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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은 괜찮아. 그런데 정말 이제는 괜찮냐고.
말해놓고 곧장 잊었던 변명을 상기하며 괜히 내리까는 목소리가 감기 환자처럼 들릴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고신재는 지금 그보다 더 신경 쓰고 싶은 게 따로 있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백한빈의 얼굴과 급하게 몰아서 치는 듯한 하마의 채팅이 함께 눈앞에서 깜박깜박했다.
[물먹는하마 : 엉]
[물먹는하마 : 긍데 어렸을때ㄴ 좀그랫는데 지금은많이괜찮음]
[물먹는하마 : 건강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모니터 위로 거의 도배 수준으로 빨라진 하마의 채팅이 이어졌다.
[물먹는하마 : ㅠ]
[물먹는하마 : 야]
[물먹는하마 : 야야아]
[물먹는하마 : 똑똒ㄱ.......]
입을 열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5년을 알고 지내면서 전혀 몰랐던 개인사를 알게 된 지금, 일부러 심술궂게 입을 다물려는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지, 혹 너무 섣부른 대답이 되지 않을지 머릿속에 꽉 차있는데, 상대가 저렇게 안달복달 부르니 더욱 입이 안 떨어졌다.
심지어 또다시 한참이나 뭔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더니 기껏 하는 말이 이런 거라면 더욱 그렇다.
[물먹는하마 : 나 손절하면 안된다야ㅠ...]
[물먹는하마 : 나 진짜!!!! 이제 건강한데]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하마 너 바보냐?
저도 모르게 너무 진심을 담아 던진 물음에 하마는 우는 모음으로 화면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아 왜’, ‘흑흑 가나님’ 같은 추임새도 끼어있다.
「…걔랑 나랑 벌써 5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이 정도면 진짜 긴 거 아니야? 맨날 톡도 하고, 컴퓨터만 켜면 이야기하는데. 5년이면, 진짜 긴 건데.」
그 술에 취한 쇳소리가 날이 갈수록 기억이 흐려져야 하는 게 정상이건만 왜 이렇게 더 뚜렷해지기만 하는지 모를 일이다.
5년. 5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그래, 맞는 말이다.
신재는 심란하기 짝이 없는 제 속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부러 내리깐 목소리로 이어 물었다.
-갑자기 웬 통곡이야.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아팠는데.
[물먹는하마 : 태어났을때부터 비실비실했어]
[물먹는하마 : 문제 발생한건 초등학생 때지만..고생쫌 했지 툭하면 기절하고 맨날 약먹고ㅋㅋ]
-그래서 군대 안 갔던 거야?
이건 고신재가 하마에 대해 유일하게 아는 개인사였다.
그가 입대 하며 동갑내기인 하마에게 너는 언제 가냐고 묻자, 하마는 한참을 망설이다 ‘사실 나 군면제야’ 했었다.
고신재는 그때도 이유를 묻지 않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왜? 어디 아파?’하고 물어봐야 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스무 살의 끄트머리를 지나 막 스물한 살이 되었던 고신재는 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때는 그 역시도 턱밑까지 차오른 물에 허덕이느라, 주변은커녕 제 발밑조차 내려다보기 두려워했었다.
온라인 오열을 마친 하마는 곧장 대답했다.
[물먹는하마 : 웅 그렇지]
-‘웅 그렇지’는 무슨. 뭐가 그렇게 해맑아.
[물먹는하마 : ㅋㅋㅋㅋ여튼 이젠 적당히 정기검진 받고 잘사는중]
다행이다 싶기는 하다. 그렇긴 한데….
고신재는 태평하기 짝이 없는 하마의 대답 앞에서 저도 모르게 상대가 제가 종일 걷어내야겠다 생각했던 백한빈이니 뭐니 하는 건 모두 잊고, 그저 ‘가나다라123’의 목소리로 짐짓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하마.
[물먹는하마 : ㅇㅇ?]
-너 그래도 이제 규칙적으로 생활해.
[물먹는하마 : .......넴?]
-제때 제대로 자고, 일어나고 그래. 나한테 길게 잔소리 할 정도면 내가 말 안 해도 아는 일이겠지만 밤낮 엉망이잖아. 자다가 새벽에 깨서 봐도 그대로 게임하고 있던 거 한두 번 아니고.
[물먹는하마 : 넴..]
-게다가 너도 개강해서….
자각도 없이 줄줄 말을 늘어놓던 신재는, 이내 제가 마지막으로 덧붙이려고 했던 문장 앞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육체적인 컨디션이 바로 그 다음 날 표현하는 몸짓에 직결되는 활동을 시작한 게 7살 때다. 거기에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집안 환경까지.
고신재는 좋게 말하면 시계추 같고 나쁘게 말하면 예외라고는 없는 반듯한 하루일과가 숨 쉬는 것보다 자연스럽다.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형과 생활한 보통의 20대 중반 대학생들이 흔하게 하는 밤샘 유흥 같은 건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그의 일상에서 유일한 최초의 일탈 아닌 일탈이 하마와 함께 시작한 온라인 게임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먹는하마 : 개강해서??]
-…개강…해서 바쁠 텐데, 오늘도 일찍 자라고.
‘신경 쓰지 말자, 모르는 척하자, 깔끔하게 없던 일로 하자’.
온종일 휴대폰에 신경이 집중된 채로 보낸 뒤 신경질적으로 내린 결론이 무색하게, 저절로 열린 입이 쏟아낸 문장들은 정확히 오늘 하루의 결심과는 정반대의 궤도를 타고 있다.
[물먹는하마 : 가나님 그래도 과제 다할때까진 같이 있음 안돼ㅜ?]
-……그래. 해, 과제.
[물먹는하마 : 헷ㅋㅋ]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헤드셋의 마이크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사실이고, 뭐가 거짓일까.
거짓이라면 왜 거짓을 말한 걸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건 꽤 다른 선상에 있는 일이다.
언제나 곧게 뻗었던 단단한 어깨가 조금은 축 늘어졌다.
-하마야.
[물먹는하마 : ㅇㅇ?]
-너 무슨 과였더라.
사실 고신재는 이 답을 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굳이 콕 집어 물어본 건 이유가 있다.
[물먹는하마 : 갑자기 왜??]
[물먹는하마 : 야ㅋㅋ 너 내 사진 예전에 봤잖아]
-사진과였나.
[물먹는하마 : 엉 뭐 그렇지]
하마의 이번 대답은 단순히 솔직한 답이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고신재는 이 짤막한 답변으로 ‘백한빈=하마’의 등식의 끝에서 이내 커다랗게 적힌 동그라미를 새삼스레 다시 받아든 셈이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한 가지 물음이 더 생기기도 했다.
……하마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기준은 뭘까?
뭐가 거짓말이고, 뭐가 사실일까. 고신재는 문득 궁금해졌다.
솔직히 이쯤 되면 좀 혼란스러울 정도다.
모든 정황은 백한빈이 하마라는 걸 증명한다. 하지만 그 반대가 문제다.
저 요란을 떠는 하마와 그 세상만사에 관심 없는 뾰족한 눈매를 한 백한빈이 같은 사람이라니.
지킬과 하이드도 아니고 이게 무슨 혼종인가 싶다.
[물먹는하마 : 뭐임 왜 갑자기 말이없음]
[물먹는하마 : 야 근데 넌 전공 뭐냐?]
하마는, 아니 백한빈은 분명 취한 채 말했었다.
「왜 나는 걔에 대해 아는 게 없을까. -아니. 내가 아는 건 기대도 안 해. 안 하는데. …그런데 걔는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안 궁금할까? 5년이잖아. 5년인데….」
고신재는 오늘따라 유독 말을 망설이는 상대의 번잡스러운 대화창을 물끄러미 눈에 담으며 숨 쉬는 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고 있다가, 혼잣말 같은 대답을 툭 던졌다.
-비밀.
[물먹는하마 : .......뭐????]
-과제해야 한다며. 안 해?
[물먹는하마 : 아니;; 저만 까나요??]
어떻게 자기 신상만 쏙 먹고 튀나며 채팅창 가득 투덜대는 문장은 얼핏 뾰족해 보인다.
하지만 가만 보면 딱 거기까지다. 더 이상 저에 대해 묻지 않고 슬쩍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대체 백한빈은 가나다라123의 뭐가 그렇게 좋아서 술까지 마시고 인터넷 속 인연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좋아한다 말하고 다녔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고신재는 문득 작게 헛웃음이 나왔다.
“……후우.”
요 며칠 그 ‘인터넷 속 인연’이, 지나온 5년이 어그러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건 사실 제 쪽이었음을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하마’가 ‘가나다라123’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백한빈이 ‘하마’라는 사실도.
알게 된 이상 눈 감고 모르는 척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엉망이 된 요 며칠이 질릴 만큼 잘 증명해줬다.
심지어 더는 한탄도 못 하겠다.
사실 정말 모르는 게 나은 사람은 저보다도 백한빈임을 모르지 않아서다.
게임 오버가 나도 버튼 하나로 무한정 재시도 할 수 있는 컴퓨터 속 세계와는 달리, 현실은 끝나면 정말 그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백한빈과 저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나온 엔딩 루트는 두 개다.
첫 번째. 백한빈이 가나다라123과 고신재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끝. 두 번째. 하마가 가나다라123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면 끝.
고신재는 이 두 가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마, 아니 백한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아직 끝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나다라123에게 하마는 휴대폰을 켜서 시계를 보지 않고 곧장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스무 살에 만나 스물다섯 살인 지금이 될 때까지 제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끔찍했던 몇 년을 함께한 사람이기도 했다.
피곤함에 나가떨어질 만큼 연습을 하려고 해도 날이 갈수록 훈련에 익숙해지는 몸이 그마저도 방해해 기댈 곳도, 도망칠 곳도 하나 없던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건 하마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때뿐이었다.
…아마도, 소중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인간관계가 제게 남았다면 그건 하마와의 몇 년 일거다.
그런데 그걸 정리할 각오를 해야 한다니.
그것도 하마가 저를 ‘정말로’ 좋아하게 됐다는 이유로!
저도 모르는 새 꽤 긴장을 했는지 잔뜩 뻐근해진 목을 가볍게 좌우로 기울이는 남자의 시선이 꽤 정돈된 테트리스 모양을 갖춘 이번 학기 시간표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교통정리를 해야겠네.”
수강정정 마지막 날, 끝나기 세 시간 전.
아직 기회는 있다.
* * *
갑작스러운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3월 초는 봄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너무 차갑다.
“으. 미친. 날씨 왜 이래.”
백한빈은 오늘 집에서 나와 학교까지 도착하는 내내 너무 한겨울처럼 입는 건 아닐까 싶어 두고 온 머플러를 한 100번쯤 떠올렸다.
사계절 중 한빈이 좋아하는 계절은 있으나마나하게 스쳐지나가는 가을뿐이다.
봄은 알레르기 때문에 싫어하고, 여름은 더워서 진이 빠지기에 싫어한다.
하지만, 봄여름이 아무리 싫다 한들 겨울과 비할 바는 아니다.
순식간에 한겨울로 돌아온 것 같은 비 오는 3월.
눅눅한 물냄새는 새학기에 쉬이 뒤따르는 어수선함을 한 풀 꺾게 하기 충분한 서늘함을 품은 채였다.
“…….”
한빈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멀찍이 떨어진 구석에 앉아 알림 하나 없이 말끔한 휴대폰 화면을 괜히 껐다켰다를 반복했다.
사실 백한빈 그는 어젯밤부터 내내 이 상태다.
차가운 봄비는 개강의 산만함을 달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싱숭생숭, 콩닥콩닥 이상하게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아침 9시에 듣는 ‘러시아 문학의 이해’ 같은 저세상 교양마저 이렇게 몽롱한 상태로 오게 될 정도다.
“9시도 안 됐는데 톡 보내는 건 오버인가.”
한빈은 ‘1교시 교양 너무 싫’까지 치던 문장을 도로 지우면서 다시 휴대폰 액정을 껐다.
짝사랑 상대가 이상하다.
아니, 이걸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오히려 감사해야할지 아리송할 지경이다.
아직 9시가 되려면 10분은 남은 시간.
한빈은 몸을 숙여 길쭉한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기댄 채로 지난밤을 다시 회상했다.
솔직히 어제는 그동안 흔한 감기 한 번 걸렸단 말 없던 녀석이 갑자기 마이크도 끄고 있기에 괜히 철렁해서 묻지도 않은 제 얘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은 것에 불과했었다.
혼자 너무 과몰입했나 싶기는 했지만, 상대는 5년간 깊은 얘기는 단 한 번 먼저 꺼내지 않은 남자였기에 걱정은 안 했다.
당연히 여느 때처럼 듣고 넘기겠지 싶었다. 제가 군면제라는 말을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했을 때도 “아, 그래. 좋겠네.” 하고 말았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제는 좀 달랐다.
“…아니. 어디 사냐고 물어 봤을 때부터…, 좀.”
한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미쳤냐, 어디까지 가.’ 하고 엎드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식을 온라인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소위 떡밥 문제였나보다.
아예 여지도 없이 쫄쫄 굶을 때는 몰랐는데, 야금야금 먹이가 주어지기 시작하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진짜 쓸데없는 마음 접으려고 노력이라도 해봐야지 싶었는데!
망상이 번져 변태 같은 미친 꿈으로까지 번진 걸 보고 심각하다 싶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먼저 연락 하던 거 싹 끊고 소위 ‘마음정리’라는 걸 시도라도 해보려 했는데.
왜 갑자기 안 하던 먹이 공급인지 모르겠다.
한빈은 후우욱, 하고 평소에는 그리 토해내지도 않던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저도 모르게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차라리 굶겨 죽이지.”
“뭘 굶겨 죽여?”
“…….”
“하하. 아침부터 살벌하네.”
이것도 사실 꿈이었을까?
백한빈은 순간 푹 숙인 고개를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생각했다.
솔직히 좀 기가 차기도 했다.
망상에 얼굴 디테일 추가된 김에 아침 9시에 ‘러시아 문학의 이해’ 교양을 듣는 것까지 추가되다니. 심해도 정도가 있다.
한빈은 후우우, 긴 한숨을 내쉬며 더욱 몸을 늘어트렸다.
와, 리얼리티 돌았네.
아니 그런데 무슨 꿈에서까지 학교 오는데 이 추운 날씨에 지하철 타고 그러냐. 당연히 시작이 집이 아니라 학교여야지. 무슨 아침부터 일어나서 씻고 밥먹고….
“한빈아.”
“…….”
“같이 듣는 사람 있어?”
그런데, 투덜거림 중간에 끼는 목소리가 꿈 치고는 너무 생생하다.
심지어는 고개도 들지 않는 제게 말까지 계속 걸기까지 한다.
백한빈은 웅크린 그대로 눈을 크게 끔벅끔벅하다가, 머잖아 휙 하는 바람소리가 귓가에 번질 정도로 번쩍 머리를 들었다.
“백한빈?”
“…….”
“옆자리, 비었어?”
“…어…, 아니, 어, 어어.”
“비었다는 거야?”
“…그…. 아마도….”
“좋아. 잘됐네.”
추적추적한 비가 내리는 서늘한 아침에 듣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산뜻한 미소였다.
한빈은 그 흔한 끼이익 하는 소리도 없이 의자를 당겨 앉는 남자를 보며 입까지 다물지 못한 채 얼이 빠졌다.
누구는 머리도 다 못 말리고 나온 아침에 드라이까지 세상 깔끔하게 하고 셔츠깃에 그 흔한 주름 하나 없는 모습이 꿈보다도 더 비현실적이었다.
한편, 고신재는 눈이 마주친 백한빈을 향해 경쾌하리만치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왜?”
“저번 주도……, 이거 들었었나 싶어서.”
“아니. 수강정정. 이거 괜찮아?”
“…그닥….”
뭐라 포장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솔직하게 튀어나온 대답에 흐트러진 올 하나 없는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고신재는 여전히 꿈을 꾸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한 백한빈을 향해 다시 한 번 단정한 눈매를 빙긋 접어 웃었다.
쟤가 여기 왜 있어, 대체!
덕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한빈은 퍼뜩 자세를 고쳐 뻣뻣하게 허리를 세워 앉았다.
이번이야말로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건만 역시 세상살이는 그리 만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듣고 보니 목소리가 그렇게……, 그렇게 닮은 것 같지는 않아.
안 닮았어. 안 닮았어. 안 닮았어. 절대 안 닮았어.
“아. 이런. 책 가지고 와야 하는 게 있었네.”
…아니. 진짜, 정말… 닮기는 했어. 인정. 씨바알….
거기에 ‘한빈아’ 라니. 진짜 돌아버릴 일이다.
백한빈은 옆에 앉은 고신재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게 심호흡했다.
제 팔에 슬쩍 와닿는 단단하고 널찍한 어깨의 감촉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화이트보드만 노려보고 있으려니, 왠지 옆에서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옆을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봤자 교양 강의 두 개 겹치는 거니까.
또, 이런 오전 강의를 혼자 들으면 심심할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한빈은 온갖 적당한 이유를 가져다 대며 흘러내린 뿔테안경을 고쳐 썼다.
……하지만, 무용과 고신재와 겹치는 강의는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
아침에 올린 회차에 이어서 업로드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 오랜만의 연재라 많이 떨렸는데 얼마나 힘을 얻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작품과 연관된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참 많이 고민하며 많은 자문을 받았지만, 저는 작품 내에서 백한빈이 어린시절 겪었던 질병의 이름을 앞으로도 쓰지 않을 예정입니다. 또한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특정한 병 하나를 떠올리기 어렵도록, 여러 증상들을 섞을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번 <힐, 힐, 힐!>은 현실의 이런저런 힘듦을 잠시 잊고 즐겁게 볼 수 있는 밝은 내용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그것 외에 현실에서 내가, 가족이, 친구가,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들이 겪고 있고, 혹은 겪었던 병이 주요 등장인물의 설정 중 하나로 사용된다면, 정말 혹시라도 이 글을 우연히 읽으실 어떤 분은 제가 1차적으로 생각했던 목표인 '즐겁고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어렸을 땐 아팠지만 지금은 수치상 안정되고 완치 된> 백한빈의 과거 질병의 병명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 남기는 쪽으로 가닥을 정했습니다.
오랜 고민과 많은 수정 끝에 내린 결정이라 혹시라도 이 부분 때문에 몰입되지 않는 독자님이 계실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당연히 이해하고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면 연재시에 궁금함이 생길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긴 후기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긴 글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아팠지만 지금은 (본인피셜) 많이 건강해진 백한빈과 슬슬 자기 무덤에 삽을 꽂고 있는 고신재의 이야기로 찾아뵐게요!! ^ ^
오늘도 행복한 저녁 되세요.
항상 넘치게 감사합니다!!!