. 뭐. 뭐, 인마.”

“아, 아, 아아, 아파! 그니까 그게-!”

삐쩍 마른 것과는 별개로 꽤나 손이 매운 백한빈의 추궁에 에라, 모르겠다 싶은 이실직고가 이어졌다.

“……상호 선배가 물어보더라고!”

“상호? 뭐, 구상호?”

“어엉. 한빈이 네가 카페에서 무용과 다이아수저랑 놀던데,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아냐고…. 난 그냥 둘이 교양 같이 듣는다고만 했지.”

구상호.

한국대 사진과 4학년이자, 한빈이 신입생이던 때 어디 선배님께 고개만 까딱 인사하냐며 괜한 핑계를 잡아 지독히 괴롭혔던 딱 한 학번 위의 남자.

그는 단연 백한빈이 교내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간 중 하나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찌푸렸다가 괜히 자신 때문에 구상호에게 한참이나 시달렸을 것이 분명한 푸름이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슬슬 눈치를 보는 걸 깨닫고, 간신히 표정관리를 했다.

“됐어. 구상호 새끼 알 게 뭐야. 그런데 금도 아니고 다이아 수저는 또 뭐냐?”

“엉?”

“왜, 그…… 무용과, 고신재. 다이아 수저라며.”

“아, 아아! 야, 그 무용과, 아버지가 쓰리스타래!”

솔직히 백한빈은 김푸름이 반색하며 외친 문장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뭐.”

“야, 쓰리스타면 군대에서 신이야, 신! 산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긴다고! 아 정말 미필이랑 겸상 못 하겠네!”

“말 똑바로 하자. 미필이 아니라 면제.”

군복무는 아홉 살 때부터 먼 세상 이야기였던 백한빈에게 군에서 별 세 개를 단 장성같은 건 옷에 장식이 많은 아저씨에 불과하다.

결국 푸름은 쓰리스타의 위용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 대신 좀 더 현실적인 설명으로 물꼬를 돌렸다.

“…에휴. 뭐냐, 상호 선배가 호들갑 떤 건 무용과 걔 외가 때문일 걸.”

백한빈은 제 친구가 고신재를 자연스레 ‘무용과’라고 지칭하는 걸 들으며 순간 그 반듯하고 서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무리 꿈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사람을 가나 얼굴로 써먹을 수가 있지.

솔직히 저 스스로도 간이 부었다 싶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목소리를 슬쩍 낮춘 푸름의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그 무용과 사람 외가가 아토 화랑이래. 너 몰랐지?”

꿈벅, 꿈벅.

한빈의 눈이 크게 두 번 깜박였다. 그러고는 머잖아 제가 들은 걸 확인하려는 듯 얼떨떨한 되물음이 튀어나왔다.

“-아토 화랑? 그 아토?”

“어어. 걔네 외가가 거기 오너랜다. 괜히 구상호가 떠봤겠냐? 외할아버지는 화랑협회 회장까지 하고 어머니는 화랑 대표. 아니, 그냥 외가 전체가 싹 다 미술계 쪽이래. 완전 돌아버린 스펙.”

아토 화랑은 소위 국내 1세대 화랑 중 하나로 국내 현대 작가부터 손꼽히는 낙찰액을 자랑하는 국외 작가까지 모두 섭렵한 메이저 중 메이저 화랑이다.

그뿐일까.

서울 중심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오래된 화랑 건물을 가진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 새로 개장한 5층 높이의 갤러리까지 세운, 자본 하나만큼은 남 부러울 곳 없는 곳이다.

9할은 그림이 주가 되는 아토 화랑을 백한빈이 곧장 알아들은 건, 몇 달 전 아토에서 해외 유명 사진작가의 전시회를 한국 최초로 걸며 꽤 화제가 되어서다.

심지어 그 사진전을 보러 아토 화랑의 신축 갤러리로 푸름과 함께 가기도 했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푸름은 조금 얼빠진 얼굴을 한 제 친구를 향해 달래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운 좋게 강의 다 겹치기도 힘든데 친해져서 나쁠 건 없잖냐. 앞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앞일은 무슨. 됐어, 아. 하여간 난 그 무용과 찝찝해. 역시 목소리 빼곤….”

벌써부터 떠받들기라도 하라는 건지 뭔지. 얼굴의 반을 가릴 만큼 알이 커다란 뿔테안경 너머로도 훤히 보일 만큼 곧장 미간을 찌푸린 한빈의 입에서 부루퉁하게 이어지던 말이 중간에 어물어물 끊겼다.

물론 김푸름은 그걸 그냥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뭐? 목소리?”

“……별거 아냐, 됐어.”

“왜애? 그 사람 목소리가 뭐 어떤데.”

그렇지 않아도 얼굴 보기 민망해 죽겠는데 이래저래 제 전공과 완전히 떨어진 생활반경의 사람도 아니었다 생각하니 묘한 거리낌이 더욱 커진 탓일까.

한빈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속내에 혀를 차며 최대한 별 일 아니라는 듯 대꾸하려고 했다.

“아니. 그냥….”

“-안녕, 한빈아.”

……‘별거 아닌’ 그 목소리가 백한빈의 투정 아닌 투정을 자르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하, 하, 오, 오셨네요! 저번에 뵀었는데.”

“아, 네. 유민이랑 같이 과제 하시죠. 유민이는 뭐 프린트할 게 있다고 그것만 뽑아서 바로 온다고 했으니 곧 올 겁니다.”

차마 인사를 받지도 못한 채 쩍하니 굳은 친구를 대신해 허둥지둥 입을 연 김푸름의 표정은 어딜 봐도 ‘들었나?’ 하는 기색을 차마 다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고신재는 그런 그들을 향해, 정확히는 둘 중 입을 열지 않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해 그 단정한 눈매를 휘면서 말을 이어갔다.

“한빈아, 여기 자리 비었을까?”

뿔테 안경으로 표정을 감추고 대답 대신 고개만 크게 두 번 끄덕이는 부스스하고 동그란 머리를 바라보는 고신재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물론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또한, 인정한다.

백한빈이 찝찝하다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이다.

고신재는 그는 카페에서 엿본 백한빈의 시간표를 따라 막판 수강정정 열차를 탔다.

지금 이 사진 교양을 빼고는 어찌나 더러운 시간의 재미없는 강의뿐인지, 하나는 새로고침하며 기다릴 필요도 없이 자리가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 역시 어렵지 않게 빈자리를 주울 수 있었다.

덕분에 시간표가 어중간한 주5일이 되었지만 뭐 그 정도 투자쯤이야 할 셈이었다.

그래야 이제껏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5년 속의 정보 값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뭔지.

백한빈의 학과 선배가 저와 무슨 사이인지 묻고 다녔다는 것도 어이없는데 제가 쥐고 태어난 숟가락 품평회라.

심지어는 제 외가를 들먹이며 잘 지내보라는 소리를 지껄이는 저 덩치의 뒤통수를 후려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정말, 잘 참았다.

고신재는 작은 입을 힘주어 다문 채로 공연히 펼친 노트 위에 끄적끄적 볼펜을 낭비하는 한빈을 슬쩍 눈에 담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한빈아. 이거 교양 끝나고 다른 강의 있던가? 약속이나.”

“…없어.”

“그럼 같이 이번 주 과제 바로 찍을래. 카메라도 들고 왔는데.”

또 다시 크게 고개를 두 번 끄덕이는 백한빈의 귀가 유독 붉었다.

고신재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유심히 본 적 없던 타인의 작은 부분이 유독 작고 말랑말랑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제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문장을 회상했다.

그가 제 품평회를 듣고 순간 울컥한 제 속도, 손도 모두 붙잡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말 때문이었다.

「앞일은 무슨. 됐어, 아. 하여간 난 그 무용과 찝찝해. 역시 목소리 빼곤….」

5년을 듣고도 못 알아채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누구의 뭐가 그리 좋다는 거냐며 속으로 비꼬기도 했었다.

저를 바라보는 커다란 뿔테안경 너머의 시선이 단 한 줌 감정 없이 무심하기만 했으니까.

평소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털어 놓는 하마가 ‘야, 나 학교에 너랑 진짜 목소리 비슷한 애 있다.’ 같은 말조차 하지 않았으니 더욱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오후네요. 식사는 다들 잘 하셨어요?”

“예에.”

“그럼 출석부터 하고 시작합시다. 아, 다들 이번 주 과제 주제는 아시죠. ‘첫인상’. 인물 사진의 기본인 아웃포커싱을 이용해서….”

교수의 목소리가 유독 낭랑하게 귀에 꽂혔다.

강의 시간에 딱 맞춰 들어온 교수를 열렬하기까지 한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혹은 옆에 있는 제 시선을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백한빈 덕분에 구경은 쉬워졌다.

고신재는 작은 잔머리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이서 한빈의 옆모습을 훑듯이 눈에 담았다.

크기 자체는 조금 작긴 하지만 콧대 자체는 딱 보기 좋을 정도로 오뚝한 코는 그 끝이 세잎 클로버처럼 작고 동글동글하다. 얼굴의 반쯤 가린 커다란 뿔테 안경에 가려서 몰랐던 까만 속눈썹 역시 꽤 길다.

하지만 역시, 가장 시선을 잡아끄는 건 여전히 붉은 기가 가실 생각을 하지 않는 귀다.

빨갛게 피가 몰린 귀는 뺨과 눈가로 푸른 미세혈관마저 비치는 것 같은 파리한 안색 때문에 더욱 도드라진다.

귀도 작고, 코도 작고, 입도 작고.

고신재 그가 평균보다 훤칠한 체격인 탓도 있겠지만 그의 눈에 백한빈은 뭐든 다 작다.

“…….”

제 시선을 진작에 눈치챘으면서도 고집스레 이쪽을 곁눈질조차 하지 않던 한빈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가느다란 목이어서일까.

목젖의 움직임이 유독 생생히 보인다. 하얀 목에 점도 하나 있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순간 바짝 움츠린 쇄골이 확 두드러지기도 한다.

고신재는 그렇게 교양 강의 내내 끄적끄적 강의 필기 반, 백한빈의 옆모습 구경 반을 하며 꽤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대되는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답니다 >

햇빛이 따가운 아침이네요!! 무더운 날씨에 지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저는 오늘도 가능한 이따 저녁에 한 편 더 들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